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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나합격 대기환경기사 필기 + 무료동영상 - 무료동영상 강의 제공 / 네이버 카페 '나합격 수험생 지원센터' 운영 / 부록 : 'FINAL 최종 모의고사' + '합격족보+공식정리'
김현우 지음 / 삼원북스(수험서)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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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샀습니다. 교재 구성도 좋지만 무엇보다 카페에서 무료 강의 들을 수 있어서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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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미래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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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고르면서 처음으로 생각한 것이 일반적으로 '프랑켄슈타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영화나 만화로 접한 프랑켄슈타인의 이미지는 '무서운 괴물' 그 자체였다. 책을 손에 쥐면서도 나는 그러한 공포를 맛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을 정도의 섬뜩한 공포 (지금에 와서는 이것을 공포라기 보다는 '무서움' 이라고 말하고 싶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공포가 아니라는 것을 나에게 알려준 소설이 프랑켄슈타인이다.) 그걸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러한 무서움은 느낄 수 없다. 괴물에 대한 자세한 묘사도 없거니와 살육을 할 때의 자세한 묘사도 심지어는 공포의 질린 표정 하나 제대로 묘사한 부분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이상으로 공포스럽다. 왜일까?

그것은 집요하리만치 계속되는 심리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눈으로 보이는 무서움이란 눈에 그 형체가 보이지 않으면 없어지는 것 아닌가? 하지만 매리 샐리는 그 이상의 공포를 독자에게 선사하고 있는 듯 하다. 괴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프랑켄슈타인이 느끼는 갈등, 괴물의 요구를 듣고 가족의 안위와 자신의 이득 사이에서의 갈등, 이 모든 것을 그녀의 섬세한 필체에서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책에서는 종종 시점을 바꿔가며 사건을 전개함으로써 왜 괴물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을 부각시킨다. 만약 괴물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수없이 많은 해석을 낳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은 존재치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프랑켄슈타인의 관점에서 괴물은 언제나 자기 가족을 위협하는 악한이다. 하지만 괴물의 관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을 그렇게 만들고도 책임지지 않는 '배신자' 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시점 (사실 월튼의 시점이 나오지만 사건 전개상 그리 중요한 역활은 아니라고 본다.) 을 이용하면서 매리 샐리는 독자로 하여금 두 상황을 모두 이해시키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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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옷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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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적의 화장법'을 읽고 노통에 반해서 소위 말하는 '노통 뽀개기'를 하고 있다. 지금 이 소설이 5번째 읽는 노통의 소설이니 감히 조금이나마 노통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노통의 소설을 읽어오면서 지켜온 철칙하나가 '상상하지 말자' 였다. 그만큼 노통의 소설은 그 상상력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거기에 특유의 잔인함과 유머가 뒤섞여 있는 필체는 독자로 하여금 감히 앞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 있어서 이 책은 그 정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듯 싶다. 노통 특유의 화법이 고스란히 (거기다 책의 내용 대부분이 대화다. 의도적인 것이겠지만 이만큼 노통의 소설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녹아있는데다, 그 상상력은 독자로 하여금 거듭 자신의 진가를 확인해 주려는 듯 예기치 못한 구석에서 발휘되곤 한다.

하지만 다분히 의도적인 이러한 방식에서 오히려 그 효과가 반감되지 않았나 싶다. 노통은 자신의 잔인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필체를 마음껏 발휘하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내세울 수 있었지만 독자는 역겨움을 느낄만큼의 부담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노통이 아직은 자신만의 색깔을 제대로 내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상상력과 위트가 넘치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 이정도로 잘났어.' 라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필체는 경험의 부족에서 나오지 않나 싶다. 아직은 독자에게 더 의지하고 독자의 해석을 기대하는 능력이 부족하는 생각이다.

이러한 한계가 있지만 이 소설이 가지는 매력은 충분하다. 노통의 기민한 상상력은 언제나 독자의 머리에 생명수와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꼭 폼페이의 멸망이 조작이라는 의혹에 경탄하지 않더라도 책 구석구석에서 번뜩이는 상상력은 독자의 혀를 내두르게 한다. 하지만 그 상상력 또한 너무 과하게 분출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과학적인 접근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앞 뒤 없이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는 식의 소설은 보기 민망할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노통이 이 소설에서 미래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현재의 모습을 비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현대에 터부시 되었던 것이 표면화 되는 과정에 대한 묘사가 많이 보이는 것도 한 예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중심 생각이 되기에는 '이길려고 하는 대화' 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노통은 아직 발전 중인 작가다. 물론 그녀의 책은 계속 나올 것이고 지금의 발전 단계라면 분명히 그녀는 한 시대를 가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완벽하고 좀 더 고상한(이건 작가가 바라는 이상적인 작가상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쓰려면 독자부터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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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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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통의 책을 여러 권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다음에 노통의 책을 읽을 때는 최대한 나의 생활에 빗대어보자' 였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매우 단순한 듯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난해함이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죠. 그런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노통에 대한 열렬한 팬이 생기는가 하면 노통의 책을 다시는 읽지 않겠다는 무리가 생기기도 하는구나 싶더군요. 물론 저는 전자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가끔 노통의 소설을 읽으면서 '역겹다' 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표현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딱 맞는 표현을 찾을 수가 없어서였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겠군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노통의 책을 읽을 때는 -쉽게 생각하기 위해- 개인적인 생활에 노통의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생활을 빗댈 수밖에 없더군요. 그게 짧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어기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믿는 입장에서 神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얘기는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갔습니다. (작가가 얘기하려는 게 거기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3살까지의 저의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애썼습니다. 물론 전혀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인간이 되고 나서 유일한 기억은 세 살 때의 것이었습니다. 노통도 그러한 기억에 기초해서 이 소설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3살 이전의 사건은 일종의 인간이 되기 위한 과도기가 아닐까 하고 말이죠.

