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없이 고민하고, 내면화된 어떤 것은 이미 본질에 다가섰기에 단순히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고양된 어조로 설명하는 글이나 자신을 변명하듯 서문이 길어지는 글은 그래서 매력적이지 않다. 평소 좋아하는 글 역시 단숨에 본질로 뛰어들며 간결하고 여운이 남는 문장이다. 대화를 할 때도 설명하는 화법을 쓰는 사람에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인데, 사람을 알게 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스타일'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다는 이상은 말로써 자신을 설명하게 하지만 그냥 어떤 사람일 때는 그 본질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담담히 묘사해나가는 글을 읽는 게 가장 행복하다. 가령, 혼란스러운 상황을 표현하느라 자신이 소란스러워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고요히 묘사하는 와중에도 마음을 동요시킬 수 있는, 표현하려는 '의지'가 아닌 '의식'을 드러내는 사람의 말과 글을 좋아한다.



자신의 기준안에서 옳기 위해 방어적인 태도보다는 본질에 투명해지려는 용기 있는 사람들이 좋다. 그러므로 나에게 가장 좋은 소설은 읽는 동안 판단하게 하지 않고, 읽는다는 행위조차 잊게 만들어 주는 글이다. 다 읽고 나서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설사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를지라도 심상에 묵직한 어떤 것, 감상과 직관을 남겨놓는다. 이런 글은 두고두고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아도 나의 일부에 기록되는 것 같다.



이런 성향으로 「작가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 나의 감상은 크게 세 가지였다. 생각을 자극해주는 분들, 숙연해지는 존경심을 느끼게 해주는 분들, 그리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좋았던 분들. 그중에서 그냥 이유 없이 좋았던 인터뷰의 일부를 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어는 하루키에게 그가 집착하는 생각을 강박적으로 쓰고 또 쓰는 것의 어떤 특정들에 대해 동의하는지를 묻는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런 주제를 반복해서 쓰는지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제 주인공들은 뭔가를 잃었어요. 그래서 잃어버린 부분을 계속 찾아다닙니다. 마치 성배나 필립 말로처럼요. 그 주제가 제 이야기들의 추동력입니다. 잃어버리고 찾아다니고, 발견하기. 그러고 나면 세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인 실망이 기다리고 있지요. ˝

 

 

 

레이먼드 카버의 인터뷰어가 그에게 단편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묻자 카버는 말한다.



˝아이들을 키우고, 글을 쓰려고 애쓰면서 제가 빨리 끝낼 수 있는 걸 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답니다. 한 권에 2~3년이 걸리는 소설을 쓸 방법이 없었어요. 다음 해나 3년 후가 아니라 당장 보수를 지급받을 수 있는 것을 써야 했습니다. ˝



인터뷰어는 카버에게 그의 작품이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는다.



˝소설은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소설은 단지 그것에서 얻는 강렬한 즐거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뭔가 지속적이고 오래가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읽는 데서 오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지요.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계속해서 불타오르는 이런 불꽃을 쏘아 올리는 어떤 것이랍니다. ˝



나는 이들의 변명 없는 투명한 답변들이 좋다. 자신들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설명이라는 것은 이미 하나의 관점을 통해 자신을 해석하려는 시도이고, 종종 우리는 스스로를 설명함으로 특정한 이미지로 고착화하려 한다. 하지만 실상 우리가 자신에 대해 가장 명확히 아는 건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얼 원하는지, 아닌지 정도가 아닐까?



「수전 손택의 말」에서 손택은 이야기한다.



˝제가 보기에 좋은 글쓰기라는 건 은유의 정화예요. 쓸데없는 걸 다 벗어던진 적나라한 특질 때문에 저는 베케트와 카프카에게 매력을 느껴요. ˝



영원히 끝나지 않는 의문을 작가는 쓰는 행위를 통해 정화하고, 독자들은 그것을 읽으며 정화하고, 리뷰어는 감상을 남김으로 자신의 정화를 내면화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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