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
박상진 지음 / 김영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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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보며 역사를 읽다

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 이야기>, 김영사, 2004.



올해 2월 말일부터 목공을 배우고 있다. 언젠가 돌아갈 땅에서 자연을 벗삼아 살기 위함이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가급적 자급자족해야 한다. 그게 자본을 넘어서는 삶이며, 대안적 삶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배우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모공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무에 관심이 많이 간다. 물론 역사 공부는 내 삶의 본령이다. 그런데 그 두 가지가 결합된 책을 보게 되었다.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나무들에 대한 이야기다. 전문성이 있다. 임산공학과 교수다. 평생 나무를 연구한 자연과학도다. 현미경으로 나무 세포를 들여다보고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바로 알아 맞춘다. 그런데 자연과학도가 역사라는 인문학에도 능통하다. 아니 그러기에 인문학자들이 해결해내고 있지 못한 유물의 편년을 컴퓨터 같이 알아 맞춘다.
그러면서도 문체가 상당히 대중적이다. 저자 소개로만 볼 때는 딱딱한 학자풍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법 농담도 집어넣고, 1963년 대학 졸업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최신 유행어까지 구사하고 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읽었다.
고목들을 보면 속이 썩어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것을 보며 늘 불안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한다. 어차피 나무는 껍질 안 쪽 10cm 가량만이 온전히 세포가 살아 있다고 한다. 가운데는 썩어 없어져도 전혀 지장이 없다는 말이다.
임진왜란에서 우리 수군이 일본군 선단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서도 그의 해석은 새롭다. 단지 훌륭한 장수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선의 재질 차이라고 한다. 일본은 삼나무가 잘 자란다. 그래서 그 삼나무로 배를 만든다. 하지만 조선은 소나무다. 소나무는 아주 단단하다. 그래서 거북선의 박치기 전술이 통했다는 것이다. 나도 요즘 목공을 해서 아는데 삼나무는 아주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무른 것이 흠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재질이 느티나무라는 것도 새로 알았다. 그냥 알기만 한 게 아니라 괜히 기뻤다. 그 나무는 흔히 괴목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제주도에서는 굴무기라고 불린다. 제주사람들은 이 굴무기를 많이 활용했다. 그래서 반가웠다. 무량수전만이 아니다. 천마총의 목관, 화엄사 및 통도사의 대웅전, 해인사의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기둥이 다 굴무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상식을 새로 알았다. 물론 기억하기는 버겁다. 워낙 나무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다. 근데 그 와중에 하나 재미있었던 것. 농촌에 가다보면 전봇대 줄에 웬 플라스틱 고깔이 씌워진 걸 보게 된다. 칡덩굴이 타고 올라가지 못하게 막는 장치라는 것이다. 나도 예전에 이걸 본 적이 있는데, 많이 궁금했었다.
어쨌거나 나중에 느티나무를 좀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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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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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관, <조선의 뒷골목 풍경>, 2003, 푸른역사.




강명관,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나오다>로 익숙한 이름이다. 그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국문학, 특히 고전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가 역사책을 또 썼다. 기존 역사학자들이 쓰지 못하는 그런 자료를 가지고 썼다. 거대담론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그 거대담론 뒤에 가려진 일상의 작은 사람들을 조명한 것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왕과 양반처럼 고귀한 사람들 아니면, 홍경래나 임꺽정처럼 무언가 큰 사고를 낸 사람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역사는 기억하지 않는다. 지금이라고 해서 다를까?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아 나와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역사 속에서 잊혀진 인물이 될 것이다. 이들을 누가 기억할 것인가. 장구한 시간 우리 역사를 만들어간 대다수의 상놈 개똥이, 종놈 소똥이, 여성 말똥이들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준단 말인가. 역사라는 거대하고 엄숙한 담론에 가려진 잊혀진 사람들의 일상의 삶, 그들 삶의 리얼리티는 이런 작고 시시한 이야기들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라며 그는 너스레를 떤다. '작고 시시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에 관심 갖는 자기 같은 사람은 한심한 사람이라고 괜히 위악을 떨어본다. 물론 요즘 관심이 온통 생활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 시대적 코드에 맞아 강명관의 글은 대중적 호소력을 갖는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글이 단순히 뜨기 위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치밀하고 섬세하다. 그의 섬세한 촉수가 있었기에 그런 역사를 복원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기존 역사학자들이 많이 놓치고 있었던 한시, 생활기록 등 국문학에서 오히려 더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구성했다. 물론 공적 자료인 <실록>으로 보완할 것은 또한 보완했다.