실제로 아이들은 자궁에서 그 지식이 극에 달하게 발달하며, 그 지식은 인간 세계에 융화되어 가는 중에 쇠퇴한다는 이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종의 본능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는 일련의 활동들. 예를 들어 누가 나의 부모이고 (혹은 내가 안전하게 업힐 수 있는 사람이고) 어느 걸 먹으면 되고 하는 것들은 오히려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고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축적된 것이란 얘기죠. 물론 이 이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증명될 이유도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노통이 생각한 것이 정확하게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분명한 것은 노통은 3살 이전의 세계를 신의 세계로 간주하고 인간 세계에 융화되어 가는 것을 그렸단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파이프 혹은 호스로 표현되는 것인데, 소녀가 2살까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시기는 (신이었던 시기) 파이프로 표현되었고, 잉어의 입은 호스로 표현되었죠. 책의 첫부분에도 '호스는 파이프의 유연한 형태다.' 라고 전제하고 있구요. 이 부분은 결국 (그리도 혐오하는) 붕어와 소녀는 동일 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으며, 파이프에서 호스가 되어가는 과정이 3살에서 4살로 넘어가는 '그 시기'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녀는 잉어를 극도로 싫어하지만 결국은 잉어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구요.

결국 (비록 매우 어린 나이긴 하지만) 일종의 성장통을 겪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그린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단지 좀 더 독특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사용했을 뿐. 생각해 보면 3살 이전의 나의 생각이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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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파괴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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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을 읽은 이후 아멜리 노통의 책을 다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적의 화장법' 이라는 책은 소재가 매우 독특하긴 했지만, 그만큼 많이 알려진 소재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 쓰는 능력 -무어라 꼭 말할 수는 없지만 혹자는 잔인함과 냉소가 그 기본에 있다고 한다- 에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단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이후에 '오후 네시' 를 읽었고, '사랑의 파괴'가 세 번 째고 접한 노통의 책이다.

처음 노통의 책을 읽을 때의 확연한 (어떻게 보면 한 권의 책으로 작가를 평가하는 우를 범한 것일수도 있지만...) 느낌과는 달리 책을 읽어가면서 점점 알 수 없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각각의 책들이 다른 구성과 다른 소재를 쓰고 있으면서도 깊이 생각해보면 결코 다른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느낌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이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노통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의 지적 한계이리라...)

'사랑의 파괴' 역시 시작부터 매우 난해하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미 노통의 책을 읽겠다는 생각을 했을 때부터 예상 가능한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쉬운 단어로만 씌여진 소설이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 끝도 없이 어렵다. 중국에 사는 외교관의 자녀로서 객관적이면서도 신랄한 언어로 공산주의를 비유한다거나 -공산주의는 선풍기다- 비트겐슈타인을 대놓고 반대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의 파괴' 는 겉으로 보기에 두 가지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노통은 '전쟁'과 '사랑'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다른 관점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아이들의 그것이라지만) 전쟁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그녀의 필체는 역겹다는 말이 딱 맞을 정도의 적나라함을 보여준다. 서슴없이 '오줌을 적신 솜'을 '비밀 생화학' 무기라고 말한다거나 (이 부분에서 전혀 꺼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잔인함을 타고 났다고 해도 좋을 듯 싶을 정도로...) 너무도 쉽게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그에 반해서 사랑에 대해서는 그러한 잔인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그저 9살 소녀가 또다른 6살짜리 소녀을 사랑하는 것. 그 이상의 또는 그 이하의 것이 아니었다. 9살 소녀는 사랑하는 '그녀'를 위해서 그 좋아하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것을 잠시 미룰 정도의 열성을 보인다. 이처럼 이 소설의 중반부까지는 다른 얘기를 하는 듯 전쟁과 사랑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이 두 가지 요소는 보기좋게 하나의 접점을 찾아나간다. (소설 안에서 그 해답이 등장하지만...) 일리아드의 '헬레네' 에 자신의 사랑하는 '엘레나' 를 빗댄다. 곧 사랑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게 만든 일리아드의 '헬레네'에 빗댐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전쟁과 무관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의 관계는 이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가 초점을 맞추는 둘의 접점은 그 파괴성에 있는 것이다. (전쟁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엘레나'는 '나'를 사랑의 포로로 잡아놓고 사랑의 파괴성을 마음껏 느낀다. -마지막에 엘레나 보기 좋게 복수하는 장면은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결국 작가는 '전쟁'과 '사랑' 이라는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듯 싶지만, 결국은 둘의 파괴성이라는 공통분모를 얘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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