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하여 사립탐정의 하루가 지나갔다. 정확히 전형적인 날은 아니었지만 아주 특별한 날도 아니었다. 한 남자가 이 일을 그만두지 않고 버티는 이유를 아무도 알 수 없다. 부자가 될 수도 없고, 대부분 재미도 별로 없다. 때로는 얻어터지거나 총을 맞거나 감옥에 던져지기도 한다. 아주 가끔은 죽을 수도 있다. 두 달마다 한 번씩, 이 일을 그만두고 아직 머리가 흔들리지 않고 걸어다닐 수 있을 때 번듯한 다른 직업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문에서 버저가 울리고 대기실로 향하는 안쪽 문을 열면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여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슬픔, 약간의 돈을 안고 들어온다.˝

 

 

 

레이먼드 챈들러기나긴 이별 시작 부분이다. 음악을 들을 때 나는 대부분 첫 소절에서 마음을 뺐긴다. 음악에 관한한 처음이 마음에 들면 마지막까지 좋아하게 된다. 그만큼 취향이 분명한 편이다. 여러 번 들어봐야 겨우 좋아지는 경우는 없었으니 말이다. 노래를 들을 때도 멜로디뿐만 아니라 가수의 음색이나 가사에도 예민해서 가창력이나 기교가 지나치게 뛰어난 노래보단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배우처럼 한 인물이 되어 잔잔한 감상을 남겨주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첫 문장을 읽으면 대부분 느낌이 온다. 경험을 넓혀주는 소설이 될지, 좋아하는 소설이 될지 말이다.



서정적이며 섬세하지만, 아무런 꾸밈이 없어 다소 건조하고 무심한 문장들이 나의 취향이다.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는 글이나 지나친 생략, 은유를 위한 은유, 문장을 가지고 놀려는 기교적인 오만함은 사양하고 싶어진다. 「기나긴 이별」을 읽기로 마음먹은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취향 덕분이다. 이 책은 하루키가 무려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궁금해졌고, 너무 좋아하게 될까 봐 나름의 거리를 두기 위한 방법으로 근 한 달간을 묵히다가 드디어 펼쳤다.



그리곤 처음 읽은 저 문장이 뭐라고 몇 번이나 읽었다. 소설 속 캐릭터와 내용을 전혀 모르면서도 감상을 쓰고 싶은 건 아마도 취향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상한 건지는 몰라도 글을 읽다 보면 어떤 목소리를 통해 글이 들리는 느낌이 든다. 단지 시각적인 정보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감성의 목소리로도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첫 문장을 읽으면 문체의 특성에 맞는 나름의 톤이나 리듬이 생긴다. 챈들러의 문장에서는 조용히 휘감기는 서정적인 내밀함과 단단한 근성이 느껴졌다. 하루키가 왜 챈들러를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루키에게 영향을 준 것이겠지만 두 사람의 음색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하루키가 좀 더 소년 같은 음색이라면 챈들러는 그보단 저음의 목소리를 내는 것 같다.



'필립 말로 시리즈'는 「빅 슬립」, 「하이 윈도」, 「안녕 내 사랑」, 「호수의 연인」, 「리틀 시스터」, 「기나긴 이별」로 기나긴 이별이 마지막 작품인데 어쩐지 읽기 전부터 조금 섭섭하고 아쉬워진다.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자신만의 취향이 있다는 건 분명 행복한 일이다. 그게 뭐라고 싶다가도 그것 덕분에 마음이 즐거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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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이 책을 읽을 땐 밥 딜런을 들으면 좋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2권을 읽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 부분을 읽기 전까지 밥 말리를 듣고 있었다. 물론 착각 때문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선곡이었다.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노래에 집중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1985년에 출간된 책으로 이 소설을 해설한 단행본만 일고여덟 권에 달하고, 기타 관련 서적들도 십여 권이 넘는다고 한다.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여러 평론가들의 지배적인 평가일 만큼 하루키의 세계관이나 문학관이 녹아든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루키가 몸을 단련하겠다는 결심으로 42킬로미터의 마라톤을 거뜬히 뛸 수 있게 된 후 처음으로 쓴 소설이라고도 한다.



