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R은 너에게서 떨어져 어딘가 먼 곳의 진흙탕 속으로 갈거야. 너의 음울함 모두를 등에 짊어진 채로. 그리고 그 넓고 더러운 진흙탕 속에 묻혀버려. 다시 나올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어디 이래도 버티나 보자, 라고 할 만큼 떡이 되게 두들겨 맞고, 참혹하게 쓰레기처럼 묻혀버려. 그리고 너는."

남자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내 얼굴을 보았다. 뭔가 미안하다는 듯이.

"그럭저럭 명랑해질 거야. 장래에는 뭔가 일을 하면서 여자도 사귀고 너 나름대로 이 따분한 세계 속에서 살아갈 거야. 다들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세계가 제시해주는 다양한 인생 모델, 그중 어느 것 하나를 자연스럽게 선택할 거야. 때로는 외국의 굶주린 아이들에게 동정심을 베풀어도 좋아. 때로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해봐도 좋아. 그럭저럭 재미있을 거야. ...... 아마도." ]

 

이런 시작점을 가지고 있는 책인데,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덕분에 읽는 동안은 꽤 재미있게 읽었다. 한시간 남짓하는 거리를 전철로 가면서 책 읽는 동안은 금방 내릴 역이 가까워 왔었다. 이 책을 들고 전철을 한 서너번 탔을까, 싶다. 매번 다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고, 그 중 두번 정도 읽으면서 갔는데 그러고 나니까 스무장 정도가 남았었다. 몰입도도 좋고 읽는 속도도 빠르게 유지하며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인물도 간결한 편이라 텀을 두고 읽으면서도 앞 내용이 기억 안나 딱히 되짚어 읽었다 돌아오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썩 마음에 흡족한 기분이 남질 않는 책이었다.

 

 내용 자체가 음울하다. 초반에는 사실 어떤 괴물이 탄생하겠거니 싶을 정도로 호기심을 자아내는 시작을 보여줬는데, R의 존재가 흐려지면서 주인공에 대한 관심도 조금 사그라드는 느낌이었다. R과 다시 이야기하게 되는 부분에서 마치 R 또한 주인공에게서 실망을 느낀 것이 아닌가 여겨질 만큼. 주인공은 그저 주변을 관찰하면서 '사실 내 안에도 무언가가 있는데'라고 과거의 자신을 반추하기만 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은 것 같다. 나 역시 사나에처럼 '히어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인물이 소설의 전반에 걸쳐 드러나길 바랐고 그것이 R이라는 존재를 품고 있던 주인공이기를 바랬다. 너무나 흔한 공식이라고 하더라도 그랬었더라도 그 과정을 충분히 잘 그려낸 작품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소박한 기대마저 흩트려놓은채 어딘지 석연치 않은 전말을 풀어내며 이야기가 끝났다. 과거에 비해 지나치리만큼 평범한 현재를 살아가게 될 주인공들을 보면서 불만족을 느끼는 독자가 오히려 더 이상한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마냥.

 

 작가의 다른 작품 왕국도 읽은 적이 있다. 그 작품도 높은 몰입도로 속도감있게 읽을 수 있었는데, 나카무라 후미노리 작가 특유의 문체나 장점으로 꼽을만한 좋은 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다만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밋밋함이나 아쉬움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결말이 평이하고 수수하게 맺어진다고 해도 그 안에 깊은 불유쾌함이나 처연함을 내재시킬 수 있는 작품을 써내려간다면 좋겠다. 심층심리를 드러내면서 한편으로는 다독여줄 수 있는 힘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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