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05년 3~4월 - 통권 81호
녹색평론 편집부 엮음 / 녹색평론사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녹색평론> 2005년 3-4월호.




슬며시 놓아버렸던 <녹색평론>을 다시 슬며시 집었다. 우연한 계기였다. 그 바쁨 때문에 놓았던 가치, 아니 사실 바쁘기 보단 버거웠기 때문에 내려놓았던 책이다. 마음은 생태주의를 향하고 있어도 현실에서 내가 전혀 따라가고 있지 못하는 갑갑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더 이상 <녹색평론>을 읽는 건 차라리 고문이었다.
놓아버렸을 때, 아쉬웠지만 편하긴 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잡는다. 그 동안에도 많이 망가졌기 때문일 것이고, 그보단 나의 삶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이젠 조금은 거리를 두고 살고 싶다. 사회 속의 치열함이 때론 필요했지만, 그리고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를 넘어선 생태적 가치 또한 추구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젠 그 고문이 고문이 아닌 기쁨이 되길 희망한다.

이번 호에서 특별히 마음을 끌었던 건 고병헌 교수의 '고령화 사회에서의 노동과 복지'에 있었다. 고령화 문제의 해결은 상업적 가치를 넘어선 사회적 가치를 찾을 때 가능하다는 논리다. 예전에 복지사회학을 공부할 때, 이런 고민을 하긴 했지만, 그건 현실과는 거리가 한참 먼 이상적인 구상에 불과하다고 멀리해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꿈을 꾸기에 살아간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그리하여 상업적 가치를 넘어서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야만 할 길이겠다. 비시장 경제에서의 노동, 본래 사회주의자들이 꿈꾼 것도 이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어쩌면 더욱 내 마음을 잡아당긴 건 김호열 목사의 '고백과 다짐'이다. 생태 공동체, 언제부터인가 나 역시 많이 고민했던 테마다. 그래서 대안학교도 꿈꿔 보았고, 그랬지만, 그게 쉽지 않을 것 같아 망설였던 주제다. 금전적인 것만이 장애는 아니다. 가장 어려운 게 사실은 인간관계다. 특히 한 고민 이후에 몰려든 사람들이라. 개성이 강하다. 그 강한 개성을 조화시켜야만 공동체는 가능하다. 그걸 어떻게 조화롭게 만들 것인가.

김호열 목사는 이것을 고백과 다짐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핵심은 마음 비우기, 내려놓기다.
1. 가족이 내게 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폭력이다. .... 역량보다 더 많은 것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의 삶을 부정하는 잔인한 폭력임을 인정.....
2. 훌륭한 행동과 놀라운 능력은 유혹이다.
이 격언 역시 내게는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무엇인가 모범이 되려고 했다. 그것이 지나온 삶의 전부인 지도 모르겠다. 근데 그게 유혹이란다. 사실 그건 강박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건 파괴적 결과를 낳는단다. 내려 놓자. 그냥 자연스럽게. 훌륭하러고 애쓰지 않을 때, 그 때라야 진정 공동체가 산다.
3. 사상이나 교리가 아닌 바른 관계가 공동체의 진리다.
이것 역시 딱 맞는 말이다. 우리 지식인들은 얼마나 많이 사상과 교리고 관계를 재단해 왔던가. 그것만이 아니다. 그걸 타인에게 강요까지 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4. 가족의 약점과 한계 속에서 미래의 풍성한 수확을 본다.
기다리라는 얘기겠다.
5. 과장되고 허세스런 표현과 자기노출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도 뜨끔함을 느낀다. 나는 얼마나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는 인간인가. 그것도 내 능력만을 과시하면 그나마 낫다. 내 능력을 넘어서는 부분까지 내 것인야 허세를 부려왔다. 고백, 그래서 김 목사가 이 5가지 말을 고백이라고 했구나. 구구절절 내게 해당되는 말이다. 비단 공동체 생활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런 고백은 수시로 하면서 나를 성찰해야겠다.

타인을 자기화 시키려 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의 타자화 이게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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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오따쓰 - 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앨런 와이즈먼 지음, 황대권 옮김 / 월간말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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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앨런 와이즈먼, <가비오따스-세상을 다시 창조하는 마을>, 말, 2002.