여러 권의 해설집이 나올 정도로 내용이나 결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소설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해석적인 부분보다는 하루키를 좀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더 정확히는 하루키의 글에 이끌렸던 나에 대한 이해인 것 같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특별한 기억으로도 떠오를 것 같다. 하루키의 책을 읽던 중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감정 기복이 심하질 않다. 어떤 감정이든 정화한 후에 드러내는 편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밋밋하고 한편으론 그래서 믿음이 간다. 그렇게 담담히 묘사해가는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어떤 부분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비록 짧게 지나가는 마른 눈물이었지만 가슴에는 물리적인 통증이 순간적으로 느껴졌었다. 근원적인 슬픔이자 애처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착각 덕분이긴 해도 밥 딜런과 밥 말리의 아련한 음색과 함께 떠올려질 담담한 슬픔이, 읽는 내내 이어지던 깊은 생각들이 이 책을 추억하게 할 것 같다..


 

사람들은 그것을 절망이라고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절망인지도 모른다.

투르게네프라면 환멸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라면 지옥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서머셋 몸이라면 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나 자신인 것이다. (2권 p247)

확실히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은 나 자신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내 안에는 잃어버린 것들의 앙금이 일몰 뒤의 빛처럼 남아 있어 나를 지금까지 살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p351)

"알료샤는 많은 것을 터득하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그 소설을 읽었을 때 난 꽤나 의문스러웠어. 아주 불행한 인생을 총체적으로 축복한다는 게 가능할까 하고. " (p345)

- 소설 속 화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해 대화하는 부분 -

햇빛이 앞 유리창 창문으로 비쳐들어와 나를 빛 속에 감싸고 있었다. 눈을 감자 그 빛이 내 눈꺼풀을 따뜻하게 내리쬐는 것이 느껴졌다.

햇빛이 그 멀고 먼 길을 더듬어 이 자그마한 혹성에 도착해서 그 힘의 한 자락을 사용해 내 눈꺼풀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야릇한 감동이 느껴졌다.

우주의 섭리는 내 눈꺼풀 하나조차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알료샤 카라마조프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정된 인생에는 한정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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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2015-06-02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하루키의 책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됐네요. 저도 읽었는데 왠지 하루키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했어요.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물고기자리 2015-06-02 10:54   좋아요 0 | URL
네~ 그렇다고 하네요 ㅎ 하루키도 이 책을 좋아한다고 해요^^

초딩 2015-07-07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위 해설들을 저도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 기복이 심하지 않은 캐릭터들 그래서 담담한 시선들 - 하지만 독특한 (위트라기에는 조금 무거운) - 을 활자로 담은 하루키의 책이 좋은가 봅니다. :)

물고기자리 2015-07-07 15:26   좋아요 1 | URL
제가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기에 앞서 그냥 이유 없이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분이 하루키예요 ㅎ 감동을 받고 싶다거나 배움을 얻겠다는 목적의식 없이 그저 읽다 보면 영감을 얻게 되고, 마음에 쉼을 준달까요..^^

초딩 2015-07-07 15:27   좋아요 1 | URL
비슷한 이유로 요즘 로맹 가리에게 큰 흥미가 가고 있어요 ㅎㅎ :)
 

 

 

˝태양은 왜 지금도 빛나고 있나요.
새들은 왜 지금도 지저귀고 있나요.
그들은 모르고 있는 건가요.
세상이 이미 끝나버렸다는걸. ˝

<THE END OF THE WORLD>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종종 낯섦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곤혹스럽지 않은 낯섦이다. 하루키의 문체엔 특유의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간결한 문장들은 피로감 없이 쉽게 읽히며, 무엇보다 그에겐 능숙한 어른처럼 보이려는 거만함이나 완고함이 없다. 무엇이든 함부로 단언하기보다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에 충실한 그의 문체는 여전히 세상을 궁금해하는 내면의 소년을 잃지 않았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삶에 대한 모든 의문에 마치 항목별로 색인 작업을 해둔 것처럼 늘 준비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좋다. 매사에 지나친 확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지만,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하면 편견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끝이 비록 실망으로 끝날지라도 그것 또한 하나의 경험이 된다.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가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설명적인 어조로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극적인 과장을 통해 억지로 교훈을 주려고도 않는다.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마다 결론지어 주는 말이나 글을 통해 위안을 받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알지 못하는 세계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모호하지 않은 것, 긍정이든 부정이든 결론지을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을 판단해서 특정 항목으로 분류해 넣을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하루키의 글은 그래서 불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살다 보면 분류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일들도 겪게 된다. 어떤 일들은 그저 그냥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럿의 가벼움이 여럿의 우연을 만나 어느 한순간 일어나버리는 일들은 아무리 특정 부분을 되돌리려 애써봐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우연들을 남긴다.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매일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를 어떤 경험들로 체득했을 때 비로소 겸손해지고, 그때 역설적인 의미로 평온해진다. 그래서 주장하지 않는 글들이, 판단에 앞서 그저 집요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글들이 의미 있어진다.