그의 섬세한 촉수가 부럽다. 아니 그런 촉수는 그 만한 노력, 발품, 무거운 엄덩이기 있었기에 만들어진 촉수일 것이다. 그저 주어진 것은 없다.

나 역시 요즘 관심을 돌리고 있긴 하다. "역사가 기억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의 역사를 위하여" 말이다.

그가 이 책에서 다룬 사람들은 민중의사, 군도와 땡추, 도박, 금주령과 술집, 과거, 성풍속, 반촌, 별감, 탕자 등 그야말로 아웃사이더적인 주제들이다. 술과 관련된 역사만 다뤄도 대단하지 않겠는가. 하긴 몇 년 전에 <술의 사회사>라는 책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처럼 우리 생활 바로 곁에 있으면서 의도적으로 눈여겨 보지 않았던 테마들. 이제 정당한 관심을 받을 때도 되었다.

그와 함께 그의 서문에서 소개한 세계최초 금속활자의 우리민족사의 허구를 지적하는 글이 와 닿았다. 분명 세계 최초로 만들었으되, 그것을 대중화하지는 못했다. 구텐베르크의 그것은 대중화하기 쉬어 그것이 곧바로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러니 단순히 누가 먼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이 이후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부럽다. 나도 시작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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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미래사 - 21세기 파국과 인간의 전진
W. 워런 와거 지음, 이순호 옮김 / 교양인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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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와거 지음, 이순호 옮김, <인류의 미래사>, 2006, 교양인.




또 속았다는 느낌이다. 분명 믿을만한 정보를 제공하는 서평 코너에서 줏은 것인데, 서평과는 달리, 나는 책을 읽는 내내 몽롱하기만 했다. 월러스틴 같은 대학자가 좋은 평을 써주기까지 했는데, 왜 나는 깊이 공감하지 못하고 내내 몽롱했던 것일까. 책이 문제 있는 것일까, 내가 문제 있는 것일까. 후자다. 단연코 나에게 문제가 있다.

미래를 통찰할 만큼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게 문제였다. 물론 서평에선,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아나키즘을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다고 했기에, 나는 '그럼 그렇지' 인류 미래의 대안은 아나키즘이야' 하면서 주저 없이 책을 주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아나키즘이 상세히 다뤄지진 않는다. 그냥 미래 사회를 예측하면서 아나키적 조직 원리도 잠깐 활용했다는 느낌이다. 치밀한 과학서보다는 공상과학 소설 같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월러스틴 등 서평자들은 그런 공상 소설을 넘어서 탄탄한 사회과학적 근거를 갖추고 쓴 미래학의 대표작이라고 칭찬했다. 그래서 내가 갑갑하다. 나는 그런 공감을 못했기 때문이다.

암튼 저자는 많은 노력을 했다. 과거 역사를 구성함에 있어서도 어떤 단서를 잡고서 만들어 가듯이, 미래 역사 역시 전혀 못할 건 아니라는 논리로 글을 풀어간다. 현재까지 나타난 여러 단서를 가지고 미래를 짜 맞춰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감한다. 이 부분은.

그래서 저자가 예측하는 미래는 여러 단계를 보여준다. 먼저 자본주의가 지금보다 더 극을 향해 달려간다. 국가, 국경을 넘어 자본이 지배한다. 사실 세계 10대 기업이 사실상 세계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다. 이에 저항하는 소국들은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나 역시 충분히 공감한다. 앞으로 자본주의의 야만은 더욱 강화될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은 그럴 것 같다. 그래서 어쩌면 나는 참으로 어려운 인생을 살아가야할 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나 이후의 세대에게 희망이 있기에 견딜 만도 하다. 선구자적 삶으로 그것을 증거하며 사는 것이다.