내가 욕심이 많아진 걸까? 아니면 허겁지겁 급한 일에 매달리다 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어진 걸까? 이 책을 번역한 황대권 말이 체 게바라의 혁명일지를 읽은 이래 이토록 흥분하여 읽은 책이 없다고 하길래, 게다가 출판사도 월간 말이길래, 아무런 의심도 없이 아무런 주저도 없이 택한 책이었다.

그러나 웬걸, 책을 읽어가면서 공동체 조직운영의 원리는 애매한 협동, 경쟁심 없음,조화, 자발적 공동체 등의 그저 그렇게 좋은 단어들만 나열될 뿐, 정작 내가 갈망하는 조직운영의 원리는 드러나지 않았다. 구체적 인물들의 이야기와 태양열, 풍력 이용의 사례들은 자주 언급되었지만, 그것마저도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 막막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히려 내가 얻은 것은 콜롬이아의 위치, 콜롬비아가 정부군과 좌익반군과의 대립이 엄청 심하다는 것, 그리고 사적 민병대의 만행이 또한 끔찍하다는 것 등의 내게는 무척 새로운 정보들이었다. 게다가 커피 생산 세계 2위, 마약 재배와 밀매, 납치산업의 번창 등, 생태 공동체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해결해야될 사회문제가 산적해 있다는 걸 알게 된 점이 오히려 이번 책읽기를 통해 얻는 산물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조직운영의 원리를 계속해서 찾아보았다. 나름대로의 결론이라면 카리스마적 운영이라고 우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파울로 루가리라고 하는 가비오따쓰 공동체의 설립자에 의해 거의 모든 것이 마련된 것 같다. 우선 그가 땅을 제공했으며, 또한 빵빵한 가문 배경을 통해 유엔이나 대통령으로부터의 지원도 받아 내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이게 핵심인 것 같다. 우선 이런 든든한 배경이 있었기에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겠다는 시도가 가능했던 것 같다.

아주 우수한 대학 연구진들이 이게 가세했던 것도 아마 그가 가진 배경이 큰 몫을 했던 것 같다. 물론 그 배경 활용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그런 공동체를 일반화하기가 쉽지 않겠다는 아쉬움의 표현일 뿐이다.

스페인의 몬드라곤처럼 기존의 사회구조를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가비오따쓰의 경우는 완전히 새롭게 계획적인 생태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그것도 사람이 살지 않는 버려진 사바나에 만들었다. 화석 연료가 다하고 사람들이 더 이상 찾아갈 곳이 없을 때, 그럴 때를 대비해 미리 앞날을 당겨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았다.
물론 바탕에는 자연계를 관통하는 조화, 협력, 공생, 순환의 원리가 있다. 조직 원리는 이렇게 추상적으로 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구체성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은 어쩌면 파울로 루가리라는 한 카리스마에 의존한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쩌면 위험하다. 그가 사라지고 나면 그 공동체가 지속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그게 사라지더라도 그들이 남긴 태양열 집열판, 풍력 발전 등의 아이디어는 남을 것이다. 시도 하나만이라도 어딘가.
다만 나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결해주지 못했던 점은 아쉽다. 황대권이는 그렇게도 찬탄한 책인데.
내게 여유가 없어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그런 류의 공동체가 아직 현실성을 갖지 못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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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귀농총서 13
요시다 타로 지음, 안철환 옮김 / 들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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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시니 타로,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작은 나라 쿠바의 커다란 도전, '늘 푸른 혁명'>, 들녘, 2004.


쿠바는 내게 피델 카스트로와 그의 동지 체 게바라라는 이름으로만 기억되고 있던 나라다. 그런데 몇 년 전인가 얼핏 듣기에 그곳에선 일체 농약을 쓰지 않고 유기농 농법으로 전환해 세계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신문에서 살짝 본 것인지, 아니면 어떤 강연회에서 들은 것인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그래서 아주 피상적인 기억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접하면서 그 실체를 보다 상세히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의 제목을 보았던 건, 전국역사교사모임에서 내는 책 <역사교욱>에서였다. 역사연구에 있어서도 이젠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있다. 녹색사관이라고나 할까. 물론 아직은 초보단계다. 그런 과정에서 제목만 만났던 이 책.