하루키의 글은 설득하려거나 답을 결론짓지 않는 부유의 상태이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나 사실들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반대인 성향의 사람들에겐 하루키의 글이 편안하다. 각자의 의견이나 취향은 분명해도 서로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며 작가는 탐색한 것을 쓰고, 독자는 그저 읽기 때문이다. 영향을 주는 것이나 받는 것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성향들이다.



하루키의 글을(소설까지) 모두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도 특히 나 같은 사람은 참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무엇을 얻으려거나 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읽는 즐거움을 위해 읽기 때문이다. 찾으려는 노력 같은 건 아예 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루키도 이기적이다. 자신의 의식을 어떻게든 정의하려 애쓰지 않고, 쓸 수밖에 없으므로 계속 쓰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가 하는 달리기처럼 반복적으로 성실히 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각자의 무의식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하루키의 관찰법이 좋은 이유는 바로 그 적당한 거리감에 있다. 비유를 하자면 걷는 느낌과 비슷하다. 일정한 리듬, 편안한 보폭으로 낯선 것들을 관찰하지만 의식은 오히려 내 안의 깊은 곳으로 집중된다.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스쳐 지나가는 바람, 마른 솔잎 냄새, 이름 모를 작은 들꽃들은 걷는 행위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그 한가운데서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체험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나의 순수한 의식들이 하루키의 일정한 리듬을 통해 열린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들, 대상이 불분명한 의아함들, 그러나 끝가지 알고 싶어 하는 조용한 근성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낯선 것들을 읽음에도 혼란스럽지 않다. 지극히 단순한 단어들로 최대한 상세히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하루키의 일정한 리듬 속에서 그냥 읽다 보면 생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한 집요함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무장해제하게 된다. 읽으며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소설도 있지만 하루키의 낯섦은 잃어버린 내 마음을 다시 찾게 해준다.



어쩌면 하루키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수 없었던 고통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어떤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상의 생각을 하다 보면 오히려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결론지을 수 없는 모호함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불순물은 사라지고 일정한 리듬이 남겨진다. 그리고 그 리듬을 통해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마음을 조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루키가 존경스러운 것은 그의 이러한 태도에 있다. 그 호흡과도 같은 리듬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간 하루키의 글을 꽤 읽었음에도 이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는 오직 제목의 느낌 때문이었다. 하루키의 글을 집중해서 읽을 당시엔 여러 힘든 일들을 겪고 난 후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라서 '세계의 끝'과 같은 제목엔 도무지 끌리질 않았었다. 하지만 최근에 읽었던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어는 하루키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꼽았고, 하루키 역시 이 책을 좋아한다는 을 알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역시 좋았다. 첫 문장부터 집중했고, 이야기 속으로 쉽게 녹아들었다. 아직 1권만 읽은 터라 1권의 여운과 2권의 기대감이 맞물리는, 어찌 보면 가장 만족스러운 때이긴 하지만 내 마음의 움직임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기적인 독자이자 이기적인 리뷰어인 것 같다. 이렇게 온통 사적인 감상뿐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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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31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양을 쫓는 모험>,<세계의 끝~>,<태엽감는 새> 이 시기의 하루키 소설과 에세이가 좋아요. <해변의 카프카> 이후부터는 앞서 봐왔던 것의 반복적인 작법이 느껴져서 시들해져 버렸어요... 밀란 쿤데라 최근작처럼 아주 미니멀해지면 어떨까 그런 생각도...

물고기자리 2015-05-31 10:25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이건 하루키도 인터뷰에서 인정하더라고요^^ 자신도 이유는 모르겠다는 게 어쩐지 저는 좀 슬펐지만요.. 저한테도 어쩔 수 없이 반복하게 되는 것들이 있거든요ㅜㅜ

그게 이를테면 하루키의 본질인 것 같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것도, 그런 평가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하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하루키를 인정하게 되는 부분이지 않나 싶어요.

