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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차별 - 그러나 고유한 삶들의 행성
안희경 지음 / 김영사 / 2025년 1월
평점 :
" 나는 선하다 내세운 내 의도, 곁에 있다고 주장한 연대선언에서 무언가를 흘렸다. 아마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한 '무지'같다. 타인의 삶을 단순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헤아리는 데 골몰한다. 어리석음이다. 모른다는 것을 여태 붙들지 못하고 흘린다. 지금 허용받은 말은 사과뿐일 텐데도. (p106) "
솔직히 이 책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가장 예민한 주제 중 하나인 젠더갈등과 개념 때문이었다. 처음 동성애자나 트렌스젠더의 존재를 알게 된 뒤로 무수히 많은 인정과 차별을 배웠다. 둘 중 하나만이 존재해야 할 법 하지만 그 둘은 늘 함께 따라왔다. 생각해보면 나의 인정은 차별이 가능한 위치에서 내어줄 수 있는 알량한 것이었다. 특히 트렌스젠더와 여성간의 갈등 양상을 빚는 문제들을 볼 때면 그동안 학습해왔던 인식마저 되돌리고 싶어하는 내면을 마주한다. 그럼 내 안에는 차별만이 남을까? 인정은 어디까지 해야하는 것이지? 차별과 권리, 평등과 혐오는 왜 이렇게 복잡하고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걸까? 누구도 정답지를 내어줄 수 없겠지만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도움을 받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 그런 나의 계기가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깨달았다. 젠더와 그에 수반된 '정치적 올바름'에 관한 문제들은 한국인인 내가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소수자로 겪은 유일한 경험이었던 것이다. '인간차별'은 그보다 더 넓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이 다양함이 책을 읽는 동안 약간의 두서없음으로 다가와 어렵기도 했다. 좀 더 각각의 흐름을 엮어 부드럽게 이어냈다면 좋았을텐데 아쉬웠다. 제각각이지만 저마다의 삶에서 겪은 부당함, 의문, 분노, 체념, 수치같은 것들을 딛고 삶의 방향성을 잡기 위해 어디에 가치관을 두었는지, 무엇을 받아들이기로 했는지 지켜보고 있자면 순수한 감탄이 나온다.
글로 만나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시선은 유하다. 여러 구절에 표시를 해두면서 이런 관점은 새롭고,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을 깨닫고, 긍정적으로 호응한다. 책을 읽고 있는 동안은 언뜻 차별을 반대하는 성숙한 의식을 가진 사람인 것 같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이 있지만 이목구비, 피부색, 옷차림, 언어 같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도 귀에 들리지도 않기 때문이다. 명절 연휴에 지하철을 타고 번화한 상점가가 많은 지역에 간 적이 있다. 한국인들이 명절을 쇠는 동안 순수한 연휴를 갖게 된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외출을 나왔고 그 안에서 약간의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꼈다. 여기가 한국인데도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것 같다는 게 주된 이유였던 것 같다. 책을 읽는 나와 지하철을 탄 나는 같은 사람이다.
오랫동안 살던 동네에서 이사를 하고도 긴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옛동네에 가도 많은 것들이 달라져 골목에 어떤 가게가 있는지 이웃에 누가 어떻게 지내는지 모른다. 그런데 '사는 곳'을 배경으로 꿈을 꿀 때면 항상 전에 살던 동네의 집이 나오곤한다. " '사는 곳'이 주는 결속력이랄까? 노래 <고향의 봄>이 '나의 태어난 고향은'이 아니라 '나의 살던 고향은'으로 시작하는 이유도, 관계가 사는 곳과 살아온 시간에 뿌리 박히는 힘을 알아차려서인 것 같다. (p47)" 자라온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옮겨온 지역에서 지내다보면 고향에 대한 나의 인식도 변하게될까? 책을 읽으며 멀리서 바라보듯 혹은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을 더듬어 찾고 있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이민자, 외국인, 다문화가정에서만 느낄 수 있을 것 같던 저자의 말을 조금은 알 것도 같은 순간이었다.
사실 좀 더 분석적인 내용을 기대하기도 했고, 어지러운 흐름이 아쉽기도 했던 탓에 에필로그의 제목으로 '코끼리의 실체'가 나왔을때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것과 비슷하단 생각을 했다. 모자이크의 조각들로 어떤 그림을 볼 것인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일까. 1교실 2교사 이상 체제(p194) 교복(p61)같은 문제들에 있어서 가끔 멈추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두는 시선에 배워가며 읽었다. " 생각과 문화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거부감을 표현하는 순간 자칫 혐오의 경계에 들어설 수 있다. 알아차리지 않고 흘려보낸 감정으로 차별주의자에 갇힐 수 있다. 상냥함에 물들고 싶다. 그럴 나이다. (p35) " 상냥함에 물들고 싶은 그러나 자신안의 차별주의적 틀에서 벗어나기 힘든 이들에게 가볍게 권해보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