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여기에서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은 먼저 이 세계에 존재하고 이 세계에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가 정의되는 것은 그 다음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존주의자가 상상하는 인간이란 정의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중에야 비로소 무엇이 되며, 스스로 만들어내는 그 무엇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실존주의의 첫걸음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존재의 임자가 되게 하고, 그에게 그의 존재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엄격한 개성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은 오히려 모든 타인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117쪽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본문 인용





사르트르는 실제로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실존한다˝라는 것의 의미는 정확히
˝인간존재는 그 자신을 미래를 향해 기투하고, 또한 이 행위를 스스로 의식한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말할 때 사르트르가 의도한 바는, ˝인간존재는 우선 미래적 존재고, 또한 인간존재는 결코 과거에 그가 했던 것이나 그가 존재했던 바에 의해 정의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확히 ˝본질은 과거에 그것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던 헤겔이 의도했던 바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말하면서 결국 사르트르는 ˝현존재의 본질은 실존이다˝라는 하이데거의 주장을 다시 쓰고 있다. -123쪽



사르트르의 <구토>만큼이나 이 책<How to read 사르트르>도 쉽지 않다.
사르트르가 말년에 자신의 저작을 해석하며 자신의 철학을 다지는 데 힘을 기울인 게 아니라 죽을때까지 다작하며 새로운 글을 쓰려고 했는 만큼 그의 철학은 변화무쌍하다. 그 변화만큼이나 해석 또한 다양하다.
때론 실수투성이인 작품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고, 때론 정치적 입장을 강하게 띤 작품으로 마르크스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지나친 경사로 우리 사회에서 환영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참여문학론은 우리 사회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었고, ‘문학은 혁명적이다‘라는 기치를 높이 내걸고 문학의 정치성과 사회성을 강조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수문학론‘으로 부분 소생한다.
사르트르의 철학과 문학에 전통적으로 부여되었던 의미가 과연 현재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에서 지금도 유효한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때 이 책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가 왜 중요한지 알 것이다.
그가 강조한 타자와 신체, 욕망의 사회성, 증여 등에 관련된 논의 자체는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푸코, 라캉 등의 사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사유는 현재 진행형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책은 사르트르의 저작에서 핵심되는 주제나 용어를 다룬다. 작품은 아래와 같다.

1. 나 역시 잉여존재다 <구토>
2. 외부에, 세계 속에, 타인들 틈에 <지향성>
3.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 <닫힌 방>
4. 그는 카페의 종업원을 연기한다 <존재와 무>
5. 전쟁에서 무고한 희생자는 없다
6. 나는 타인들의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없다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7. 진정한 유대인은 자신을 유대인으로 만든다.
<유대인 문제에 관한 성찰>
8. 가장 혜택을 못 받은 자들의 시선
<공산주의자들과 평화>
9. 봉쇄된 미래 <방법의 문제>
10. 이간은 폭력적이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


읽은 책
<말>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계약결혼>



읽고 있는 책
<구토>
<How to read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닫힌 방, 악마와 선한 신>
<장폴사르트르, 시선과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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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4-25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마르크스에 대한 경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현실을 제대로 잘 표현한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

북프리쿠키 2019-04-25 22:36   좋아요 0 | URL
1980년대 중반 이후 다른 프랑스 20세기 철학자들의 수용과 비교해 볼 때 국내에서 그 열기가 줄어들었다는 이유에서 지나친 경사가 아닐까요..^^;
그의 마르크스주의는 가장 혜택을 못 받은 자들의 시선으로 제3세계에 탈식민의 이론화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북다이제스터님의 의견에도 공감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4-26 0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르트르....아쿠 머리야!!! 👍

북프리쿠키 2019-04-26 11:06   좋아요 1 | URL
ㅋㅋㅋ 머리를 비우고 몽롱하게 읽었습니다.
이건 글자고, 이건 여백이고...^^;
 

 

이 책에서 철학자 로캉탱이 첫 구토를 느낀 사건은 조약돌을 손에 쥐는 순간이다.

 

" 지난날 내가 바닷가에서 그 조약돌을 손에 들고 있었을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이 이제 잘 생각이 난다.

그것은 시큼한, 일종의 구토증이었다. 그 얼마나 불쾌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그 조약돌 탓이었다.

