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이 책을 읽을 땐 밥 딜런을 들으면 좋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2권을 읽다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그 부분을 읽기 전까지 밥 말리를 듣고 있었다. 물론 착각 때문이었지만 나쁘지 않은 선곡이었다.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노래에 집중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1985년에 출간된 책으로 이 소설을 해설한 단행본만 일고여덟 권에 달하고, 기타 관련 서적들도 십여 권이 넘는다고 한다.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은 직접이든, 간접이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여러 평론가들의 지배적인 평가일 만큼 하루키의 세계관이나 문학관이 녹아든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루키가 몸을 단련하겠다는 결심으로 42킬로미터의 마라톤을 거뜬히 뛸 수 있게 된 후 처음으로 쓴 소설이라고도 한다.



여러 권의 해설집이 나올 정도로 내용이나 결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을 하게 만들었던 소설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그런 해석적인 부분보다는 하루키를 좀 더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더 정확히는 하루키의 글에 이끌렸던 나에 대한 이해인 것 같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특별한 기억으로도 떠오를 것 같다. 하루키의 책을 읽던 중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던 소설이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감정 기복이 심하질 않다. 어떤 감정이든 정화한 후에 드러내는 편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밋밋하고 한편으론 그래서 믿음이 간다. 그렇게 담담히 묘사해가는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어떤 부분에서 울컥하고 말았다. 비록 짧게 지나가는 마른 눈물이었지만 가슴에는 물리적인 통증이 순간적으로 느껴졌었다. 근원적인 슬픔이자 애처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착각 덕분이긴 해도 밥 딜런과 밥 말리의 아련한 음색과 함께 떠올려질 담담한 슬픔이, 읽는 내내 이어지던 깊은 생각들이 이 책을 추억하게 할 것 같다..


 

사람들은 그것을 절망이라고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절망인지도 모른다.

투르게네프라면 환멸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라면 지옥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서머셋 몸이라면 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나 자신인 것이다. (2권 p247)

확실히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은 나 자신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내 안에는 잃어버린 것들의 앙금이 일몰 뒤의 빛처럼 남아 있어 나를 지금까지 살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p351)

"알료샤는 많은 것을 터득하고 있어.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그 소설을 읽었을 때 난 꽤나 의문스러웠어. 아주 불행한 인생을 총체적으로 축복한다는 게 가능할까 하고. " (p345)

- 소설 속 화자들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대해 대화하는 부분 -

햇빛이 앞 유리창 창문으로 비쳐들어와 나를 빛 속에 감싸고 있었다. 눈을 감자 그 빛이 내 눈꺼풀을 따뜻하게 내리쬐는 것이 느껴졌다.

햇빛이 그 멀고 먼 길을 더듬어 이 자그마한 혹성에 도착해서 그 힘의 한 자락을 사용해 내 눈꺼풀을 따뜻하게 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야릇한 감동이 느껴졌다.

우주의 섭리는 내 눈꺼풀 하나조차 하찮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나는 알료샤 카라마조프의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정된 인생에는 한정된 축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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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2015-06-02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하루키의 책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됐네요. 저도 읽었는데 왠지 하루키다운 소설이라고 생각했어요.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읽은 기억이 납니다^^

물고기자리 2015-06-02 10:54   좋아요 0 | URL
네~ 그렇다고 하네요 ㅎ 하루키도 이 책을 좋아한다고 해요^^

초딩 2015-07-07 14: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위 해설들을 저도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 기복이 심하지 않은 캐릭터들 그래서 담담한 시선들 - 하지만 독특한 (위트라기에는 조금 무거운) - 을 활자로 담은 하루키의 책이 좋은가 봅니다. :)

물고기자리 2015-07-07 15:26   좋아요 1 | URL
제가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기에 앞서 그냥 이유 없이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분이 하루키예요 ㅎ 감동을 받고 싶다거나 배움을 얻겠다는 목적의식 없이 그저 읽다 보면 영감을 얻게 되고, 마음에 쉼을 준달까요..^^

초딩 2015-07-07 15:27   좋아요 1 | URL
비슷한 이유로 요즘 로맹 가리에게 큰 흥미가 가고 있어요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