하루키에게는 달리기와 음악, 읽고 쓰기처럼 이 사람을 지탱해주는 일종의 3박자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게 없으면 쉽게 마음의 블랙 홀로 빠지기 쉬운 성향 같아요. 저도 비슷한 성향이거든요. 전 달리기 대신 요가를 오랫동안 계속하고 있는데 마음이 너무 활발히 움직여서 몸에 집중하지 않으면 균형이 맞질 않더라고요.

사실 저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 줄거리나 구성이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질리지 않고 계속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문장들을 읽으면 떠돌던 제 마음들이 비슷한 주파수를 느끼고 반응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은 하루키를 읽어요. 마음의 피로를 푸는 일종의 방법으로요 ㅎㅎ

근데 <세계의 끝..>은 뭐랄까 정확한 표현은 어렵지만 읽었던 하루키의 소설 중에서 균형이 잘 맞는 것 같아요. 30년쯤 된 소설로 알고 있는데 낡은 느낌은커녕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설을 읽는 새로운 느낌이었어요. 내용은 가볍지 않은데 경쾌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어쩌다 보니 댓글이 장황해졌는데 마음이 활발한 사람의 어수선함이 바로 이런 거에요 ㅋ

AgalmA 2015-05-31 1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작가란 무엇인가> 애정을 가지고 봤죠^^
물고기자리님처럼 저도 처음엔 그저 왜 좋은지 모르고 읽었어요. 꾸준히 읽다보니 하루키 물리학 세계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죠. 하루키의 물질들로만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부분 말예요. 하루키가 인터뷰에서 그걸 꼼꼼히 솔직히 말해서 좋더군요. 어쩌겠습니까. 모든 작가는 분명 그런 딜레마가 있잖아요.

이젠 산보처럼, 그리움과 친근함에 옛앨범보듯 하루키 읽기를 가끔 실컷 합니다ㅎㅎ 특히 단편소설을. 하루키의 명쾌하면서 달짝한 모히토 같은 맛이랄까요~
물고기자리님의 공감되는 말씀에 저도 잠시 흐뭇했어요/
 

 

 

수 없이 고민하고, 내면화된 어떤 것은 이미 본질에 다가섰기에 단순히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고양된 어조로 설명하는 글이나 자신을 변명하듯 서문이 길어지는 글은 그래서 매력적이지 않다. 평소 좋아하는 글 역시 단숨에 본질로 뛰어들며 간결하고 여운이 남는 문장이다. 대화를 할 때도 설명하는 화법을 쓰는 사람에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인데, 사람을 알게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스타일'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다는 이상은 말로써 자신을 설명하게 하지만 그냥 어떤 사람일 때는 그 본질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담담히 묘사해나가는 글을 읽는 게 가장 행복하다. 가령, 혼란스러운 상황을 표현하느라 자신이 소란스러워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고요히 묘사하는 와중에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표현하려는 '의지'가 아닌 '의식'을 드러내는 사람의 말과 글을 좋아한다.



자신의 기준안에서 옳기 위해 방어적인 태도보다는 본질에 투명해지려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좋다. 그러므로 나에게 가장 좋은 소설은 읽는 동안 판단하게 하지 않고, 읽는다는 행위조차 잊게 만들어 주는 글이다. 다 읽고 나서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설사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를지라도 심상에 묵직한 어떤 것, 감상과 직관을 남겨놓는다. 이런 글은 두고두고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나의 일부에 기록되는 것 같다.



이런 성향으로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 나의 감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생각을 자극해주는 분들, 숙연해지는 존경심을 느끼게 해주는 분들, 그리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좋았던 분들. 그중에서 그냥 이유 없이 좋았던 인터뷰의 일부를 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어는 하루키에게 그가 집착하는 생각을 강박적으로 쓰고 또 쓰는 것의 어떤 특정들에 대해 동의하는지를 묻는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런 주제를 반복해서 쓰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제 주인공들은 뭔가를 잃었어요. 그래서 잃어버린 부분을 계속 찾아다닙니다. 마치 성배나 필립 말로처럼요. 그 주제가 제 이야기들의 추동력입니다. 잃어버리고 찾아다니고, 발견하기. 그러고 나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인 실망이 기다리고 있지요. ˝

 

 

 

레이먼드 카버의 인터뷰어가 그에게 단편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묻자 카버는 말한다.