대학원 '조직사회학'과목의 책을 읽다가 대안적 조직이라는 화두를 잡기 시작한 건 불과 한 달 전이다. 몬드라곤, 혹은 여러 영성 공동체 등 어쨌거나 경쟁과 불신과 탐욕의 현재 조직을 넘어선 그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젠 나도 지쳤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대안이 없으면 정말 참담할 것만 같다.

그런 과정에서 만난 책이라 참으로 좋았다. 그리고 피상적으로만 보았던 쿠바의 생태농업에 대해서 그 배경부터 경과까지 자세히 살필 수 있어서 좋았다.

본래 쿠바는 한국보다 더 생태농법으로 전환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플랜테이션 농업이라고 대량의 단일 작물 재배국가였으니 말이다. 그런 쿠바에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그것은 자발적 전환이 아니었다. 처음엔 강요된 환경 때문에 그랬다. 미국의 경제 봉쇄와 소련의 몰락, 쿠바에겐 절망밖에 남을 게 없었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의 또다른 표현이라든가. 쿠바는 암담한 상황을 슬기롭게 이겨냈다. 권력의 분산과 풀뿌리 권력의 육성, 엔지오와 지역 켜뮤니티의 활성화가 그 바탕을 이뤄줬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아름다움도 많았다.
"정치와 경제에 막다른 길이 보이면 이구동성으로 나오는 소리가 규제완화와 경쟁원리의 도입이다. 그러나 쿠바에는 시장원리의 도임은 거스를 수 없다해도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회가 물질적인 욕망에 지배당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이 때문에 경제적 동기를 대신하는 것으로서 국민의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참여가 중시되었다."

"사회주의는 자원의 공평한 분배 이상의 것이어야 합니다......체 게바라가 추구한 것은 공업화의 진보로 사람들이 많은 소비품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윤리와 가치관에 근거한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착취와 인종차별, 욕망에 근거한 자본주의와는 다른 가치관 말이죠."

"그런데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보장해주는 것에서 사회주의가 물러서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우리는 물질 분배에 대해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을 무조건 신뢰하지 않아 시장의 힘이 여러가지 일을 결정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의료, 주택, 교육 등 기본적인 인간의 필요에 대한 권리를 보호하려고 했을 때 시장의 힘으로는 지배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존엄하다는 진리는 시장보다 위에 있고, 생존권은 자유시장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이 구절, "인간이 존엄하다는 진리는 시장보다 위에 있다"는 말이 참으로 좋았다. 우린 종종 이런 상식조차 잊고 시장은 절대불변의 신인양 대하는 경우가 참 많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그러고 보면 미국의 어떠한 봉쇄도 결국 태양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말이 된다. 자연으로 향하는 지향이 있는 한 어떠한 위협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건 우리에게도 다가오는 위기이기 때문에 준비가 필요하다. 식량과 석유 위기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며 과연 우리사회도 쿠바와 같은 변화가 가능할까 하며 회의를 했다. 그것도 아주 진한 회의를.
솔직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역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다.
"하지만 새로운 역사는 항상 극적인 반전 속에서 태어나게 마련이다. 아직은 비주류이지만 분명 신뢰와 자발성에 기초한 새로운 기운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웅크리고 있을 것이라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나는 더욱 쿠바의 희마이 결코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맞다. 격동성 하면 한국 아닌가. 지금이야 참담해 보일지라도 결정적 순간에 무한 에너지를 발휘하는 한국현대사를 보면 쿠바의 경험을 결코 남의 일로 미뤄둘 것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제 준비하자. 생태적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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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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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녹색평론사, 1996.

 

이곳의 우리에게 진보는 없어도

복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해도

더 깊은 법의 길을 가지고 있다(19쪽)

 

가난하지만 더 행복한 사람들, 마음 속에 깊은 만족과 평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라다크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들었다. 책을 사 놓고도 읽지는 않았지만, 늘 자발적 가난과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가야 할 ‘오래된 미래’를 이 책이 잘 말해주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중요한 책이기에, 깊은 명상을 통해 읽어야 할 책이기에 미루고 미뤘었다. 찬찬히 깊게 읽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보면 놓치게 되는 많은 가르침들.

하지만,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면 예의 그 날카로운 ‘사회과학적 분석’이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결국 전 세계 자본주의의 획일적 지배가 관철될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고립 폐쇄된 공동체에서야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을지라도 결국 개방화 시대에 문이 열리고 나면 그 천진한 아름다움도 깨지고 말 것 아니냐는.

