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
노라 에프런 지음, 김용언 옮김 / 반비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노라 에프런'이라는 그녀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녀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녀의 이름보다 먼저 그녀가 쓴 영화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그녀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유브 갓 메일',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줄리&줄리아' 등의 영화를 쓴 영화감독이자 작가이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 낸 작품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도 다시 깨닫는다. 깜짝 놀랄 정도로 고령이 된 그녀가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하여'말한다. 우리에게 철들어도 변치 않을 판타지를 심어주었으면서.

 

 "저녁 늦게 욕실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한 시간 반 동안 이빨에 시금치를 붙이고 돌아다녔다는 걸 깨닫고 나면 너무나 슬퍼진다. 위험 수위가 훨씬 더 높은 파슬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친구 중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할 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도 슬프다. 특히 이빨에 시금치가 붙어 있다는 걸 말해주는 건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에 더욱 상처받게 된다. 그냥 "이빨에 시금치 붙었어요."라고 말해주면 그만인데."

 

 이런 대목을 읽다보면 그녀가 몇 살인지 잊고 만다. 1941년 생인 그녀가 마치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 남자아이를 보이는 듯한 느낌이다. 한 시간 반 동안 시금치를 붙이고 다닌 자신을 보고 상처받는데, 왜냐면 그것을 말해주는게 사실 너무나 쉬운 일인데 아무도 그렇게 해주지 않아서라고 말하는 게 엉뚱하다. 성인의 관계에서는 그게 굉장이 미묘한 문제로 느껴지는 일 아닐까. 지적한다면 상대방이 민망해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어쩌면 이런 부분이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고춧가루를 위험하게 여기는 데 비해 파슬리를 걱정하는 문화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내 생각에 현대인의 삶에 있어 진정한 기적 중 하나는, 극장에 들어가 신용카드를 기계에 갖다 대면 미리 예매했던 바로 그 좌석의 표가 바로 내 앞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이 기적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소리 지르고 싶다."

 

 이것도 좀 다른 부분인 것 같다. 신용카드를 기계에 읽혀 예매한 표를 찾는다는 방식은 처음 들어서 특이하게 생각됐다. 이 뒤로 바뀐 예매발권 방법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표하는 내용이 이어지는데, 우리나라 극장도 매번 달라지고 있는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녀의 이런 '변화에 대한 불만족'에 공감했다. 그녀만큼의 나이는 아니어도 변하기 전 것에 더 애착이 가고 가슴이 뛴다고 생각하는 건 같다. 예전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 표를 줬는데, 지금은 얇디 얇은 영수증으로 끊어져 나온다. 그건 극장이 주는 메리트에서 하나를 없애버린 것이다. 그날 본 영화와 그에 얽히게 된 추억, 그리고 남은 표. 이 표도 버려야 할 판타지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테플론 제품을 제조해온 듀퐁사는 최근 미국환경보건국으로부터 165만 달러의 벌금 제출을 명령받았다. 아마 듀퐁사는 테플론이 건강에 유해한다는 사실을 쭉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미국적이고도 진부한 내용이다."

 

 환경과 사람에 좋지 않은 행위를 한 거대 기업이 사실은 그 유해함을 알고 있었으나 숨기고 있었고, 그것이 밝혀지자 기업이 숨기고 있던 비밀까지 폭로된다는 내용은 매번 이슈가 되면서도 사실은 꽤 흔한 뉴스다. 그녀가 그 점을 '미국적이고도 진부한 내용'으로 꼬집은 점이 재미있다. 그녀의 글을 읽다보면 거침없고 유쾌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얘기를 언급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솔직한 내용도 있다. 거기다 이런 얘기를 언급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자질구레한 내용도 있다. 사실 버려야 할 판타지에 대한 내용은 없다. 버리지 못한 판타지가 그대로 묻어나고 판타지를 버릴 필요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다. 그녀처럼 유쾌하게 나이든다면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이런 종류의 로맨스가 끝장날 때에는 어떤 변명이든 늘어놓게 된다는 것이다. 세부사항들만 조금 다를 뿐 이런 이야기는 항상 똑같이 진행된다. 젊은 여성이 나이 든 여성을 우상화한다. 젊은 여성이 나이 든 여성을 따라다닌다. 나이 든 여성이 젊은 여성을 받아들여 준다. 젊은 여성은 나이 든 여성이 그저 인간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이야기 끝. 젊은 여성이 작가라면, 언젠가 그 나이 든 여성에 대해 글을 쓰게 된다. 세월이 흐른다. 젊은 여성이 나이가 든다. 그리고 로맨스가 그렇게 끝장난 것에 대해서만큼은 사과하고 싶어지는 순간을 맞는다. 지금 쓰는 글을 바로 그런 종류의 사과문이다."

