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백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고르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브라운 신부' 나 '체스터튼' 아니라 '추리문학의 고전' 이라는 문구였다. 사실 이 책을 고를 때까지만 해도 브라운 신부나 체스터튼의 이름은 몇 차례 스쳐들었을 뿐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빠져들어가면서 단지 '고전' 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는 이유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감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 없다. 추리소설의 태를 취하고 있긴하지만, 현대의 독자들이 바라는 극적 추리 기법이나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신부가 나와 '이건 이런겁니다' 하고 설명하는 정도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고전이기 때문에 근간을 이루는 소설에서 나오는 탄탄한 구성이나 증거의 치밀함, 극적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대에 추리소설의 근간이라고 설명되는 애드거 앨런 포나 코난도일의 소설에서 추리소설의 맛을 볼 수 있다면 체스터튼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단순한 사건록이나 야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이라고 잘못 알려진 것만 빼면 그리 나쁜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추리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이 소설에서는 다른 재밌는 요소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브라운 신부의 누추한 차림이나, 여타 다른 탐정에서 느낄 수 없는 어리숙함. 게다가 너무나 순순히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는 범죄자들. 적어도 이 소설에 나오는 범인들은 키 작은 브라운 신부를 고려해서인지 사건이 밝혀진 다음 반항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물론 플랑보라는 힘 좋은 탐정이 함께하기 때문에 종종 힘을 써야 하는 일은 그가 다 처리하곤한다.) 결국 남는 것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미가 아닐까. 작가가 신부를 사건을 풀어가는 해결사로 등장시킨 것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명석한 탐정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작가는 신부로 하여금 죄와 인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라운 신부는 사건을 해결하긴 하지만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이 용서를 베푸는 과용을 부리지 않는다. 그저 하느님의 생각되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할 뿐이다. 그저 하늘에 맡기고 자신은 진실에 가까이 가는 데에만 힘을 다할 뿐이다. 

  이 소설은 극적인 구성이나 재밌는 에피소드는 등장하지 않는다. 각각이 어쩌면 교훈적인 내용으로 독자들을 감화시키려는 듯 찬찬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이 일어나는 자리에 신부가 불리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있는 곳에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은 사건의 우연성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가 그리 능력있는 탐정이 아니라는 방증도 된다. 이는 독자들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누구도 반기지는 않지만 항상 그 자리에서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는 그의 모습은 탐정이라기 보다는 성직자에 더 가깝다. 부디 이 책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면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표지에 있는 '추리소설' 이라는 문구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재밌는 에피소드와 함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을 원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매번 '역겹다' 라는 말로 서평을 쓰곤 했던 그녀의 소설에 다시 손을 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역겹다고 해서 그녀의 소설을 거른 적은 없다. 역겹다는 것이 곧 싫다는 것의 표현은 아니다. 무라 정의할 수 없지만 노통의 매력에 끌린다고 할까. 아니면 마조히스트적인 또 다른 나가 그녀 소설의 또다른 '역겨움' 을 찾아내고 즐기려 하는 것일까. '앙테 크리스타' 의 출간 소식을 듣고 나서 들었던 생각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분명히 노통류의 소설임에 분명한데 내가 또 봐야 할까? 하지만 또다른 역겨움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들고 말았다.



  역시 노통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16살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여지껏의 노통이 보여줬던 소설에서와 같이 적(適)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전의 적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다른 소설에서 더 어리거나 이미 사회인이 된 주인공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단순히 나이에 따른 차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적의 처음 등장이 다르다. 하지만 '나에게만 적으로 느껴지는 현실' 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앙테크리스타에서 적은 아군으로 가장해 다가온다. 적의 의도된 접근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가 악의 화신을 찾아나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만났고, 적은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은 만인의 적은 아니다. 오로지 하나의 희생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다. 누가 먼저 파멸하는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둘의 신경전은 독자들의 신경을 자극한다.



