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나라 - 성폭력 생존자와 가해자가 함께 써내려간 기적의 대화
토르디스 엘바.톰 스트레인저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여자들은 별것 아닌 일로도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 살해되기까지 하지 않던가. - p.31 7년 5개월 후 "

 

 더이상 미룰 수 없이 리뷰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날의 아침, 늘 틀어놓는 아침 뉴스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여자화장실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아 둔기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는 사건을 접했다. 사회를 뒤흔든 '강남역'의 사건이 절로 떠오르는 뉴스였다. 묻지마 폭행이 의심되는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피해자를 스토킹하던 남성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여지도 함께 보도되었다. 이 뿐아니라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그것은 피해자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인 충격을 안겨주었다.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아물지 못한 사건들 사이에서 '용서의 나라'는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아우르며 다가온다.

 

 독특하게도 '용서의 나라'에서 톰과 토르디스의 관계는 종종 희생자와 치료사의 모습을 띈다. 그것이 독특하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강간 피해자인 토르디스가 그들 사이에서 치료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p.247) 그녀 역시 분노하고 좌절하고 상처입은 영혼으로 표현되지만, 역설적이게도 톰 역시 자기 연민에 빠진 상처입고 후회 가득한 희생자의 모습으로 토르디스 앞에서 섰다. 그리고 그것을 두 사람이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때문에 책의 표지에서 발견한 '성폭력 생존자'라는 표현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토르디스는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고 그 안에서 중의적인 의미로 생존해 낸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토르디스가 처음부터 용서를 시도하고, 상대방과 마주하길 결정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녀도 자신이 평범하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후회를 하는 모습을 보였듯이, 수많은 '피해자들이 겪었던 갈등과 상처'를 가졌었음을 드러내는 부분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이 겪었던 갈등과 상처'로 표현한 바로 이 감정과 고통들은 피해자로 지칭되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가 털어놓은 자책과 상처가 '공감'되어 다가왔던 것이다. 또한 나는 어떤 기준으로 그들을 판단하였던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 설상가상으로 나는 술 먹고 취했을 뿐만 아니라 '강간을 자초한' 여자이기도 했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생각을 뒷받침한 것은 당시 강간에 대한 사회적 담론에서 내가 습득한, 피해자를 비난하는 논조였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시각 때문에 나는 오랫동안 톰의 어깨에 책임을 지우는 일을 할 수 없었다. - p.104 "  우리는 옷가짐을 정숙하게 해야하며,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해야하고, 늦은 시간에 외진 곳에 있어선 안되고, 누군가 나를 성폭행하려 하면 무조건, 죽음의 위협에 맞서 강력히 저항해야만 한다. 어느 하나라도 그렇지 않았다면 피해자는 성녀가 아니라 창녀의 위치로 전락하여 비난과 의심을 받게 된다.

 

 넓은 범위로 확장되어 가는 문제의식들 뿐 아니라, 그녀가 느끼는 양가적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분들이 날카로운 위트를 보인다는 점도 좋았다. 굉장히 솔직하고, 거침없는 태도로 자신 내부의 변화를 세밀하게 공개했다. 여자의 삶과 인종에 대한 시각, 더불어 그녀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얻게 된 몸의 변화까지도 들어있다. 미경험자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출산시 회음부절개와 관련된 이야기를 읽으며 (p.244) 토르디스의 솔직함에 조금 더 감화되었다. 처음 '용서의 나라' 를 읽으며 문체가 다소 장황하거나 극적인 느낌을 받았던 것에 비해, 뒤로 지날수록 지나치게 많은 부분에 꼽아둔 표시들이 생겨났다.

 

 또 하나의 특별한 점은 토르디스가 겪은 불행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여성에 대해 말하길 멈추지 않고, 거기에 그녀 자신이 서있는 또다른 위치까지도 의식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 택시에 올라타니 가까스로 위험을 모면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리고 이어서, 백인으로서 내가 누려온 부인할 수 없는 특권에 대한 죄의식과 혐오감이 찾아들었다. - p.113 " 이런 부분인 것이다. 인종적인 문제까지도 서슴없이 화두에 올리길 주저않는 점이 독특했다. 그것이 그녀를 단순히 피해자의 위치에 머물지 않게 할지도 모름에도. 그리고 인종적 기득권에 속하지 않는 입장에서 이점은 꽤 만족스러운 요소였다.

 

 "내가 막 침묵을 깨려는 순간 지저분한 스웨트셔츠 차림의 이 빠진 남자가 급히 다가오더니 동전을 구걸해다. 내가 아무리 그 사람을 돕고 싶어도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자 마음이 아팠다. 톰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하자 남자는 포기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가만히 내 손을, 무릎 위에 보온 담요처럼 놓여 있는 내 기득권의 무게를 쳐다봤다. - p.77 "

 

 이 책이 누군가에게 깊은 감명과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개인적으로는 깊은 감명을 받았지만, 다만 다른 이들에게 어떤 강요나 섣부름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사건에 대한 해결에 정답은 없고, 수많은 자아들이 있는 것처럼 그에 맞는 해결 방식이 존재할 것이다. 다만 '용서의 나라'를 통해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더 내밀한 어조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된다. 읽는 내내 떠올랐던 짧은 시에 대해 함께 옮긴다. 출처는 ena ganguly라는 이름으로 업데이트 되는 한 SNS이고, 영어로 쓰여진 시를 한글로 옮긴 내용이다.

 

 "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보다 빨리 성숙해진다 / 왜냐하면 / 우리는 내내 가르침받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은 폭력을 부르는 미끼이며 / 우리의 입술은 유혹적이고 / 우리의 허벅지는 죄로 역하며 / 자라나는 우리의 굴곡은 아저씨들의 눈과 손을 낚는 덫이라고 / 우리는 이 한 가지 가르침을 받는다 / 남자들 앞에서 우리의 몸은 우리를 배신한다는 것 / 우리는 다섯 살, 여섯 살, 일곱 살의 어린 나이에 이를 배운다 / 몇 번이나 이 가르침들은 우리를 옭아매는데 / 남자아이들은 그저 아이로 남는다 - ena gangul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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