라다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75년 인도가 라다크 지방을 관광을 위해 개방하면서부터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헐리웃 문화에 물들기 시작하고, 돈을 중심으로 사고가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이걸 과연 막을 수 있을까. 헬레나 노르베르-호지는 괜히 과거에 집착하며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오래된 미래는 결국 도달할 수 없거나 아니면 완전히 망가진 다음에야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스쳐간 게 사실이다.

물론 문제는 다 알고 있다. 공감도 한다. 예를 들어 “왜냐하면 벌목이 돈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죄가 증가하고 사람들이 전축이나 비디오를 잃어버려서 새로 사거나, 병자나 노인들을 값비싼 보호시설에 맡기거나, 정서나 스트레스에 관련된 문제 때문에 도움을 받거나 물이 너무 오염되어서 생수를 사먹으면 이 모든 것이 GNP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고 경제성장으로 측정된다”라는 지적에서 보듯이 결국 경제 성장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스운 짓이긴 하다. 이건 “일차원적 진보관”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차원적 진보관을 과연 누가 쉽게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건 ‘반개발’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중앙집중화된 자본이 이걸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적 눈으로 보면 정말 그렇다. 자립을 높일 수 잇는 마을 규모의 수력발전소나 태양열 오븐, 가정용 온수기 같은 소규모 프로젝트에 대해서 자본이 관심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깨달은 사람들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말이 쉽지. 사회과학적 견지에서 볼 때 이건 거의 불가능하다. 구조만으로 보면 그렇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 문화? 종교적 힘?

비과학적 발상인진 모르겠지만, 종교적 힘이 아니면 사살 이게 불가능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 종교라는 것이 폐쇄적이거나 구복적인 것은 아니다.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겸허한 삶의 자세면 그것으로 좋다.

 

라다크의 힘은 사실 불교적 세계관이 깊이 깔려 있어서 그래도 그 아름다움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세상이기에 가장 모욕적인 말이 “화 잘 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불교의 중심 요소 중 하나인 순야타, 즉 공(空)의 철학, 그것은 인간 개인 누구도 독립적 존재일 수 없다는 의미와 통한다. 나는 없다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나도 주위의 다른 모든 것의 한 부분으로 녹아버릴 뿐이다. 그런 내가 뭘 한다고 내세울 것인가. 없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나은 없다. 여기에서 자비심은 나온다. 개별적 존재의 경계가 사라져버리면 너와 나는 절대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한 몸의 다른 면일 뿐이다. 그러니 이제 집착할 이유도 없다. 죽음 역시 삶과 연속의 과정이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셈이다.

여기에서부터 마음의 평화는 온다. 그것은 외부의 상황에 달린 것이 아니다. 내면의 평정과 만족감, 이것은 자신이 삶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응시하는 데서 온다. “당신이 먼 길을 막 떠나려 하는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 게 뭐 있는가? 아마도 더 좋은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게 뭐냐?’이다.” 공즉시색 색증시공이고, 인생지사 새옹지마겠다. 집착이 없으면 굳이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세계인 라다크를 헬레나 노르베르-호지는 보았다. 그런데 그의 라다크 묘사는 우리 제주도의 전통사회와도 많이 닮았음을 보게 된다. ‘파스푼’이라는 마을 조직(58쪽), 상이 났을 때 모든 것을 맡아하는 조직이다. 제주 마을의 상여계와 유사하다. 전통사회의 공동체에서는 모두 이런 게 있을 것이다. ‘라레스’라는 공동으로 하는 짐승 돌보기(59쪽)도 그렇다. 제주의 마을 공동목장이 그것과 유사하다. 자기 어머니만큼 나이든 여자는 누구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자신의 형제가 될 만한 나이의 사람들은 모두 ‘형제’라고 불리는 것(191쪽)도 제주의 ‘삼춘-조캐’와 많이 닮았다. 인사를 할 때도 ‘어디에 가십니까’라고 하는 것(22쪽)은 너무나 닮았다. “어디 감수광” 바로 이것 아닌가? 물론 이건 제주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가 삶의 방식을 파괴하지 않은 전통 공동체에는 아마도 보편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 감수광” 같은 건 타 지방에서 그리 쉽게 발견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인가 괜히 더 반갑다.