하지만 극에 달한 자본주의의 끝은 파국이다. 2044년 세계3차대전이 터진다. 자본이 그것을 통제하지 못한다. 엄청난 재난이다. 그리고 나면 그 동안 암약하던 '세계당'이 세계를 장악한다. 이 ‘세계당’은 과거 사회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강하다. 당연하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볼대로 본 후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당’이 만든 게 세계연방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거의 극복했다. 성장보다는 삶의 질이다. 누구나 성장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다. 참으로 좋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모순은 여기서도 드러난다. 경제는 그럭저럭 견디겠지만, ‘세계당’이 세계를 장악하다 보니 획일화가 문제다. 그래서 결국 터진다. ‘세계당’ 이후 세력을 키워간 것은 '작은당'이다. 슈마허로부터 시작된 이 '작은'은 결국 세계에 그 세포를 넓혔던 것이다. 이게 바로 아나키즘이다. 그러나 아나키즘의 맹점으로 자주 지적되고 있는 파편화, 분산화에 대해서는 이 책도 별다른 해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서는 우주 개발, 우주 이민 등의 공상과학으로 넘어간다. 자본주의-사회주의-아나키즘으로 전환하는 미래를 현재의 사회과학을 바탕으로 잘 구성한 듯은 하지만, 왠지 뒤로 가면서 자꾸만 공상과학으로 읽혀진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만큼 나는 미래를 보는 눈이 좁아서 그럴 것이다.

암튼 그래서인지, 내내 몽롱했다. 본시 나는 공상과학 류를 좋아하지 않았다. 스타워즈도 그랬고, 매트릭스도 그랬다. 그런 냄새, 이건 미래를 말하면서도 철저히 자본주의적이고, 미국식이다.

그보다 나는 인류의 미래를 다른 곳에서 찾고 싶다. 완전한 전환이다. 패러다임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대재앙 이후의 일이지 싶다. 그 재앙 이후에 인류는 커다란 성찰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이 책에서는 세계연방이겠지만, 나에게는 동양적 사상, 자발적 가난으로의 세계라고 믿고 싶다. 물론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런 정서가 나의 바닥에 깔려서인지, 이 책 같은 공상 과학적 미래관 하고는 쉽게 친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편협할 필요는 없다. 넓게 읽고 크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몽롱하긴 했지만, 그래도 먼 미래를 한 번 슬쩍 쳐다보는 기쁨은 있었다. 물론 내가 죽은 이후의 세상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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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 한국과 독일 일상사의 새로운 만남
이상록 외 지음 / 책과함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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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상록 외, <일상사로 보는 한국근현대사>, 책과함께, 2006.




한양대 임지현 교수의 흐름에 한 때 나는 크게 반발했다. 그의 민족주의 비판에 대해서다. 운동권으로부터 입은 상처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 역시 이제는 임지현의 입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의 성향과는 무관하게 그의 논지는 옳다. 민족은 근대의 산물이며, 그의 민대로 '민족주의는 반역'일 뿐이다.

아마 그의 후학들이지 싶다.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사람들 말이다. 그들이 독일 에어푸르트 대학교 역사인류학연구소와 함께 했던 워크숍 '일상사, 그 가능성과 한계'에서 발표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일상사, 솔직히 아직은 어렵다. 나도 어렵지만 이 책을 쓴 사람들 역시 아직은 어려워하는 것 같다. 주류 실증주의 역사학의 눈치를 보는 게 너무 강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이들 역시 기본적으로는 한국적 논문 시스템 밑에서 들을 썼었다. 그런 사람들이라 일상사로의 전환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취지에는 공감하면서도 글을 풀어내는 방식을 보면 과거의 글쓰기와 별 차이가 없다. 그래도 시도 그 자체만으로도 큰 발전이다.

