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삶에 대한 판단, 즉 삶에 대한 가치판단은 그것이 삶을 긍정하는 것이든 부정하는 것이든 궁극적으로는 결코 참일 수 없다. 그것들은 단지 증후로서만 가치를 지닐 뿐이며 증후로서만 고려될 수 있다. 그러한 판단들은 그 자체로는 우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들 삶의 가치는 평가될 수 없다는 이 놀랍고 미묘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살아 있는 인간에 의해서는 삶에 대한 가치판단이 불가능하다. 살아있는 인간은 바로 논의의 당사자이자 심지어 논의의 대상이지 논의의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경우에는 또 다른 이유로 그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철학자가 삶의 가치에 대한 문제를 하나의 철학적인 문제로서 논의하려고 할 경우 그는 철학자라고 할 수 없게 되며, 그것은 그의 지혜에 대한 의문부호가 되고 무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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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철학자들이란 사상적으로는 커다란 궁궐을 지어놓으면서도 실제 인간으로서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조그만 집에서 살고 있는 자다. -키에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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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말은 곧 인생을 유희처럼 사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어떤 재미있는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왜 이 놀이를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 놀이가 재미있어서 놀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왜 이 놀이를 해야 하지?‘라며 놀이의 의미를 묻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놀이의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를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를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습니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지요. 우리가 삶의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삶을 무거운 짐으로 느끼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라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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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고난과 고통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고난이 일어나지 않고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으며 이와 함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야스퍼스 KartJaspers 같은 철학자는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벗어날 수 없는 한계상황 중의 하나가 고난과 고통이라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한 인간‘은 고난과 고통이 없기를 바라지 않고, 그런 것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평정과 충일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행복의 반대는 비애나 고통이 아니라 내적으로 빈곤해지고 생명력이 쇠퇴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 우울증입니다. 이러한 우울증의 상태는 비애나 고통의 지배를 받을 뿐 아니라 매사에서 그런 감정을 느끼는 허약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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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해 ‘힘에의 의지‘가 쇠약해지고 지쳐 병들어 있을 때면 인간은 편안함과 만족을 찾게 되고 자신과 투쟁하지 않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을 택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현실에서 여러 곤경을 겪게 될 때 이 세계는 그들의 안락함을 방해하는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따라서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세상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의지와 생명력이 약해진 것은 아닌지를 돌아봐야 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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