˝아이들을 키우고, 글을 쓰려고 애쓰면서 제가 빨리 끝낼 수 있는 걸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한 권에 2~3년이 걸리는 소설을 쓸 방법이 없었어요. 다음 해나 3년 후가 아니라 당장 보수를 지급받을 수 있는 것을 써야 했습니다. ˝



인터뷰어는 카버에게 그의 작품이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소설은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소설은 단지 그것에서 얻는 강렬한 즐거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뭔가 지속적이고 오래가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읽는 데서 오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지요.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계속해서 불타오르는 이런 불꽃을 쏘아 올리는 어떤 것이랍니다. ˝



나는 이들의 변명 없는 투명한 답변들이 좋다. 자신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설명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관점을 통해 자신을 해석하려는 시도이고, 종종 우리는 스스로를 설명함으로 특정한 이미지로 고착화하려 한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장 명확히 아는 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얼 원하는지, 아닌지 정도가 아닐까?



「수전 손택의 말」에서 손택은 이야기한다.



˝제가 보기에 좋은 글쓰기라는 건 은유의 정화예요. 쓸데없는 걸 다 벗어던진 적나라한 특질 때문에 저는 베케트와 카프카에게 매력을 느껴요. ˝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의문을 작가는 쓰는 행위를 통해 정화하고, 독자들은 그것을 읽으며 정화하고, 리뷰어는 감상을 남김으로 자신의 정화를 내면화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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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저자의 시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때가 온다. 줄거리나 캐릭터에 대한 호불호가 아니라 한 사람의 관념을 보게 될 때, 본격적인 '독자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책들을 하나씩 탐독하다 보면 저자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책들을 알게 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 읽기에 대한 열망은 다른 사람의 관점을 경험해나가는 과정이 되어 나에게 저마다의 사연들을 남기는 것 같다.



어떤 책을 다시 읽었을 때 전과 다른 느낌이 든다면, 전엔 보이지 않던 문장이 마음에 사무친다면, 그동안 나에게 새로운 사연이 생겼다는 뜻일 거다. 사람은 누구나 경험한 만큼만 보고, 알게 되기 때문이다. 경험의 많고 적음은 세월과도 무관하진 않지만 개인의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의 다양함이나 깊이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신적인 허기를 달래줄 책이 필요해진다. 그런데 이 허기는 만족이 없다. 알고 싶다는 건 삶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사랑하면 알고 싶고, 사랑이 커질수록 더 궁금해진다. 그 사랑은 역설적으로 결핍을 느낄 때 시작되는 것 같다. 허기를 느끼는 건 삶을 열망하기 때문이고, 그때 본격적인 독서가 시작되며 그 열기를 감당 못해 작가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글이란 삶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아직 알지 못한다 생각하는 사람이고, 그 겸손함이 성실한 작가와 독자를 만든다. 지혜라는 건 채움과 비움의 연속이라고 생각하지만 채우지 않고 어떻게 비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중용을 택해야 한다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쪽과 저쪽의 끝을 알지 못하면 어떻게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어떤 작가는 나를 채워주고, 어떤 이는 버릴 수 있게 도와준다. 시대를 초월한 스승이자 다정한 친구 같은 그분들은 내가 계속 읽고자 하는 한 나를 외롭게 하지 앓는다. 기쁨 쪽에 있든, 절망 쪽에 있든 말이다. 「작가란 무엇인가」는 그렇게 읽고, 쓰신 분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다. 김연수님의 추천사로 시작되는 이 책은 그 처음부터 설렜다. 이 책을 읽게 된 사연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음에 읽고 싶은 책들은 기억해 두었다.



모두에게 통하는 삶의 궁극적 의미란 없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의 의미를 내 것으로 할 수도 없다. 끝까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찾아가는 과정의 모든 여정은 그 자체로 의미 있다. 독자란 그렇게 성실히 노력하는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아닐까..


 

제 일은 사람들과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지 판단 내리는 게 아닙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사람들이 카프카를 해석하려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모른다는 점을 알고 계십니까? 상상력이 그 자체로 가치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예술, 특히 현대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 밀란 쿤데라


작가는 가능한 한 잘 쓰고 나서 좋은 독자를 기다리는 거지요. - 레이먼드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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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트도우 2015-05-14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는 일의 연속이지요. 아직 오지 않은 반응들을 기다립니다

물고기자리 2015-05-14 19:48   좋아요 0 | URL
식상하지만 ㅎ 기다림은 숙성되는 시간이라 믿는다고 긍정적인 답글을 달고 싶어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