나 역시 고민한다. 박사 논문을 써야 하는데, 이런 일상사의 방법을 적용해 보고 싶긴 하나 두렵다. 아직까지 그런 방법에 익숙치도 않고 또 그런 방법을 썼을 때, 기존 학계의 심사과정을 통과할 수 있을지도, 그리고 그런 일상사적인 방법을 쓰기 위한 자료 수집에도 자신이 없다. 그래서 여전히 망설여진다. 하지만 매력적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매력적인가? 거대 담론이 놓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민족이라는 코드 외에 그들이 개인, 가족, 친족, 지역, 공사조직, 젠더와 같은 다양한 차원에서 경험하고 실천했던 삶과 행위는 오랫동안 역사가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식민지 민중들은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겪은 수난과 저항의 역사는 회복할 수 있었으만 일상적 삶의 조체로서는 자신들의 역사를 회복하지 못했다"

쉽게 말해 일제 강점기의 경우, 수난과 저항의 역사만 교과서에 실려있을 뿐, 그들이 무엇을 주로 먹었는지, 화장실의 구조는 어땠는지, 그때의 침구류는 어땠는지, 놀이는 무엇이었고, 각종 의례는 어떠했는지, 그 속에서 그들이 무슨 애환을 느끼며 살았는지에 대한 연구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 일상을 이제라도 보듬겠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비판도 많다. "반이성주의, 계몽에 대한 부정, 값싼 패배주의, 파시즘에 대한 책임 면제" 따위가 비판의 핵심이다. 모두 맞는 지적이다. 일상사가 자칫 호기심 채우기 수준에 머무르고 만다면, 그리하여 구조와의 결합을 시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위에서 염려하는 비판들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쟁터는 뻔하다. 그러나 그 전장에서도 일상은 있다. 이런 것에 주목하려는 독일 학자의 시선이 감탄스럽다. 폭력 그 자체에 대한 깊은 고민도 있다.

반면 학국학자들의 연구는 모두 사례 연구다. 이론 그 자체로 들어가고 있지는 못하다. 그리고 그 시기는 대부분 일제 강점기이다. 나름대로 충분히 소화하고 쓴 글도 있지만, 무늬만 일상사인 경우도 더러 보인다.

여성 잡지 상담란을 분석한 연구는 흥미롭다. 그 속에서 당시 여성들의 고민을 잡아낸 것이다. 여기서 첩 제도문제는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달리 상당한 비중을 가졌던 당시 사회현상이었음을 보게 된다. 일전에 가계부를 모아 둔 것을 가지고 분석을 시도하겠다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도 괜찮은 시도라고 여겨진다.

계속 논란이 되는 시대 중 하나는 박정희 때다. 그가 한국현대사에 끼친 해악이야 말할 바 없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의 일상에선 그 시대를 풍요롭게 기억한다. 긍정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재단되지 않은 역사, 민중들 스스로 기억하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부여할 것인가. 이게 민중들 이야기를 그대로 일상사로 여기지 않고, 제대로 된 분석과 의미 부여를 통한 일상사일 것이다.

어쨌거나 나 역시 빨리 활로를 마련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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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이덕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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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덕일,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웅진닷컴, 2001.




삶이 많이 바뀌었다. 운동, 사회개혁 등이 언제나 내 삶의 화두였고, 또 그러했기에 삶의 긴장을 늘 의식하며 살았다. 근데 요즘은 많이 느슨해졌다. 성숙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해보지만 그건 솔직하지 못한 변명이다.

물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변화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변화가 진정한 성숙이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가? 글쎄, 자신이 없다. 나름의 모색은 한다. 사상적으로도 그렇다. 몇 년 전부터 아나키즘을 공부하고 언제가 치열하게 이 사상을 연구하리라 생각하고 있다. 또한 그 연구는 삶과 괴리되어선 안 된다. 아직은 막연하다. 그러나 자연스레 그 흐름으로 간다.

