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인간을 교육하는 방법을 길들이는 방식과 길러내는 방식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누고 있습니다. 길들이는 방식은 인간을 특정한 틀에 맞추도록 강요하는 것인데, 이런 방식은 인간을 병들게 만들고 위축되게 합니다. 이에 반해 길러내는 방식은 인간의 타고난 소질과 성향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특히 우리 청소년들을 특정 방향으로 길들이려고 합니다. 유치원 때부터 영어교육과 선행학습을 강요하면서 아이들을 공부하는 기계로 만들려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사회와 부모가 아이들을 이렇게 길들이는 과정에서 왜곡되거나 병적인 현상도 수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삶에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염증을 느끼거나, 자신에 대한 긍지와자부심을 갖지 못하고 부모님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존재라는 열패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니체는 ‘그대 자신이 되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격과 적성 그리고 환경 등을 잘 고려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주체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항상 남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을 쓰고 남이 무시하지 않을까 걱정하니까요.
우리가 이렇게 남의 평가에 민감한 것은 우리 안에 존재하는 노예근성 때문이라고 니체는 말합니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노예는 자기 자신을 주체적으로 평가하지 못했습니다. 노예를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주인뿐이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주인이 ‘잘했다‘고 칭찬하면 기뻐하고 ‘못했다‘고 지적하면 슬퍼합니다. 남의 시선과 평가에 연연할 때 우리는 자신을 노예의 지위로 하락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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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게는 죄 있는 인간과 죄 없는 인간의 구별이 아니라 병든 인간과 건강한 인간의 구별이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죽음에 임한 사람들에게 회개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의연하게 맞을 것, 자신의 정신력을 최고도로 고양시킬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기준에 의하면 삶에 대한 원한 때문에 자살을 택한 사람들은 삶을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병약한 인간들이었기 때문에 자살을 한 것입니다. 이들의 자살은 자유로운 자살이 아니라 자포자기에 의한 자살입니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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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곤경에 처해 있어도 그 사람이 그것을 너끈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서 기대 섞인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지요.
니체는 이 점에서 어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연민이 아니라 채찍질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불쌍한것 이라고 하기보다는 뭐 그 정도를 가지고 힘들어하나. 너는 스스로 일어설 수 있어‘라고 말하면서 채찍질하는 편이 그 사람을 월씬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곤경에 처한이에게 연민을 품기보다는 그 사람이 홀로 일어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채찍질해야 할 것입니다.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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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가 연민을 비판한 것은 그가 비정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연민은 인간을 성장시키기보다는 연약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것이고, 불쌍한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을 나약하고 무력한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연민을 받는 사람이 느끼고 있는 무력감을 강화시킵니다. 그리고 연민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은 당연히 누구나 좌절할 수밖에 없고 그래도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연민은 우리가 그 사람과 유사한 처지에 있으면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합니다. 이렇게 연민에 빠지면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좌절한 사람과 자신을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그러나 니체는 ‘인간은 거리의 파토스(pathos)에 의해서 발전한다‘라고 말합니다.
거리의 파토스란 기존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탁월한 인간이 됨으로써 기존의 자신이나 저열한 다른 인간들로부터의 거리를 넓히려는 열망입니다. 니체는 이러한 열망이야말로 바로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연민은 이렇게 우리를 보다 강해지고 보다 탁월한 인간이 되도록 채찍질하는 거리의 파토스를 제거합니다.
2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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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은 그것이 진리 이기 때문에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이념이 자신의 삶에 확고한 의미와 방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인간은 덧없이 생성 소멸하는 삶의 가운데에서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이념에 의지하여 그러한 불안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어떤 이념을 독단적으로 신봉하는 것은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에게 삶의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독단적인 이념을 철저하게 신봉하는사람은 진리 대신 삶의 위안을 택한 사람입니다.
그는 진리를 희생하여 삶의 위로와 살아갈 힘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떠한 확신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진리를 찾는 것은 자신에게서 삶의 위로와 살아갈 힘을 박탈할 것이기에 그는 진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로운 정신은 곧 독단적인 이념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위안을 값싼 위안으로 간주하여 거부하면서 세계와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정신이 될 경우에만 인간은 어떤 이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다양한 이념들을 자기발전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니체는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만이 자신의 주체적인 사고능력을 믿는, 진정으로 강한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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