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라는 분류에 속할만한 책은 오랜만이었다. 한동안 다른 분류의 책들을 읽어보자 싶어서 이것저것 읽어보았더니, 단편이어도 문학이라는
세계가 낯설었다.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인 '한정희와 나'는 수상작인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로 시작한다. 뒤를 잇는 쟁쟁한 작가들의
후보작들까지 전체적인 분위기는 사회문제/현실들을 꼽고 있다. 작가들이 시대와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작품안에 담아냈다는 점은 좋지만, 그것들이
다소 적나라한 분위기를 띄고 있어 어떤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는지 지목하는 글인듯해 아쉬웠다. 좀 더 견고한 세계의 구성이 아쉬웠는데, 아무래도
장편이 아쉬운 시점이었던가 보다.
수상작 '한정희와 나'를 읽고 한동안 얼떨떨했다. '무엇이 어떻단 말이야'라는 의문이 남았다. "너 정말 나쁜 아이구나. 어린 게 염치도
없이......(p37)" 이란 말의 그늘 아래서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과 해서는 안 되는 말들(p37)"이 무엇이었을지 감을 잡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정말 나쁜 아이 같이 순화된 표현으로 시작되는 물렁한 말에서 어떤 독설이 이어졌을지 잘 가늠되지도 않고, 그런 말이 나왔다
한들 그 정도는 이미 정희도 분위기로 읽었을 수준의 속내에 지나지 않았으리라 생각됐다. 면전에서 들으면 얼굴이야 굳히겠지만. 묘사된 정희의
모습에선 그저 "x발, x나 유세떠네."하고 뱉어내버릴 잔소리쯤 아니었을까.
다만 그것이 모든 관계를 무너뜨릴 역할을 하는 이유가 자신이 특히 집착적으로 의식하는 '환대'라는 것에 얽혀있다는 점이다.
"내겐 환대, 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p33)"
이 부분에서 '환대'가 가지는 의미가 죄와 사람, 복수 같은 것들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가지는 것인지 의문스러웠다. 물론 어린 나이에 낯선
집 한 귀퉁이에 짐을 풀어야 하는 정희가 안타깝고, 집에 들이기로 결정한 이상 환대를 해줘야 함은 당연하다. 하지만 환대는 반갑게 맞아 잘
대접할 뿐이지 누군가의 잘못을 희석하거나 분리해야할 당위를 주진 않는다.
덧붙여 이미 마석에서 정희가 오게 되었을 때 혹 과거 아내가 받았을지도 모르는 '절대적 환대'라는건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부분에서
희석되어 버린다. 때문에 그를 의식해서 되갚는 식의 '절대적 환대'를 내주어야 할 의무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정희를 맡게
되는 사정을 읽다보면 그들 내외, 특히 자신이 정희에게 해야만 마땅한 것으로 여기는 환대 자체는, 부채와 동정으로 얼룩진 양심의 조각일 뿐 그
아이를 향한 진짜 환대였던 적은 없었던 것이다. 읽고나니 딱 한 개의 고리만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정희에 대해서,
나에 대해서 아쉬웠던 그 한 개의 고리가 현실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다만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개인적으로는 '한정희와 나'보다는 자선작으로 뒤를 잇는 '권순찬과 착한 사람들'도 그렇고, 권여선의 '손톱', 김애란의 '가리는 손',
최은영의 '601, 602' 등이 더 인상적이었다. 특히 권여선의 '손톱'은 습관적으로 생활비를 헤아리는, 푼돈 쿠폰을 모으고 모아 최저가를
검색하는, 먹고 싶은 메뉴보다 가성비를 고려하는, 한달 생활 영수증을 모아 '스튜핏과 그레잇'을 평가받아야만 하는 젊은 세대의 궁핍함을 잘
드러냈다. 생각보다 페미니즘과 다양성에 관련된 내용이 드물었던 것 같다. 18회 작품집에는 더 많은 작품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