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소리가 있는 언어와 소리가 없는 사유 또는 상상을, 문자가 백반처럼 한꺼번에 침전시키는 상황으로 상상해볼 수 있다. 문자가 생겨남으로써 인류의 사유와 표현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순간적으로 공기 속으로 흩어지지 않으면서 축적되기 시작하고, 점차 두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문자는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를 포함하는 언어 연계의 확장력을 크게 증가시켰고, 인간의 영감, 발견과 발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의 사유를 지속시켜주는 중요한 근원으로서의) 곤혹감을 더 이상 고독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지속적 이고 면밀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문자는 장시간 추상적인 사유를 할 수 있게 해주었고, 중간에 발길을 돌릴 수 있는 반성적 사유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수정되고 보완된 항로를 따라 회귀할 수 있데 해주었다. 이에 따라 사유는 수정되거나 보완됐고, 앞을 향해 대담하게 더 멀리, 더 깊이 나아가면서도 길을 잃어 돌아오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계속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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