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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평점 :
>>>>> 옮긴이의 말 중에서
p.181
한트케가 주제나 소재 면에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는 많은 작품들과 여러 인터뷰를 통해, 적어도 문학 활동과 관련해서는 자신 이외의 여타의 것에 대해 관심이 없음을 밝히고 있다.
(...)
그 중에서도 특히 [소망없는 불행(1972)]과 [아이이야기(1981)]가 그런 주제 의식에 부합하는 가장 전형적인 작품이며 그의 작가로서의 발전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p.182
[소망없는 불행]은 1971년 수면제를 다량으로 복용하고 자살한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후 씌어진 산문으로 어머니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한 인간이 자아에 눈떠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
[아이 이야기]는 우리 나라에 처음 소개되는 것으로 한트케가 연극 배우였던 첫째 부인과 결별한 후, 딸 아미나를 맡아 기른 경험을 토대로 하여 씌어졌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러 의미에서 '폐허'로 가득 찬 자신의 어린 시절로 인해 가정생활이라든가 가족 관계 등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자신이 딸을 키우며 그것들의 소중함을 인식해 가고 결국은 한 인간 속의 소우주까지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 이 작품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 본문 발췌(소망없는 불행)
p.9 첫문장
케른텐에서 발행하는 신문 <폭스차이퉁> 일요일 자 부고란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토요일 밤 A면(G읍)의 51세 가정주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자살"
p.11
경악의 순간들은 언제나 아주 잠깐이고, 그 잠깐이란 시간은 경악의 순간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현실의 감정들이 치미는 순간이며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다시 모른체해버릴 순간들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누군가와 함께 있게 되면, 마치 지금 막 그에게 불손하게 굴기나 한 것처럼 이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려고 한다.
p.17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가능성이란 없었다.
사소한 불장난, 몇번의 킬킬대는 웃음, 잠깐의 당혹감, 그러고 나서 처음 짓게 되는 낯설고 침착한 표정. 다시금 찌들린 집안 살림이 시작되고 첫아이가 태어난다. 부엌에서 바쁘게 일한 후 잠깐 사람들 틈에 끼지만 여자들의 말은 처음부터 누구나 건성으로 들을 뿐이고, 그러다 보니 여자들 자신도 점점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게 되고 혼자말이나 중얼거리게 된다.
나중에 두 다리로 서는 게 불편해지고, 혈관 경련이 오고, 잠자면서 중얼대기 시작하고, 자궁암에 걸리고, 드디어 죽게 되면 예정된 섭리는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마을의 여자 아이들이 많이들 하고 노는 말잇기 놀이도 <피곤하고/기진하고/병들고/죽어가고/죽고>라는 식으로 여자의 삶을 나타냈다.
p.57
그녀는 나와 함께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팔라다, 크누트함순, 도스토예프스키, 막심 고리키를 읽었고 그 다음엔 토마스 울프와 윌리엄 포크너를 읽었다.(...) 독서를 함으로써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을 감싼 껍데기로부터 벗어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웠다.
p. 87 마지막 문장
나중에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훨씬 더 자세히 쓰게 될 것이다.
>>>>>> 본문 발췌(아이 이야기)
p.109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아내와 나누었던 가장 다정하고, 가장 친밀하고, 가장 은밀한 동작과 말없이 가만히 이름을 부르곤 하던 행위를 깊은 생각이나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로 옮겨 했고 나중에는 그만큼 아내의 존재를 비하해 버렸다. 마치 아이야말로 자기에게 합당한 존재이고 이제 아내 따윈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
그럼에도 그는 아내 없이 돌볼 것 투성이인 아이와 단둘이 사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p.113
그들에게 낯선 아이는 평화를 깨뜨릴 뿐 아니라 그들의 세계관에도 어긋났다.
남자는, 지겨워하면서 싫증내거나 평온을 침해 당해 흥미없어 하는 많은 시선들이 자기 아이에게 쏟아지는 것을 이미 보았다.
어쩌면 그 자신도 그런 시선을 보낸 사람이었는지 모른다.
p.115
아이들은 모든 인간에게 영혼이다.
이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는, 비록 별로 고통을 당하지 않더라도, 그 편안함은 온당치 못한 행복이다.
p.117
다시 불화, 그는 그녀가 옳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녀의 행위를 비난했다.
어떻게 한 인간이 자기의 천부적인 취미를 살리겠다고 자기 아이를 떠날 수 있었을까?
<아이>에 대한 의무는 이러쿵저러쿵 질문 따위가 있어서는 안 되는 자연스러운 것, 분명한 것이 아니었던가, 자명한 것을 부인하고 구속력 있는 현실을 부인함으로써 얻게 된 업적은 그것이 아무리 놀라운 것일지라도 처음부터 불명예스럽고 무가치한 것이 아니었던가?
p.118
아내가 집을 나간 바로 그날 정오, 아이가 잠든 동안 남자는 미친 듯이 자기 일에 매달렸다.