그건 내가 하고 있은 요가 수련과도 그리고 생태적 삶과도 연결되는 사상이다. 그래서 이 방면의 책을 구해 두고 있다. 그 중 이번에 읽은 책 <아나키스트 이회영과 젊은 그들> 역시 일찍부터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했을 땐 이미 절판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예스24가 아닌 다른 서점에서 재고를 발견했다. 주저 없이 구입했다. 그리곤 읽은 것이다.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그 외에도 여러 이유 때문에 이 책은 나를 끈다. 글쓴 이덕일, 그도 나를 잡아 끄는 요인이다. 그를 보면 항상 부럽다. 엄청난 다작이다. 게다가 그는 굳이 학벌이나 대학에 연연하지 않는다. 빵빵한 실력 그것으로 한국역사학계를 주름잡는다. 물론 기성의 학계에서야 외면하겠지만 대중서로서 그 만큼 영향력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분야도 넓다. 고대사에서 항일시대까지, 그의 발걸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니 부러울 수밖에. 나 역시 기성 학계를 불신한다. 그리고 대중성을 지향하면서 향토사 작업을 해 왔다. 그러나 제주지역은 너무 좁다. 그래서 제한적이다. 물론 그것이 나의 연구를 막을 핑계는 못 된다. 다만 내가 의기소침하기 쉬운 악조건일 뿐, 일을 그만 둘 필연적 요소는 아니다. 언제 내가 남의 눈 때문에 공부하고 안 했나.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해야 한다는 당위까지 있어서 하는 일이다. 다만 게으르고 능력이 한계가 많아서 그럴 뿐이다. 게다가 밥벌이까지 같이 해야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적다는 게 문제다.

그건 그렇고 이 책은 느낌이 참 좋다. 저자 이덕일에 대한 부러움이야 이 정도에서 접고, 아니 한 마디 하고 갈 건 있다. 그가 아무리 대학 강단에서 소외된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세상이 원망스럽다고 하더라도, 지식인이 걷지 말아야 할 길을 걷고 있는 건 문제다. 그는 줄기차게 조선일보에 글을 써댄다. 물론 그의 상품 가치를 알고 있는 조선일보가 그를 끌었겠지만, 그렇다고 그런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건 존경받을 지식인의 모습은 아니다. 지식 장사꾼인 건 맞다. 나는 그리 생각한다. 타산지석....

먼저, 이회영. 항일운동 공부할 때 조금은 알았던 인물이다. 경북의 대 부호였는데, 모든 재산을 팔고 그것을 가지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인물, 그래서 진정 노블리스 오블리쥬를 보여줬던 인물, 그리고 그 후손 중에 이종찬이가 있다는 정도. 그게 내가 지금까지 그에 대해 알고 있던 지식이다. 그가 아나키스트였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고, 또한 나에게 있어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나 역시 요즘은 아나키즘에 많이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근데 그가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항일운동을 하면서 나중엔, 먹을 것이 없어서 집에 가만히 누워 있어야 할 정도로 어려움 속에서 살았다는 대목을 읽을 땐 참, 가슴이 많이 아팠다. 우린 어느 정도 생활이 될 땐 이상적 삶을 고민하다가도 막상 경제적 궁핍이 다가오면 지극히 현실적인 자세로 돌아서지 않는가. 항산이라야 항심이라는 맹자의 말씀을 핑계 대면서.

근데 그는 달랐다. 그런 어려운 생활도 이겨냈을 뿐 아니라 67세 경찰서 취조실에서 고문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항일운동의 끈을 놓아보지 않았다. 요즘처럼 내가 이리저리 삶의 방향을 기웃거리는 처지에선 그런 그의 일관된 삶을 보며 머리를 절로 숙인다.

