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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1
치누아 아체베 지음, 조규형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앨버트 치누아루모구 아체베(Albert Chinualumogu Achebe) : 1930~2013(84세)
나이지리아에서 출생, 목사인 아버지가 영국 빅토리아 여왕 남편의 이름을 따 아들의 세례명을 앨버트라 함.
[치누아아체베의 5부작] 의 배경
1.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1958) : 영국이 나이지리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침입해 오기 시작한 19세기 말
2. 신의 화살(1964) : 영국의 지배체제가 완전히 정착되고 기독교가 전통 종교를 무너뜨리는 1920년대
3. 평안과의 이별(1960) : 독립으로 나아가는 정권 이양기 동안 도덕적 해이에 직면하는 1950년대
4. 민중의 사람(1966) : 소망하던 독립을 이루고 민족국가를 세웠지만 이후 무질서와 정치적 부패가 만연한 1960년대 말
5. 사바나의 중심가(1987) : 혼돈과 좌절 그리고 정치적 불안정과 새롭게 다가오는 외세 속의 1980년대
>>>> 발췌(작품 해설)
p.251
영국이 노예무역에 머물던 단계를 지나, 직접 아프리카 내부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19세기 중반부터다. 영국에게 아프리카는 정복할 가치와 용이성이 있는 마지막 대륙이었고, 1841년부터 시작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의 선교 활동과 탐험은 결과적으로 그 선발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p.252
1960년 나이지리아가 공식적 독립을 이룰 때까지 외세의 무력은 오랜 세월 지속해 온 토착 전통 체제를 산산이 부숴 버렸다.
(...)
이 소설이 발표된 1958년의 나이지리아는 이제 독립이 약속되고 정권 이양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
그는 자신들의 공동체와 전통이 서구에 의해 폭력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되돌아보고, 풍요로웠던 전통문화를 기억하면서 이에 내재된 정신을 새로운 국가 건설의 도덕적이자 문화적인 토대로 재설정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p.253~254
역사에서 보이듯 주인공 오콩코와 그의 우무오피아가 맞은 파국에는 서구 제국주의와 문화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아체베는 이 작품을 통해 주인공 개인의 책임과 그 개인을 둘러싼 사회와 문화가 져야 할 책임 또한 거론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개인 비극의 원인은 가장 크게는 정치사회적 변화, 특히 서구 제국주의에 있지만, 작가는 자신의 사회 문화가 갖는 한계와 약점을 지적하는 것 또한 바뜨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의 상황에 대해 스스로의 책임이 상대적으로 큰 것은 아니지만, 이를 간과하지 않고 냉철한 눈길로 점검하는 것은 상당한 의의를 갖는다.
p. 257
사실 아체베 이전의 나이지리아, 나아가 아프리카는 스스로를 알리기보다는 항상 알려지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더 많은 경우는 서양이 말하고자 하는 바의 단순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아프리카를 가장 진지한 배경으로 사용한 영문학 작품으로는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과 케리의 <미스터 존슨> 등이 있다.
(...)
아체베가 이후에 분명히 밝힌 바와 같이 그는 콘래드가 어떻든 아프리카에 대해 우호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일반적 평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p. 259
아체베는 작품의 제목들을 서구 문학 작품에서 빌려 오는 것에 서슴지 않는다. 이 작품의 제목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는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W.B.Yeats)의 시 <재림>에서 따왔다.(....) 아체베는 문학적 접촉과 교류에 있어 관용의 폭을 넓힐 것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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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을 보자.
-> 그(치안판사)는 많은 생각 끝에 이미 책의 제목을 정해 놓았다. "니제르 강 하류 원시 종족의 평정"
우무오피아란 마을에 영국의 선교사가 들어옴으로써 벌어지는 아프리카의 비극을 주인공 오콩코의 눈으로 그려내다가
마지막에 지배자인 영국이 모든 스토리를 한줄로 못 박아 버렸다.
마치 조정래 선생이 <아리랑>에서 일제치하 농토를 빼앗겨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농민들이 직접 그 고통을 생생하게 그려냈는 상황을,
역사책에는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 한줄로 명명한 그 느낌처럼.
빼앗긴 자는 늘 빼앗은 자의 배경으로 남는다.
문학이나 예술이나 혹은 인간관계 모두에서 말이다.
그리고 빼앗긴 자의 분노는 그들의 체념만큼이나 적.막.하.다.
그리고 반드시 그 체념에는 부지불식간에 빼앗은 자의 폭력을 회피 또는 순응하게 됨으로써 정당화의 구실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실례로 4천년간 나라없이 떠돌던 쿠르드를 보면 알 것이고,
멀쩡한 자기네땅을 빼앗겨 핍박받는 팔레스타인을 보면 분명하다.
쿠르드는 터키와 이라크, 시리아와 이란에게는 그저 떠돌이 산악부족이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게 걸리적거리는 쓰레기일 뿐이다.
우린 그들의 이야기를 미국의 뉴스에서 듣고, 유력지 헤드라인에서 요약한다.
바로 우리가 한때 쿠르드였고 팔레스타인인 것을 모른체 말이다.
우리의 전통과 혼이 일제 치하에서 얼마나 산산이 부서졌는가를 알면,
아프리카 문학을 대할 때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되는가도 생각해 볼일이다.
그리고, 특정 민족에 속해 있는 한 작가가 객관적인 또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집필하려는 그 노력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지를 안다면
서구 제국주의가 아프리카의 파국적 상황에 대해 갖는 책임과 동시에 나이지리아 전통문화의 한계를 동시에 이야기하고자 한
치누아 아체베가 과연 '중용'의 칼날위에 서 있는지 그 균형감에 대해서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다.
막연히 선과 악으로만 읽어왔던 아프리카 문학,
아름다운 자연으로만 보다가 질척한 밀림 속에 발을 내디딘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