확실하다. 그것은 조약돌에서 손아귀로 옮겨졌다. 그렇다. 그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손아귀에 담긴 일종의 구토증." -28쪽

 

 

 

그는 바닷가의 조약돌을 주웠을 때 처음으로 구역질을 느꼈고, 파이프나 포크를 잡는 손에서 다시금 그 구역질을 느낀다. 이 구역질은 사물과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서부터 조건이 마련되고, 다음에는 그러한 사물이나 타자 속에 있어서의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 생기는 생리 작용이다. 즉, '무상성'을 느꼈을 때의 당혹함을 보여주는 것이 구역질인 것이다.

 

 

 

 

"나의 생각, 그것은 '나'다. 그래서 나는 멈출 수가 없다.

나는 생각하는 고로 존재한다......그리고 나는 생각하기를 단념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그것은 무서운 일이다-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존재하기를 내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갈망하고 있는 저 무(無)로부터 나 자신을 끄집어 내는 것이 바로 나, '나'다.

존재하는 데 대한 증오, 싫증,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방법이며, 존재 속에 나를 밀어넣는 방법인 것이다.

생각은 현기증처럼 내 뒤에서 생겨나고, 나는 그것이 내 머리 뒤에서 생기는 것을 느낀다.

만약 내가 양보하면 그것은 앞으로, 내 두 눈 사이로 오려고 한다.

다만 나는 언제나 양보한다. 생각이 커지고 커진다. 그리하여 거기 나를 충만케 하고 나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무한한 것이 있다." - 187쪽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영감을 받아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를 집필한다.

존재,시간,무....제목에서 우리의 존재는 시간과 어떤 연관을 맺고, 존재는 무(無)라는 영원에서 어떤 동인을 이끌어내는가.

사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주저는 난해해서 접근하기 어렵다고 한다.

철학은 곧 시(詩)이기도 하거니와 우리가 어떤 개념이나 생각을 언어로 규정짓기에는 무(無)만큼이나 상대하기 어려운 관념들이 안개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이다.

이 책, 구토도 그러하다.

 

인간 존재는 무한한 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것과 다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르트르가 이전에 인간을 가리켜 '내던져진 존재'라고 표현한 이유가 설명된다. 그래서 로캉탱은 이 존재성에서 오는 공포로 말미암아

"나는 무의 세계를 그리워한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러한 무의 세계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려고 한다. 존재에 대한 증오나 염증도  결국은 나를 존재케 하고 나를 존재 속으로 몰려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라고 일기에 쓰는 것이다.

 

하루키가 소설을 쓸 때 지하2층으로 내려가는 그 느낌? 그것이 무의 세계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는 것일까? 그때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실존의 우발성에 구토를 느낄 때 나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던 것들인 객관적 지위, 경험, 책에서 읽었던 지식, 과학적 묘사 등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을지 모른다. 그러면 내 존재는 무엇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이 결국에는 서로 만나고 중첩되는 난해한 일기지만

주인공 로캉탱이 어떤 결말을 줄 것인가 궁금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 포기하면 다시는 이 책을 들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 삶에서도 '구토'의 생경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실존주의', '실존주의 문학'에 대해서 함부로 설명하려 든 내 젋은 날의 과오가 부끄럽다. 

 

 

 

 

 

 

 

 

 

 

우리는 여기에 있고 우리라는 귀중한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먹거나 마시고 있지만, 존재하는 데는 어떠한 이유도 전혀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209쪽

이 기록은 앙투안 로캉탱의 서류 속에서 발견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아무런 수정도 하지 않고 발표한다. - P9

휴머니즘은 그 반대되는 것들을 먹고 산다.-221쪽

나는 그토록 나 자신을 팽개치고, 잊고,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숨이 찬다.
존재는 눈, 코, 입...... 도처에서 나의 내부로 침입해오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대번에 베일이 찢어진다. 나는 알았고, 나는 ‘보았다‘. -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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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4-21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프리쿠키님,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한 주일을 지나는 사이에, 벚꽃은 많이 떨어지고, 목련은 거의 갈색이 되어갑니다.
벌써 봄이 많이 찾아온 느낌입니다. 낮에는 더운 느낌의 봄날이 되었어요.
다음주도 기분 좋은 한 주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

북프리쿠키 2019-04-22 10:29   좋아요 1 | URL
다행입니다. 몸이 가장 우선이지예.
이번 주 봄장마같은 비가 지나가면 여름이 시작될 것 같습니다.
봄도, 가을도 짧아지고 긴 여름과 긴 겨울이 될 것 같네요.
이번주도 힘내시고 화이팅 하십시요..^^:
 

구입책(5권)

책장에 여유가 있으니 지름신도 자주 오네요.
얇은 다와다 요코의 작품부터 읽어야겠습니다.
이웃님들도 좋은 책과 함께하는 주말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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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의 첫 장편으로 사상의 출발점이 되는 작품.