  이 부분에서 노통의 전매특허인 '역겨움의 미학' 이 잘 나타난다. 물론 역겨움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했지만 그녀의 소설에서 역겨움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코묻은 휴지를 다시 펼쳐 보는 어린 아이에 대한 역겨움, 언변으로 듣는이로 하여금 구역이 나게 만드는 지적인 역겨움, 작가 자신을 죽여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역겨움.... 이 소설에서도 형태는 달리하지만 역겨움은 존재한다.  아마 그 역겨움은 적이 나를 괴롭힐 때 느끼는 희열이 클수록 독자들은 심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블랑슈가 크리스타에 끊임없이 당할 때 크리스타의 머리를 잡아채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되고, 가족들이 결국 블랑슈보다 크리스타에 마음을 뺏겨버릴 때는 책에 대고 소리라도 질러버리고 싶어진다. 크리스타의 행동이 잔인하다기 보단 역겨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결론을 향해 끊임없이 책장은 넘어간다. 역겨움을 이기기 위해... 짜릿한 복수가 이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블랑슈의 복수도 어떤 면에서 보면 상대를 괴롭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대가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절묘하게 파고들어가 정곡을 찌르는 복수. 하지만 이 부분에서 쾌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여전히 무언가 거북하다. '그게다야?' 라는 생각과 함께 '이런 방법을 쓰면 해결이 되는걸까' 라는 생각이 교차한다. 하지만 무언가 응어리진 것이 풀리지 않음은 부정할 수 없다. 



  분명 크리스타는 블랑슈에 있어 최고의 적이었다. 자신의 모든 영역을 침범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블랑슈의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크리스타라고 할 수 있다. 키스를 알게 해 주었고, 자신의 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 주었다. 어쩌면 크리스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멜리 노통이 잊을만하면 꺼내들던 '또 다른 나' , 크리스타가 블랑슈의 또 다른 나는 아니었을까. 16살의 사춘기에 찾아온 정신적 육체적인 혼란을 이기는 과정에서 내가 생각했던 나와 다른 또 다른 나를 발견했을 때의 서먹함.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하는 불합리함. 결국 적이 나를 이기고,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결국엔 습관처럼 적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자신.



  이러한 과정은 결코 아름다울 수도 없고, 통쾌한 결말을 기대할 수도 없다. 크리스타가 '또 다른 나' 가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블랑슈는 그녀를 통해 성장했다. 다른 누군가를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 글의 내용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숙제는 성장을 위해 나를 넘어서는 데에 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는 꼴찌에 대한 인식이 낙오자라는 하나의 단어로 대체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 인식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수면 위로 올라와 재평가 받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만큼 사회가 많이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1등이 아닌 나머지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게 꼴찌 열풍이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1등 위주의 사회였다. 극단적으로 꼴찌만을 언급 했을 뿐이지, 2등 이하 순위권 밖은 꼴찌나 다름없는 대우를 감수해야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 앞에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요즘은 희망을 주는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야말로 꼴찌에게 희망을 주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 중심에 있다. 최근에는 영화까지 개봉해서 그 위력을 과시한 바 있다. 작가를 비롯한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놀랐을 만큼 그 열풍은 대단했다. 실제 주인공이 저녁 뉴스에 소개되는가 하면, 인터넷에서는 꼴찌 클럽이라는 내용을 알 수 없는 클럽들도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의 꼴찌 열풍이 과연 모든 사람들에 눈을 돌리는 여유로운 자세에서 나온 것일까.

 