어쨌거나 지금의 라다크는 많이 망가졌다. 부탄 국왕이 말한 것처럼 한 사회의 복지는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라다크 뿐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에도 작은 실천들이 필요하다. 스웨덴 정부는 자연자원의 파괴를 국민총생산에서 빼는 환경예산체제를 확립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개발, 성장의 허구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작은 시도이기도 하다. 생태 마을, 재생 에너지, 유기농, 호스피스, 명상, 부엌을 가정의 중심으로, 자연치유법 등 오래된 유대관계로의 회귀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획일적 현대사회에선 이게 힘들다. 그러니 무엇도다 탈중심화가 필요하다. 획일화에 대한 반대, 개성, 자율성, 독창성의 존중, 다양성이 죽으면 생명은 없다. 두 딸을 키우면서 제발 우리 애들을 남들 다 하는 방식으로 몰아가는 몰상식한(아니 지극히 상식적인) 부모가 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 라다크 사람들도 고기를 먹는다. 특히 겨울에 그렇다. 하지만 이건 생존을 위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물고기는 먹지 않는다. “생명을 빼앗아야 한다면 많은 사람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커다란 동물의 목숨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먹는다면 훨씬 많은 생명을 빼앗아야 할 것이다. 짐승을 죽이는 일은 가볍게 여겨지지 않고 반드시 용서를 빌고 많은 기도를 올린 후에야 한다.”

그런 경외감, 이건 자본주의 주류문화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다. 탈중심화, 오래된 미래로의 귀향, ....... 그것이 진정한 진보이기에.

 

이곳의 우리에게 진보는 없어도

복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해도

더 깊은 법의 길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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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와 용서 상처와 용서 -미니북
송봉모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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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진인(無碍眞人)-자유인으로 산다는 것.

송봉모, <상처와 용서>, 바오로딸, 1998.



요즘은 책을 많이 안 읽는다. 별 일이다. 정말 많이 변했다. 작년 이후의 변화다. 그땐 중독이다 싶을 정도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하루에 한 권씩 읽어대던 때도 있었다. 담배를 놓았을 때 나타난다는 금단 현상처럼 책을 며칠 읽지 못했을 때 왠지 갑갑하고 안절부절 하던 경험도 있다.
근데, 이젠 책을 안 읽는다. 읽고 싶은 생각은 여전하나 속박되지는 않을 생각이다. 자유. 이것이 또한 자유다. 그때, 책에 미쳐 살 땐, 분명 강박이 있었다. 읽고, 또 읽은 것을 꼭 써 남겨야 한다는 강박. 이건 구속이다. 자유가 아니다. 근데도 왜 그런 미친 짓을 했을까. 왜 그랬을까.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도 그것은 내 ‘영혼의 느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에서 온 것임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 참된 나의 자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이라는 미명 아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헛된, 무상한 욕망에서 야기된 것임이라는 말이다.
이제 그런 욕망에서 많이 벗어나자 책 읽기도 그리고 그에 대한 글쓰기도 자유로워지는 기분이다. 더 이상 덧없는 그 명분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규정짓기에 나를 구속시킬 필요가 없다. 본질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그럴 때 진정 자유를 느낀다.
요즘 그 자유가 좋다. 관계성에서 많이 벗어난 삶이다. 물론 인드라망적인 관계는 끝이 없겠지만, 그 그물에 걸려 허우적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번 여름 방학 때에는 대전에 가서 은사 세미나에 참석했다. 호주 빅터 신부님이 지도하는 세미나였다. 느낌이 확 다르다. 서구의 신앙이 많이 식었다 하나 두텁기는 엄청 두텁다. 반면 한국의 그것은 뜨거우나 얇다. 큰 가르침,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흠뻑 느낀 좋은 시간이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정리할 기회를 만들고 싶다. 여기선 그 때 우연히 같은 방을 썼던 형제가 읽던 책 이야길 하려는 것이다. 송봉모 신부님의 책 <상처와 용서>. 가만 보니 내가 예전에 송신부님 책을 읽은 바가 있다. 바로 이 책의 씨리즈 물이다. 성서와 인간 씨리즈인데 내가 전에 읽은 것은 <9 회심하는 인간>이고 이번 것은 씨리즈 1편이다.