아나키즘, 사람들은 이 사상을 잘 모른다. 좌우 대립이 심했던 우리 역사에서 자본주의도 아니고 사회주의도 아닌 그 사상이 쉽게 서 있긴 힘들었다. 남과 북 모두에게서 배척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바로 남과 북의 약점을 모두 보완할 수 있는 사상임을 말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아나키즘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철저히 반대한다. 경제적으로는 분명 사회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그 실현을 위해선 당의 주도하는 공산주의적 해결방식엔 반대한다. 철저한 자유, 자치, 연대의 기치만이 이것을 보장할 것이라는 논리다. 예전에 프루동이 <빈곤의 철학>을 썼을 때 맑스가 이를 비판하며 <철학의 빈곤>을 썼고, 그것을 대충 본 나로서는 맑스가 옳다고 여겼다. 당이 있어야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전두환 정권을 엎어버리고 우리의 권력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즘 소위 386이 적지 않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시점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행태는 저으기 실망스럽다. 근데 그건 비단 그들의 인품 때문이 아니다. 권력이라는 것 자체의 속성 때문이다.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같은 사람들이 이미 스탈린 독재를 예언했던 것 역시 마찬 가지다. 그들에게 무슨 예언적 기질이 있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공산주의 이론에 있는 당 주도, 그 자체에 이미 그런 함정이 있음을 빨리 알아차렸을 뿐이다.

그래서인가 저자 이덕일은 "만약 그 열정에 휩싸였던 80년대의 주도적 사상이 맑스 레닌주의나 김일성주의가 아니라 아나키즘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진단한다. 실현 가능성이야 적은 이야기겠지만 그 마음엔 공감한다.

아나키즘은 '그 누구로부터도 억압당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억압하지 않는' 사상이다. 그런데 1902년 당시 도쿄대학생이던 게무리야마 센이치로가 그걸 '무정부주의'로 번역한 이래, 많은 오해 속에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그 대책 없는 파괴적 뉘앙스 때문에 사실 동북아 아나키즘 운동이 많은 제약을 받아왔던 게 사실이다. 그건 지금까지도 그렇다. 자본제적 착취에 철저히 반대한다. 그러나 그 반대를 위해 강력한 당이나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연대일 뿐이다. 상호경쟁이 아니라 상호부조가 크로포트킨의 사상이다. 그랬기에 이회영이, 신채호가 이에 공감했을 것이다. 그 동안 이런 내용은 너무도 알려져 오지 않았다.

이 책에서 다가오던 또 하나의 테마는 지사들의 삶이다. 물론 당시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지사들이 자신의 목숨을 과감히 내던졌겠지만, 그래도 그런 삶이 희화화되는 요즘 세태 속에선 다시 내 마음을 긴장케 한다. 단순한 명분이나 정당성,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절실한 삶의 자세에서 나온 자기 희생, 이런 것은 요즘처럼 경박한 세태일수록 더욱 강조되어야 할 대목이다.

이광수가 신채호를 평했다는 대목, "단재는 언제나 칼날 같은 의지와 절개로 뭉쳐진 사람으로 시인적 여유조차 아니 가진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이덕일은 신채호가 자신이 가진 유일한 재산인 입고 있는 옷마저도 혁명 동지의 자녀들에게 벗어줬음을 언급하며, 신채호는 시인적 여유는 없었을지언정 혁명가의 여유는 넘쳐 흘렀다고 썼다. 적절한 지적이다.

상해를 점령했던 일제가 반전의 사상을 가진 아나키스트들을 이용해 먹으려고, 상당한 유혹을 제시하며 반전운동을 요구하자. 상해 아나키스트 책임자였던 정화암은 "전쟁이 싫으면 일본놈들이 보따리 싸들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그만 아니오. 반전운동이 우리 이념에 맞으니 하긴 해야지요. 그러나 반전운동은 중국에 있는 우리가 아닌 일본에 있는 일본 아나키스트들이 해야 합니다"라고 아주 정확히 답변을 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어정쩡한 타협을 요구하는 주변 사람들을 떠올린다. 죄를 지은 사람을 탓하지 않고, 그 놈의 실체는 그대로 기정사실화한 채, 피해자의 변신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한미 FTA협상도 마찬가지다. 도둑은 미국이다. 그들에게 우린 항의해야 하지 우리 농민에게 변신하라고 요구할 게 아니다.
또한 중동의 테러범을 비난할 게 아니라 그런 테러를 유발하는 미국과 이스라엘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책을 닫으면서 어정쩡한 양비론을 다시금 경계한다. 한 번 사는 인생, 제대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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