 원래의 ‘꼴찌에게 희망을’ 이라는 생각은 엘리트주의의 부정이나 1등 지향주의를 배타하는 데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서열화 된 세상에 대한 반발, 단편적인 평가 이면에 감춰진 다른 능력을 발견할 수 없는 지금의 제도들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의 화살은 그러한 제도를 만든 사람보다는 그 제도를 용케 뚫고 나온 엘리트들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았다. 몇 점 차이나지 않는 수능 점수로 인생이 결정되는 대학입시, 영어라는 기준 하나에 취직의 당락이 바뀌는 현실. 그러한 기준에 맞추지 못한 사람들은 낙오자라는 평가를 받으면 좌절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그런 사람들인 만큼 다른 방식으로의 평가를 원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반적인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나름의 기준으로 재평가 받고 있는 꼴찌들에 포커스가 맞춰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과정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점점 난해해지는 대학입시, 아무리 노력해도 뚫릴 생각을 하지 않는 취업문. 이런 상황에서 한두번쯤 좌절을 맞본 사람은 그런 희망가에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선발된 소수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꼴찌라는 일종의 욕구 불만 창구를 만든 셈이다. 자기보다 더 못한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나마 내가 낫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꼴찌 열풍’ 의 정도에 다소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단순한 시대적 흐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파급효과가 무섭다. 그저 꼴찌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받고 심지어 사랑을 받기도 한다. 그 이면에 숨겨진 노력이나 꾸준함과는 상관없이 그저 꼴찌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주객전도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꼴찌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셈이 된 것이다.  ‘난 이거 하면 되니까, 다른 것은 포기해도 돼.’ 꼴찌 열풍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정당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당화의 이면에는 적잖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과연 그 사람이 노력이란 것이 수반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분명 꼴찌에 대해 어김없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노력과 과정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꼴찌를 하곤 있지만 그 꾸준함, 열정이 다른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데서 꼴찌의 정당성을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저 꼴찌이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지금까지 사랑을 받는 것은 그들이 꼴찌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끝까지 싸워주었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하면서 팬들을 맞이하는 프로였다면 애초에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팬들은 이미 그들을 떠난 이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등만을 기억하는 현실이 불공정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1등은 1등으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적어도 1등이 되기 위해 흘려야했던 땀방울에 대한 의미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노력이란 것은 1등이든 꼴찌든 모두에게 값진 것이다. 1등의 노력과 꼴찌의 노력이 다를 수 없고, 그 의미 또한 다르게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꼴찌 치켜세우기는 다소 위험해 보인다. 자칫 1등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꼴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 이면에 있는 굴하지 않는 자세, 끊임없는 노력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등은 1등으로서의 가치가, 꼴찌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평양 횡단 특급
이영수(듀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평양 횡단 특급' 에 수록되어 있는 소설 중 '첼로' 에 관한 감상입니다...^^ 

 

 

 

 

Law 1.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며 인간의 위험을 간과해도 안 된다


Law 2. 법칙 1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Law 3. 법칙 1조와 법칙 2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미래에 인간형 로봇이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해 진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봇이 인간처럼 지능을 갖게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로봇은 더 이상 60-70년대 SF에서나 나오는 얘기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지능의 습득을 넘어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계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는 부정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하다. 이른바 간단한 기쁨이나 슬픔 정도는 쉽게 나타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 이를테면 사랑이라든가 증오와 같은 수치화될 수 없는 것들을 나타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결국 이러한 요소들이 로봇의 인간화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1940년 아시모프가 ‘로봇의 3원칙’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로봇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보조자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로봇이 인공지능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로봇의 법칙에 따르도록 프로그램화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60 여년을 훌쩍 넘어버린 이 법칙은 각종 매체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다. 이제까지 이 법칙은 부정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로봇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소조항으로만 이루어진 이 법칙이 지금까지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내려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인간들이 이 법칙을 수용했다는 뜻도 될 것이다. 결국 로봇이라는 것은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에 불과하며, 하위 개념에 속하는 종적관계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간의 작품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데에 더 익숙해져 있다. 지능을 가진 로봇은 인간과 동등한 관계를 원할 것이고, 인간은 당연히 이를 거부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프로그램화된 3원칙에 의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인간은 이러한 상상을 즐겨하면서 로봇 사회에 대한 공격적인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작품들은 3원칙의 논리적 허점을 이용한 로봇의 공격만을 염두에 둘 뿐, 3원칙을 부정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결국 인간은 로봇보다 더 높은 위치라는 인식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첼로에서 듀나도 3가지 원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로봇 사회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뿐이다. 하지만 듀나는 로봇 사회를 밝게 그리진 않는다. 부정적인 시각이 한층 가미된 묘사를 즐겨한다. 부정적이라는 의미는 지극히 로봇 관점에서의 (혹은 로봇 제조회사의 관점에서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로봇도 인간도 누가 승자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상황이 전개된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 소설에서는 분명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로봇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은 분명 사람에게 익숙한 존재지만 사람들은 로봇을 꺼린다. 결국 초창기 이후 로봇은 인간 사회와 멀어졌다는 전제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아니, 어쩌면 한동안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기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들이 로봇을 거부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인공지능 로봇의 출현이 상당기간 지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로봇만의 사회는 ‘망하지 않았다’ 는 것 또한 듀나의 상상 속에서 나온 설정이다. 분명 인간에게는 환영받지 못하지만 로봇만의 세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소수이긴 하지만 인간과 공존하려는 움직임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하지만 로봇의 시대는 한 번 지나갔고,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로봇을 멀리한다. 로봇이 존재하는 줄은 알지만 그들을 이용하려고도 그렇다고 그들을 없애버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격리된 하나의 기계 이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여타 다른 작품과 달리 로봇과 쉽게 부딪칠 수 없는 ‘로봇 사회’ 에서의 사랑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결국 질문은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까? 아니, 그 이전에,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이모와 트린과의 사랑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모는 트린과 사랑에 빠져 온갖 애정을 다 쏟아붓지만 정작 나중에는 과연 트린이 자신을 사랑했는가를 의심하게 된다. (사실 이 과정이 아이러니컬함은 부정할 수 없다. 트린과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은 둘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로봇의 출현에 의한 것으로 표현된다. 결국 로나의 등장은 이모가 과연 내가 사랑받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준 계기가 된다. ) 바로 1법칙에 의해서 인간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척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과연 로봇이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이모는 진정 사람과 나누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나누었다고 할 수 있을까. 듀나는 정확한 결론을 내지는 않고 있지만 ‘사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독자에게 심어주고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결국 듀나는 로봇도 인간의 감정을 지니며, 인간 감정의 정수인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첼로는 다분히 이모 중심, 그러니까 인간 중심으로 이야기가 씌여진 면이 있다. 이모의 사랑이 절대적이었고, 트린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트린의 감정이 어땠는지에 관한 것은 글의 마지막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독자들은 그저 로봇도 약간의 애정 정도는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모의 일방통행적인 사랑에도 로봇의 법칙들을 갖대다면 상황이 간단하면서도 복잡해진다. 트린이 이모를 사랑했는가? 의 해답은 , 트린이 제 1 법칙의 수행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만들어 냈는가? 라는 의문과도 일치한다. 결국 로봇에게 있어 복잡 미묘한 감정은 생길 수 있는가? 그것이 기본적인 로봇 법칙들을 깨고 성립 가능할 것인가? 결국 종국의 의문은 이렇게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시점에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리석다. 결국 로봇 시대라는 것이 겪어봐야 아는 것이고, 다가올 미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예측할 순 없다. 결국 수많은 상상력이 허구 아닌 허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 이다. 그저 단순히 로봇이 있어 편리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은 우리와 같은 지능을 지닌 하나의 개체가 만들어지는 것 이상의 의미, 그러니까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경쟁자가 등장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 매력적인 로봇이 나의 아내를 유혹한다면? 그래서 나의 위치가 불분명해진다면? 실로 이러한 것이 진정한 위협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로봇이 감정을 가지는 것에 큰 반감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로봇과의 융화는 결국 전쟁 이상의 파괴력을 지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로봇 사회라는 것이 도래한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 사회에 미래의 로봇이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가 정답이리라. 하지만 적어도 모두 살아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벌써부터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물원 킨트
배수아 지음 / 이가서 / 2002년 10월
평점 :
품절