글 쓰는 행위야말로 세상사를 적대시하며 승리감에 싸여 계속 일하게 된 동기였다.
p.119
방해받지 않고 자기 속에 침잠해 있으면서 늘 하는 식으로 그냥 아이와 함께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p.120
당시 일거리도 없었던 그의 일상은 오직 아이가 내는 소리와 아이의 물건들로만 이루어지고, 아이의 생활 리듬에 따라 흐르는 일상을 잔인하고도 무의미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더 강도 높게 체험했다.
p.128
아이가 구현하는 인간 존재는 남자에게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진리의 척도를 제시해 주었다.
p.143
그때 그는 날마다 벌어지는 일에 영감을 주었던 것이 바로 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가 없다는 그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이다.
p.159
더군다나 많은 교사들이 평생토록 아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 죄악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 교사들은 아이와 말을 했지만, 소리가 없었고, 아이를 관찰했지만 시선이 없었다. 모든 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평정과 참을성은 학생들이 느끼기에는 그저 무관심일 뿐이었다.
p.171
아이들의 두 눈은 -그 눈을 보아라!- 영원한 정신을 전해 주었다. 만일 그런 시선을 못 본다면 그대는 정말 안됐다!
p.179 마지막 문장
이미 씌어진 이야기뿐만 아니라 한 아이의 모든 이야기에 언제나 부합될 어떤 시인의 문장을 깊이 생각한다.
바로 <칸틸레네-사랑과 모든 열정적인 행복이 충만하길>라는 문장을.
>>>>>> 감상
작년인가 한트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관객모독(1966)>을 읽었다.
등장인물도 대사도 지문도 없는 그냥 산문으로 이루어진 희곡작품이었다.
아방가르드나 전위, 실험적 기법, 모더니즘 등등 무서운(?) 용어들로 작품을 추켜 세우면 읽을 맛이 나지 않는다. 아니 읽는 것이 겁난다.
그러니 한트케 책을 몇권 소장하고 있었지만 읽을 순위안에서 멀어질 밖에.
특히, 노벨문학상 수상을 못했더라면 관객모독을 읽고 받은 '모독'때문에 아마 영영 읽지 못했을 수도..
며칠전 <페널티킥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1970>을 호기롭게 집어 들어 다 읽어버렸지만..아..이 책은 스토리도 있는데...왜..왜..여전히ㅠ.ㅠ
이왕 배린 몸..이라는 오기로 연달아 <소망없는 불행(1972)> 첫 문장을 읽어버렸다.
다행히 엄마의 자살 이후 인생을 되돌아보며 쓴 자서전 격인 글이었다. 그래도 한트케 형님이 1970년대 이후로 서사로 턴했다고 소문이 났던데..군데 군데 문장에서 다시 날 안드로메다로 보냈다.
엄마의 자살은 1971년, 그리고 첫번째 부인과 이혼한 것도 1971년.. 한트케 형님 최고의 힘든 시절이었지 아닐까?
이혼 후 갓난아이 딸 '아미나' 를 키우면서 겪는 어려움과 행복을 <아이 이야기(1981)>에 담았다.
개인적으로 2가지 이야기 중에 <아이 이야기(1981)>에 많은 공감을 받았다. 특히 글을 쓰는 사람이 동시에 아이키우는 일에도 매달리는 것 자체가 어느쪽 하나도 온전히 해낼 수 없다는 사실이.(내 경험으로 보아 집중해서 책 읽을 때 아이가 옆에서 놀아달라고 하면..무조건 두 개중에 한개는 완전히 포기해야 된다..늘 반성하는 부분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여자들이 독립된 방을 갖지 못하고, 온갖 잡다한 집안일에 몰두하며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또 같은 이유로 제인오스틴은 이 테마에 대해 당시의 사회제도 속에서 얼마나 고민하며 글을 써 왔는가..
이러한 명제가 바로 홀로 딸아이를 키우는 한트케가 직면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글을 읽으며 떠오른 또 한 사람의 작가가 있다.
바로 천재의 광포한 이기주의에 빠져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 루소..아~그렇게 비난받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를 처절히 옹호했건만..2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욕을 먹고 있다.
그의 변명을 들어보자.
"자식들을 고아원에 넣었다는 데 대한 비난이 약간의 말재간으로 쉽게, 아이들을 싫어하는 몹쓸 아버지라는 비난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까닭은 바로, 다른 방도를 취했을 경우 훨씬 더 나쁘고 피하지도 못할 내 자식들의 운명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자식들의 장래에 보다 무관심했더라면, 직접 캐울 수 없는 내 처지로서는 아이들 버릇을 망쳐놓을 아이들 엄마와 괴물로 만들어놓을 외가 친척들이 기르도록 맡겨야 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오싹해진다.(...)
아이들에게 가장 덜 위험한 교육이 고아원 교육임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들을 보냈던 것이다."
- 문학동네: 장자크루소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아홉번째 산책 146쪽
아무리 루소가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고 있던 바로 그 시기가 정열을 바쳐 자신의 일을 할 나이였지만,
루소 자신이 <에밀>에서 주장하고 또 이행을 회피하는 자에 대해 강력이 비난하고 있는 바로 그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게을리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과오에 대한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속죄'라는 말을 사용하며 과거의 그 행위를 참회하고 있다.
<에밀>에서 아버지로서의 중요함을 밝힌 대목을 보자
"참된 유모는 어머니이듯이 참된 가정교사는 아버지이다. 교육 방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역할의 순서에서도 부모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라. 어머니의 손에서 이어 아버지의 손으로 옮겨가게 하라.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선생보다는 평범하지만 분별이 있는 아버지에 의해 아이는 더 훌륭하게 교육될 것이다." - 한길그레이트 출판사 : 장자크루소 <에밀> 82쪽
한트케는 프랑스 최고의 천재라 일컫는 루소가 실천하지 못했던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물론 한트케와 루소를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은 무리한 구석이 있다.
또한, 누가 더 잘 했고, 잘못했고 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위대한 일을 해낸다는 것은 반드시 예술이나 문학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일상'의 겸허한 의무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트케의 작품은 워낙 많아서 일일이 열거하기 어렵지만,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된 2가지 사건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 말하는 문학동네판 <긴 이별에 대한 짧은 편지(1972)>도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