책은 간단하다. 포캣북이다. 그러면서 쪽수도 135쪽밖에 안 된다. 그래, 진리는 단순한 것이지. 몇몇 나와 코드가 안 맞는 사회학자들처럼 장황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짧아도 울림은 크다. 몇 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책이다.
전체적인 주제는 제목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는 그리고 받는 상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가, 그런 만큼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담고 있다. 뻔한 이야기 같지만, 여러 번이라도 읽고 싶어진다.

상처 이야기와 함께 중요한 것은 용서다. 내 경우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어려웠던 적이 있다. 베드로가 아니라 유다처럼 한심하게 나를 단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송신부님은 이렇게 말한다.
“자기 단죄는 파괴적이고, 병적이고, 비그리스교적이다. 자기 멸시와 자기 학대에 빠질 때 우리는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을 결코 체험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 단죄하고 용서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랬나. 이번 대전에서의 세미나에선 처음 프로그램에서부터 나는 이제까지 느껴보지 못한 하느님의 사랑을 강하게 느꼈다. 나 자신에 대한 용서가 이젠 이뤄졌기 때문인 모양이다.
유다와 다르게 “자신을 용서한 자들은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다시 일어섰다. 성서의 훌륭한 인물은 다 스스로를 용서한 자이다. 다윗, 베드로, 막달라 마리아, 바로오 등.”
이런 예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았다 하더라도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귀한 가르침을 주셨음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내가 밑줄을 많이 그으며 읽은 부분은 5장 ‘사소한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이다. 먼저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기대는 실망과 상처를 받겠다는 말과 같다고 한다. 기대는 안개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기대하면 안 된다. 기대가 아니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희망은 자녀의 재능과 꿈을 먼저 헤아려 주며 자녀의 생이 완성되고 선이 자라기만을 바란다. 그렇지 않고 자녀든, 친지든 친구이든 누군가에게 기대하며 산다는 것은 상처를 받겠다고 자처하는 꼴이라 한다.
평소 주변에 기대하고 사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이 그저 뜻 없이 한 사소한 행동에서도 쉽게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별것 아닌 것 갖고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무시하고 멀리한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섭섭함은 상대가 나를 어머니처럼 헤아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이런 상처들은 남이 아니라 내가 나를 용서해야 낫는다.
특히 친밀한 사이일수록 기대가 크고 기대가 큰 만큼 상처도 클 수밖에 없다. 그렇게 기대하고 상처받을 것이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표현을 하라고 한다. 표현 없이 기대하다가는 상처만 키운다.
둘째는 추측하지 말라고 한다.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추측하면 오해와 상처를 낳는다. 내가 상대방을 오해하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의 행동양식이나 인지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몰라서이다. 상대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만 추측하고 판단하고 상처받는다면 그 상처는 내가 자초한 것이다. 이건 전에 MBTI, 에니어그램 프로그램을 하면서 배웠다. 사람은 각각 다르다.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인정과 애정 없이는 못 산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환상 속에 산다. 존경받고, 인정받고, 귀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는 환상이다. 나는 이 증세가 심했던 사람이다. 물론 이번 대전 세미나에서 나의 명예욕의 뿌리가 어디인가도 보았다. 그걸 파악하니 치유도 쉬워진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명예욕은 본성 아니겠냐고 물을 것이다. 송신부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있다. 그러나 송신부님은 대답은 다르게 끌어간다. 본성적인 것인가를 가만히 물어보라고 한다. “그리고 정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라.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인가? 남들의 존경인가? 그리고 어떤 느낌이 오는가 점검해 보라. 만약 가슴을 따스하게 해주는 느낌이 온다면 그것은 영혼의 느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세상의 느낌이다. 곧 무상한 세상이 주는 느낌이다.”라고 한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원하는 것은 세상의 인정과 사랑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고 싶은 바람이다. 언제 주님께서 우리가 남들로부터 인정받아야만 살 수 있다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주고 싶어 하신 것은 자유이다. 죄에서 자유롭고, 죽음에서 자유롭고, 세상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불교 언어를 빌려 표현하다면 무애진인(無碍眞人)이 되어 살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인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유로운 마음, 자유로운 삶이지,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애정과 인정을 추구하는 행위 자체를 비난할 것은 아니다. 그가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하는가를 찾고 그것을 치유해주어야 한다. 애정결핍에서 생긴 상처일 가능성이 많다. 기도로 치유를 하여야 한다. 요즘 교회 안에 이런 치유를 위한 기회가 많음을 보았다.
