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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개정증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태언 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녹색평론사, 1996.
이곳의 우리에게 진보는 없어도
복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해도
더 깊은 법의 길을 가지고 있다(19쪽)
가난하지만 더 행복한 사람들, 마음 속에 깊은 만족과 평안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
라다크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들었다. 책을 사 놓고도 읽지는 않았지만, 늘 자발적 가난과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가야 할 ‘오래된 미래’를 이 책이 잘 말해주고 있음은 알고 있었다. 중요한 책이기에, 깊은 명상을 통해 읽어야 할 책이기에 미루고 미뤘었다. 찬찬히 깊게 읽기 위해서였다. 그러다 보면 놓치게 되는 많은 가르침들.
하지만, 이런 류의 책을 읽을 때면 예의 그 날카로운 ‘사회과학적 분석’이 개입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결국 전 세계 자본주의의 획일적 지배가 관철될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고립 폐쇄된 공동체에서야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을지라도 결국 개방화 시대에 문이 열리고 나면 그 천진한 아름다움도 깨지고 말 것 아니냐는.
라다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1975년 인도가 라다크 지방을 관광을 위해 개방하면서부터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헐리웃 문화에 물들기 시작하고, 돈을 중심으로 사고가 변하고 있다고 한다. 이걸 과연 막을 수 있을까. 헬레나 노르베르-호지는 괜히 과거에 집착하며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오래된 미래는 결국 도달할 수 없거나 아니면 완전히 망가진 다음에야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뭐 이런 생각이 스쳐간 게 사실이다.
물론 문제는 다 알고 있다. 공감도 한다. 예를 들어 “왜냐하면 벌목이 돈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범죄가 증가하고 사람들이 전축이나 비디오를 잃어버려서 새로 사거나, 병자나 노인들을 값비싼 보호시설에 맡기거나, 정서나 스트레스에 관련된 문제 때문에 도움을 받거나 물이 너무 오염되어서 생수를 사먹으면 이 모든 것이 GNP를 높이는 데 이바지하고 경제성장으로 측정된다”라는 지적에서 보듯이 결국 경제 성장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우스운 짓이긴 하다. 이건 “일차원적 진보관”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일차원적 진보관을 과연 누가 쉽게 벗어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건 ‘반개발’이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중앙집중화된 자본이 이걸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과학적 눈으로 보면 정말 그렇다. 자립을 높일 수 잇는 마을 규모의 수력발전소나 태양열 오븐, 가정용 온수기 같은 소규모 프로젝트에 대해서 자본이 관심을 갖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는 깨달은 사람들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말이 쉽지. 사회과학적 견지에서 볼 때 이건 거의 불가능하다. 구조만으로 보면 그렇다.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 문화? 종교적 힘?
비과학적 발상인진 모르겠지만, 종교적 힘이 아니면 사살 이게 불가능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그 종교라는 것이 폐쇄적이거나 구복적인 것은 아니다.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고 겸허한 삶의 자세면 그것으로 좋다.
라다크의 힘은 사실 불교적 세계관이 깊이 깔려 있어서 그래도 그 아름다움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세상이기에 가장 모욕적인 말이 “화 잘 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불교의 중심 요소 중 하나인 순야타, 즉 공(空)의 철학, 그것은 인간 개인 누구도 독립적 존재일 수 없다는 의미와 통한다. 나는 없다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나도 주위의 다른 모든 것의 한 부분으로 녹아버릴 뿐이다. 그런 내가 뭘 한다고 내세울 것인가. 없다. 독립적 존재로서의 나은 없다. 여기에서 자비심은 나온다. 개별적 존재의 경계가 사라져버리면 너와 나는 절대적으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한 몸의 다른 면일 뿐이다. 그러니 이제 집착할 이유도 없다. 죽음 역시 삶과 연속의 과정이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인 셈이다.
여기에서부터 마음의 평화는 온다. 그것은 외부의 상황에 달린 것이 아니다. 내면의 평정과 만족감, 이것은 자신이 삶의 흐름의 일부임을 느끼고 이해하면서, 긴장을 풀고 그 흐름과 함께 응시하는 데서 온다. “당신이 먼 길을 막 떠나려 하는데 비가 쏟아진다고 해서 비참한 기분이 될 게 뭐 있는가? 아마도 더 좋은 것은 없겠지만 라다크 사람들의 태도는 그렇다고 해서 ‘불행할 게 뭐냐?’이다.” 공즉시색 색증시공이고, 인생지사 새옹지마겠다. 집착이 없으면 굳이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런 세계인 라다크를 헬레나 노르베르-호지는 보았다. 그런데 그의 라다크 묘사는 우리 제주도의 전통사회와도 많이 닮았음을 보게 된다. ‘파스푼’이라는 마을 조직(58쪽), 상이 났을 때 모든 것을 맡아하는 조직이다. 제주 마을의 상여계와 유사하다. 전통사회의 공동체에서는 모두 이런 게 있을 것이다. ‘라레스’라는 공동으로 하는 짐승 돌보기(59쪽)도 그렇다. 제주의 마을 공동목장이 그것과 유사하다. 자기 어머니만큼 나이든 여자는 누구나 ‘어머니’라고 불리고 자신의 형제가 될 만한 나이의 사람들은 모두 ‘형제’라고 불리는 것(191쪽)도 제주의 ‘삼춘-조캐’와 많이 닮았다. 인사를 할 때도 ‘어디에 가십니까’라고 하는 것(22쪽)은 너무나 닮았다. “어디 감수광” 바로 이것 아닌가? 물론 이건 제주의 이야기만은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가 삶의 방식을 파괴하지 않은 전통 공동체에는 아마도 보편적인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디 감수광” 같은 건 타 지방에서 그리 쉽게 발견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인가 괜히 더 반갑다.
어쨌거나 지금의 라다크는 많이 망가졌다. 부탄 국왕이 말한 것처럼 한 사회의 복지는 ‘국민총생산’이 아니라 ‘국민총행복’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라다크 뿐 아니라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에도 작은 실천들이 필요하다. 스웨덴 정부는 자연자원의 파괴를 국민총생산에서 빼는 환경예산체제를 확립하고 있다고 한다. 정부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개발, 성장의 허구성을 분명히 인정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작은 시도이기도 하다. 생태 마을, 재생 에너지, 유기농, 호스피스, 명상, 부엌을 가정의 중심으로, 자연치유법 등 오래된 유대관계로의 회귀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획일적 현대사회에선 이게 힘들다. 그러니 무엇도다 탈중심화가 필요하다. 획일화에 대한 반대, 개성, 자율성, 독창성의 존중, 다양성이 죽으면 생명은 없다. 두 딸을 키우면서 제발 우리 애들을 남들 다 하는 방식으로 몰아가는 몰상식한(아니 지극히 상식적인) 부모가 되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다.
생명에 대한 경외, 라다크 사람들도 고기를 먹는다. 특히 겨울에 그렇다. 하지만 이건 생존을 위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물고기는 먹지 않는다. “생명을 빼앗아야 한다면 많은 사람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커다란 동물의 목숨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를 먹는다면 훨씬 많은 생명을 빼앗아야 할 것이다. 짐승을 죽이는 일은 가볍게 여겨지지 않고 반드시 용서를 빌고 많은 기도를 올린 후에야 한다.”
그런 경외감, 이건 자본주의 주류문화로부터 벗어날 때 가능하다. 탈중심화, 오래된 미래로의 귀향, ....... 그것이 진정한 진보이기에.
이곳의 우리에게 진보는 없어도
복된 마음의 평화가 있다.
기술을 갖고 있지 못해도
더 깊은 법의 길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