무의미한 대화들만 주고 받는 인간들의 비진정성을 드러내 보이며, 실존을 자각한 순간 구토를 시작한 소설속 주인공이자 자신의 분신 로캉탱의 이야기로 시작해봅니다.

흥미롭게 읽은 1964년 작품 <말>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수상을 거부한 이유의 실마리를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실존‘ ‘실존주의‘ 라는 용어에 대해서 용기있고 쉽게 말해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언젠가 수확할 열매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첫 책장을 펼칩니다.

 

 

 

 

 

"이 작품은 자유와 의무, 의식, 그리고 시간을 섬세한 절제로 탐구하고 있다. 에드문트 후설의 철학과 도스토옙스키와 카프카의 문체의 영향을 받은 『구토』는 20세기 사상과 문화의 가장 중대한 성장이 된 실존주의를 세상에 선언한 소설이다.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에서 그의 사상을 구체화하기 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율이 증가하기 전, “존재가 본질에 우선한다”는 개념이 최초로 넓은 의미에서 사용된 작품이기도 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구토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 2007. 1. 15., 피터 박스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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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장정일


미국은 세계 모든 국가가 자신을 두렵게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스스로 ˝변덕스럽고 보복을 잊지˝ 않으며 ˝지나치게 합리성을 따지는 국가로 인식˝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아 왔다는 촘스키의 분석은, 미국의 세계 외교를 이해하는 작은 단서가 되어 주며 교착상태의 북미 회담의 배경을 또 다른 시각으로 보게 만든다.

미국의 모든 정책 자료들은 국가 이익을 위협받을 때마다 미국은 ˝비합리적이고 반드시 보복하는 국가˝ 즉 ‘미친개‘라는 이미지를 세계에 심어주라고 권고하고 있다.

촘스키의 또 다른 책 <불량국가(두레,2001)>에는 ‘미친개‘가 되고 싶은 미국의 술수와 발광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다.

- 장정일의 <공부> 313쪽



이 책은 2006년에 나온 책이다.
촘스키가 지적하고 있듯이 미국의 미친개 작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관된 폭력도 무섭지만 언제 폭력을 쓸지 모르는 변덕스러움도 그 자체로 공포다.
게다가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숱한 개발국가나 주변부 국가의 정부는, 용역 깡패가 되어 미국 다국적 기업가들의 활동을 지켜주는 합법적인 무장력을 제공한다.

그 칼끝이 겨누는 곳이 미국이 아니라 세계전체라서 미국인들은 ‘변덕스러운‘ 대통령을 뽑았는가?
소위 민주주의라 불리는 미국의 통치 계급은 무력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국민의 자발적인 동의를 구하거나 온갖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소외시키기 위해 선전이라는 방법을 동원한다.
다국적 기업과 국가가 야합하고 있는 오늘과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을 통해 체제 선전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체제에 의해 저명한 지식인 혹은 책임있는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데 있다˝ -315쪽








그 ˝민중˝안에 ‘난 들지 않겠지‘ 라고 착각하는 대다수의 민중도 이미 프로그램안에 설정된 변수일 것이다. 그 정도는 다 예견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판적인 지식인에게 꼭 맞는 프로그램은 지금도 패치가 되고 버전업이 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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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4-16 07: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표지랑 <인생>표지가 진짜 닮았네요 순간 착각 ㅋㅋ

북프리쿠키 2019-04-16 09:51   좋아요 1 | URL
맞죠 책상에 인생도 올려뒀는데 벌~겋네요ㅎㅎ

카알벨루치 2019-04-16 10:13   좋아요 1 | URL
전 <인생>에 촘스키가 나오는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북프리쿠키 2019-04-16 10:43   좋아요 1 | URL
촘스키가 32살 형이네요
촘스키 92세, 위화 60세 ㅎㅎ 정일이형은 58세네요.

2019-04-16 12: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0 12: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