어쨌거나 우리는 고독하되 외롭지 않은 관계를 잘 만들어가야 한다. 홀로 있되, 사람을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물론 평소에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고독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을 만나고 기도할 수 있다.
넷째는 자신 안에 있는 상처의 텃밭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나는 완벽해야 한다’, ‘나는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된다’, ‘내 사전에 2등은 있을 수 없다’ 등의 태도는 모두 상처를 낳는 텃밭이다. 어떤 사람이 완벽한 명강의를 해서 청중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항상 그 상처의 텃밭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한다. 내 경우에 해당된다. 물론 이젠 그렇게 살지 않는다. 송신부님은 여기서 예수님도 나자렛 회당에서 말 한 번 잘못해 매맞아 죽을 뻔한 적도 있다며 완벽한 강의, 강론에 대한 강박을 버리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저 주님께 맡기고 강의하면 그뿐이다.
그래서 “반대자들의 갖은 비방이나 공격보다도 옹호자들의 열광 때문에 진리가 더 큰 몸살을 앓는다”는 드 멜로 신부님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명성에 연연하며 진리를 왜곡시키는 경우를 경고한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 잘 나간다고 생각할 때 이처럼 헛된 길을 간 경우가 많았다. 명성에 연연했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비하는 영성생활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한다. 자기비하를 하면 하느님의 거룩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한다. 영성가들도 말하기를 악마가 가장 노리는 자는 1)두려워하는 자 2)분노와 악심을 품는 자 3)걱정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자 4)자기비하를 하는 자라고 한다. 그리고 악마는 이런 성향을 더욱 부추긴다고 한다. 그렇다면 뒤집어 살면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살 것,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구절이 365회 반복된다고 한다. 2)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갈 것 3) 걱정, 죄책감에서 벗어날 것-기쁘게 살아가야 하겠다. 4)자기 긍정적으로 살 것. 결국 항상 기뻐하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면 마귀가 접근을 못하겠다 싶다.
물론 자기애와 이기주의는 다르다. 자기애는 나누지만 이기주의는 받고 챙기기만 한다. 이런 자기 사람이야말로 영적 성장의 첫 번째 단계다. 대전에서 그런 비슷한 이야길 들었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영성생활의 기본이라는 말. 자기 긍정성이 있어야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기애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적 세계와 교감을 나누지, 결코 외부상황에 지배되지 않고, 왜곡된 죄의식이나 솔직하지 못한 합리화, 자기 변명에 빠지지 않는다. 이런 자기 신뢰가 있어야 다른 이들의 비판 앞에서도 인내하면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남의 기준에 맞춰 살면서 좋은 사람 소리 들으려 하지 말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여섯째, 그림자 투사를 하지 말라고 한다. 갈등은 우리 무의식 안에 있는 그림자가 투사되면서 생긴 것이라고 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사실은 그 사람 안에 나의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그 그림자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 내가 나로서 행동하지 못하고 우리 안의 그림자가 주체가 되어서 행동한다면 우린 예민해진다. 내 안의 그림자가 나를 통제해버리는 것이다. 이럴 경우 의식의 빛을 그 그림자에 비춰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더 하여 화, 갈등과 관련한 조언도 있다. 예수님께서도 화를 내셨다. 심하게 꾸짖기도 하셨고, 성전 앞의 환전상들의 물건을 뒤집어 엎어버리시기까지 했다. 이때 우리는 나의 부정적 감정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화가 난다고 해도 그 화가 바로 나 자신은 아니다. 이걸 떼어 놓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감정과 나 자신을 분리하지 못하면 휘말린다. 감정은 내가 아니다. 나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그 부분에 나를 전부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그럴 때는 여유가 필요하다. 떼어놓는 여유. 매 상황마다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반응하면 평화를 잃는다. 하지만 선택하면 다르다. 부정적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이는 경지가 되어야 한다.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필요한 훈련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유인을 다시 생각한다. 원효 같은 무애인. 그것은 남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 그 내면에서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 하느님 품 안에 고요히 머무는 것, 그것을 통해 만들어져 갈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착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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