 

 한때 빛났던 사람의 빛을 바라보고 그 빛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한다. 자신이 젊게 빛나는 동안은 그 빛을 자랑스럽게 내뿜으며 한때 빛났던 자의 스러짐을 바라본다. 자신의 빛이 다 스러지고 나서야 나이든 자가 스러지고 난 빛의 여운을 남기고 있음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인지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사이에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다. 영화 '은교'가 떠오른다. 소설은 아직 다 못 읽었기 때문에 영화부터 떠오른다. 나이 듦이 나이 든 자의 잘못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젊은 자의 젊음이 그들이 가진 특권이 아니라는 내용의 대사가 있었는데, 이 부분도 늙음이 오기 전의 젊음이 저지를 수 있는 착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은교'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비록 제자가 먼저 죽어서 이런 사과문은 나올 수 없었겠지만. 누군가를 존경하고 동경한다는 건 그를 이상화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대상이 자신의 이상과 부합하는 인물이라면 좋겠지만 글쎄, 이상적인 인물 그대로 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우리는 종종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에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곤 하지 않는가.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상대방을 자신보다 높게 보고 존경하고 동경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하고 생각하곤 한다. 누군가를 자신이나 남보다 높게 생각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기도 하지만, 그로인해 대상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는 좀 씁쓸한 일인 것 같다.

 

 "얼마 전 내 친구 그레이든 카터가 뉴욕에 레스토랑을 열겠다고 했다. 나는 그 계획에 대해 경고했다. 식당 경영이야말로 모두가 철들면서 버려야 하는 보편적인 판타지의 일종이라는게 내 지론이다. 그러지 않으면 식당이라는 무거운 짐을 떠안게 된다. 식당 경영에는 수많은 문제점이 따라붙는다. 주인 스스로 매일 거기서 식사를 해야 한다는 건 가장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식당을 열겠다는 판타지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심리학자 피아제의 인지 발달 단계의 최종 심급이다." 

 식당 경영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게다가 동의한다. 주위를 보면 특히 '카페'를 경영하고 싶어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그렇게도 카페가 많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하나같이 여유롭고, 알음알음으로 사람들이 찾아오는 깔끔하면서도 따뜻한 공간을 꿈꾼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인생을 느긋하게 커피향 맡으며 즐기는 주인이 되고 싶어한다. 그렇게 된다면 곧 경영부진으로 문을 닫게 될 것만 같다고 생각이 드는데, 어쨌든 그렇다. 그런데 이런 꿈을 꾸는 사람들이 미국에도 보편적으로 있다니.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철들면 버려야 할 판타지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피아제의 인지 발달 단계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말이다.

 

 노라 에프런의 책을 이제 막 다 읽었는데, 그녀는 약 일주일 전 죽었다. 이제 막 그녀의 영화 뿐 아니라 그녀도 사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는데, 그 기분은 다 느끼기도 전에 애도를 해야할 순간부터 찾아왔다. 그녀에게 이빨에 붙은 시금치에 대해 미처 말해주지 않은 친구들도, 그녀를 몰라도 영화만은 좋아했던 수많은 사람들도 그녀의 죽음을 아쉬워했을 것이다. 그녀 식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더이상 개봉되지 않는다는 것이 서운하다. 우린 철이 들었어도 아직도 많은 판타지를 그러안고 지내고 있고, 또 지내야만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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