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들을 때면 청각을 통해서만 듣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진동을 통해 몸과 소리가 서로 공명하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하물며 손에 쥔 스마트폰으로 음원을 듣노라면 음악의 진동이 손으로도 전해져온다. 그래서 가끔씩은 비트나 베이스 음이 강한 음악을 손으로(?) 들어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을 때에도 문장이 온몸으로 휘감겨오는 느낌이 좋다. 단지 눈으로만 좇는 것이 아니라 문장 속으로 고요히 잠기는 기분 같은 거 말이다.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는 건 음악을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불필요한 끈적임 없이 담담하고 서정적인 문장의 리듬이 몸을 감싸오는 것 같다. 그런데 요 네스뵈의 소설은 잔혹할 땐 굉장히 잔혹한 미스터리 장르이고, 그래서 더 역설적인 매력이 있다. 음악적인 리듬과 미스터리의 만남은 아름다움과 어둠이 동시에 공존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더더욱 강렬히 대비시켜주는 것과 같다. 따뜻하지만 냉혹하고, 두렵지만 믿게 된다. 완벽한 선도, 완벽한 악도 없이 어둠과 밝음이 서로를 필요로 하며 하모니를 이루어 간다.
요 네스뵈는 실제로 인기 뮤지션이기도 하단다. 어떤 음악을 하는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소설과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음악을 좋아하거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의 글엔 음악이 흐르는 걸 느낀다. 캐릭터의 목소리가 멀리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 귀에 직접 속삭이는 것 같다. 이런 작가들은 캐릭터를 잘 만들어 낸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서사에 뛰어난 작가들도 있지만 캐릭터를 끝까지 이끌고 가는 작가들에겐 캐릭터가 이미 하나의 스토리가 된다. 음악에 존재하는 리듬처럼 캐릭터의 목소리를 집중력 있게 유지해 나가기 때문이다.
요 네스뵈의 「아들」은 내 책장에서 꽤 오랫동안 잠자고 있었다. 나에게 주는 언젠가의 선물로 아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성」을 읽을 즈음부터 이어지던 무력감은 쉽게 떨쳐지질 않았었다. 나는 정신적인 에너지가 소모될 때마다 가야 할 곳을, 가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깨어날 때까지 그곳에 도착하지 못하는 내용의 꿈을 꾸고는 한다. 이럴 땐 대개 힐링이 되는 좋은 글, 착한 글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간의 극한적 상황을 다루는 글을 더 선호하므로 요 네스뵈를 선택했다.
육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 왜 이리 얇게 느껴지는지, 최대한 천천히 읽었는데도 너무 빨리 읽는 것은 아닌가 싶어 중간중간 멈추고 딴 일을 하기도 했다. '해리 홀레'도 그렇지만 요 네스뵈의 주인공에겐 마음을 파고드는 무언가가 있다. 모성본능을 자극한다고 할까.. 보살펴주고 싶고, 이야길 들어주고 싶고, 나도 아무 말이든 계속해서 하고 싶어진다. 나이가 많든 적든 소년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아들」의 주인공 소니는 대놓고 '소년'이라 불린다.
그런데 바로 그 부분 때문에 믿게 된다. 결정적인 순간이 되면 재지 않고, 자신의 무의식이 가리키는 옳음을 향해 몸을 사리질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기계처럼 완벽하고 철저한 캐릭터보단 냉기와 온기가 공존하며 감성과 생각이 동시에 제 할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 좋아하게 된다. 상황을 통제하기보단 모든 감각을 열어 놓고 있어, 자신들도 잘 다치지만 강한 캐릭터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요 네스뵈는 '해리 홀레' 시리즈로 유명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유명 뮤지션이기도, 저널리스트, 경제학자이기도 하단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엔 단지 음악만 흐르는 것이 아니다. 오슬로의 어두운 실상들, 인간성의 면면들이 설명이 아닌 묘사를 통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상황이 어떻게 인간을 움직여 나가는지를 묘사해낸다. 그런 와중에도 자신의 한계를 알고, 주저하고 갈등하지만 그 선을 넘어보자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모든 음들이 하나의 음악처럼, 파악하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들려온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조금이라도 평온하게 만들기 위해 소설에서나마 비극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
실제로 요 네스뵈의 이 말은 꽤 효력이 있었다. 지금까지 요 네스뵈의 소설을 읽고서 최악의 기분이 되었던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어떤 색의 감정은 비슷한 색으로 해소되는 걸 느낀다. 인간의 잔악함과 나약함, 선한 의지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상황마다의 선택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 삶엔 동화 같은 환상은 없다는 걸,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걸 알지만 다시 한 번의 그 깨달음으로 오히려 평온해지고 그럭저럭 살아가게 되니 말이다.
"악은 간단하다. 어떤 '나쁜' 일을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어서 한 것뿐이다. "
이는 최근에 읽은 「정희진처럼 읽기」의 문장 중 하나이다. 인과론은 원인을 규명하여 문제를 개선하는 데 목적이 있지만 악에는 애초에 원인은 없을뿐더러 있다 해도 대단히 복합적이라고 말한다. 혹 인과 관계가 밝혀진다 하더라도 그 뒤에는 "왜 하필 나지?"라는 더 치명적인 의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란다. 악에는 의도가 아닌 의지가 있을 뿐이라고 정희진은 말한다.
나는 늘 긍정적인 사람들은 오히려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완전한 긍정은 완전한 부정이 될 수도 있고, 일종의 회피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어둡고 우울한 기운을 주변에 전파하는 사람들 역시 불편한 게 사실이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수용하고 자신을 과신하지도, 자학하지도 않으며 늘 내게 묻고 또 물으며 살아가는 게 좋다. 그러다 선택의 순간이 오면 주저하지 않고 순발력 있게 나의 옳음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장르소설의 미덕은 독자를 희롱하는 트릭이 아닌 마지막 한 조각까지 제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퍼즐의 미학에 있다고 생각한다. 요 네스뵈의 소설엔 그런 미덕이 있다. 유희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누군가가 강요당하거나 선택했던 그 조각들에 의해 맞추어져 가는 퍼즐 같은 인생을 관조하게 되니 말이다. 동시에 들려오는 모든 음들이 하나의 음악을 향해 연주되고 있다. 잔인한 휴식이라고 할까, 요 네스뵈의 습기 없는 서정성을 그래서 좋아한다..
"모든 아들은 언젠가 자기가 아버지처럼 될 거라고 믿죠. 안 그래요? 그래서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봤을 때 그렇게 실망하는 거예요. 자신의 결함, 미래의 패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 (p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