소설을 읽으면서 적잖이 당황했던 것이 사실이다. 소설 자체가 난해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소설은 장편이지만 빠른 시간 안에 읽을 수 있을 만큼 쉬웠다. 하지만 '다 읽었다'라는 것 자체로는 무엇인가 부족했다. 그저 하나의 스토리를 소화한 것일 뿐, 작가가 말하고 싶어 하는 바를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소설에서 독자의 '왜'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없다. 동물원 킨트라는 생소한 개념을 소개하면서도 작가는 불친절하게 무엇인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곁들일 뿐, 그러한 것이 왜 생겼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서 독자들은 혼란을 겪지 않나 싶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작가의 의도를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답이라고 할 순 없겠지만 '이방인' 이 그 해답을 푸는 열쇠가 될 듯싶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여기저기에서 나타낸다.  이방인으로서 그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한 사람의 모습이 동물원과 동일시하려는 모습으로 표출된 것이 아닐까. 자신이 동물원이 되어서 사람들을 맞이하는 그러한 모습을 이방인의 생활방식과 동일시한 것은 아닐까.




 작가가 성을 의도적으로 삭제한 이유도 그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안에 있는 원숭이를 볼 때, 우리가 그들의 성별을 생각하던가? 그저 다 같은 원숭이 일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결국 이방인의 생활이라는 것이 동물원의 그것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동물원 안에 있지만 동물원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인식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결국 다른 무의미한 조건은 필요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와 소설 속의 '나'를 동일시하고 있었다. 오히려 작가가 제시한 놓은 무성의 주인공이 소설 속에서 '나'의 성을 찾게 헤매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