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왜 지금도 빛나고 있나요.
새들은 왜 지금도 지저귀고 있나요.
그들은 모르고 있는 건가요.
세상이 이미 끝나버렸다는걸. ˝
<THE END OF THE WORLD>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종종 낯섦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곤혹스럽지 않은 낯섦이다. 하루키의 문체엔 특유의 편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단어들로 구성된 간결한 문장들은 피로감 없이 쉽게 읽히며, 무엇보다 그에겐 능숙한 어른처럼 보이려는 거만함이나 완고함이 없다. 무엇이든 함부로 단언하기보다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에 충실한 그의 문체는 여전히 세상을 궁금해하는 내면의 소년을 잃지 않았기에 더욱 매력적이다.
삶에 대한 모든 의문에 마치 항목별로 색인 작업을 해둔 것처럼 늘 준비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좋다. 매사에 지나친 확신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하지만, 자신이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하면 편견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끝이 비록 실망으로 끝날지라도 그것 또한 하나의 경험이 된다.
내가 하루키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가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관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루키는 설명적인 어조로 독자를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극적인 과장을 통해 억지로 교훈을 주려고도 않는다.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마다 결론지어 주는 말이나 글을 통해 위안을 받고 싶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알지 못하는 세계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모호하지 않은 것, 긍정이든 부정이든 결론지을 수 있는 어떤 것, 그것을 판단해서 특정 항목으로 분류해 넣을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하루키의 글은 그래서 불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살다 보면 분류하거나 정의할 수 없는 일들도 겪게 된다. 어떤 일들은 그저 그냥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럿의 가벼움이 여럿의 우연을 만나 어느 한순간 일어나버리는 일들은 아무리 특정 부분을 되돌리려 애써봐도 소용이 없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우연들을 남긴다.
사람이란 존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매일매일 반복하는 일상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를 어떤 경험들로 체득했을 때 비로소 겸손해지고, 그때 역설적인 의미로 평온해진다. 그래서 주장하지 않는 글들이, 판단에 앞서 그저 집요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글들이 의미 있어진다.
하루키의 글은 설득하려거나 답을 결론짓지 않는 부유의 상태이기 때문에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나 사실들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겐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와 반대인 성향의 사람들에겐 하루키의 글이 편안하다. 각자의 의견이나 취향은 분명해도 서로 주장하거나 강요하지 않으며 작가는 탐색한 것을 쓰고, 독자는 그저 읽기 때문이다. 영향을 주는 것이나 받는 것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성향들이다.
하루키의 글을(소설까지) 모두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도 특히 나 같은 사람은 참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무엇을 얻으려거나 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읽는 즐거움을 위해 읽기 때문이다. 찾으려는 노력 같은 건 아예 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루키도 이기적이다. 자신의 의식을 어떻게든 정의하려 애쓰지 않고, 쓸 수밖에 없으므로 계속 쓰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가 하는 달리기처럼 반복적으로 성실히 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각자의 무의식을 관찰할 수 있게 해준다. 하루키의 관찰법이 좋은 이유는 바로 그 적당한 거리감에 있다. 비유를 하자면 걷는 느낌과 비슷하다. 일정한 리듬, 편안한 보폭으로 낯선 것들을 관찰하지만 의식은 오히려 내 안의 깊은 곳으로 집중된다.
풀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스쳐 지나가는 바람, 마른 솔잎 냄새, 이름 모를 작은 들꽃들은 걷는 행위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그 한가운데서 직접 움직이지 않으면 체험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나의 순수한 의식들이 하루키의 일정한 리듬을 통해 열린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들, 대상이 불분명한 의아함들, 그러나 끝가지 알고 싶어 하는 조용한 근성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 낯선 것들을 읽음에도 혼란스럽지 않다. 지극히 단순한 단어들로 최대한 상세히 묘사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머리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하루키의 일정한 리듬 속에서 그냥 읽다 보면 생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들에 대한 집요함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무장해제하게 된다. 읽으며 나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소설도 있지만 하루키의 낯섦은 잃어버린 내 마음을 다시 찾게 해준다.
어쩌면 하루키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해결할 수 없었던 고통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어떤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이상의 생각을 하다 보면 오히려 단순해지기 때문이다. 결론지을 수 없는 모호함 자체를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불순물은 사라지고 일정한 리듬이 남겨진다. 그리고 그 리듬을 통해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마음을 조율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하루키가 존경스러운 것은 그의 이러한 태도에 있다. 그 호흡과도 같은 리듬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간 하루키의 글을 꽤 읽었음에도 이 책을 읽지 않았던 이유는 오직 제목의 느낌 때문이었다. 하루키의 글을 집중해서 읽을 당시엔 여러 힘든 일들을 겪고 난 후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라서 '세계의 끝'과 같은 제목엔 도무지 끌리질 않았었다. 하지만 최근에 읽었던 「작가란 무엇인가」의 인터뷰어는 하루키의 소설 중 제일 좋아하는 것으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꼽았고, 하루키 역시 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 역시 좋았다. 첫 문장부터 집중했고, 이야기 속으로 쉽게 녹아들었다. 아직 1권만 읽은 터라 1권의 여운과 2권의 기대감이 맞물리는, 어찌 보면 가장 만족스러운 때이긴 하지만 내 마음의 움직임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기적인 독자이자 이기적인 리뷰어인 것 같다. 이렇게 온통 사적인 감상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