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횡단 특급
이영수(듀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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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횡단 특급' 에 수록되어 있는 소설 중 '첼로' 에 관한 감상입니다...^^ 

 

 

 

 

Law 1.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으며 인간의 위험을 간과해도 안 된다


Law 2. 법칙 1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Law 3. 법칙 1조와 법칙 2조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미래에 인간형 로봇이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해 진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로봇이 인간처럼 지능을 갖게 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로봇은 더 이상 60-70년대 SF에서나 나오는 얘기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지능의 습득을 넘어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기계적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는 부정하는 사람이 별로 없는 듯 하다. 이른바 간단한 기쁨이나 슬픔 정도는 쉽게 나타낼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감정. 이를테면 사랑이라든가 증오와 같은 수치화될 수 없는 것들을 나타낼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는 의견이 분분하다. 결국 이러한 요소들이 로봇의 인간화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1940년 아시모프가 ‘로봇의 3원칙’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로봇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보조자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로봇이 인공지능을 가지게 된다 하더라도 로봇의 법칙에 따르도록 프로그램화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60 여년을 훌쩍 넘어버린 이 법칙은 각종 매체에 의해서 공격을 받고 있다. 이제까지 이 법칙은 부정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로봇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소조항으로만 이루어진 이 법칙이 지금까지 수정되지 않고 그대로 내려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인간들이 이 법칙을 수용했다는 뜻도 될 것이다. 결국 로봇이라는 것은 인간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에 불과하며, 하위 개념에 속하는 종적관계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근간의 작품들은 그것을 부정하는 데에 더 익숙해져 있다. 지능을 가진 로봇은 인간과 동등한 관계를 원할 것이고, 인간은 당연히 이를 거부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은 프로그램화된 3원칙에 의해서 이뤄지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인간은 이러한 상상을 즐겨하면서 로봇 사회에 대한 공격적인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러한 작품들은 3원칙의 논리적 허점을 이용한 로봇의 공격만을 염두에 둘 뿐, 3원칙을 부정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 결국 인간은 로봇보다 더 높은 위치라는 인식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첼로에서 듀나도 3가지 원칙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로봇 사회를 비판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할 뿐이다. 하지만 듀나는 로봇 사회를 밝게 그리진 않는다. 부정적인 시각이 한층 가미된 묘사를 즐겨한다. 부정적이라는 의미는 지극히 로봇 관점에서의 (혹은 로봇 제조회사의 관점에서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로봇도 인간도 누가 승자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상황이 전개된다.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이 소설에서는 분명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의 로봇 사회를 그리고 있다. 인공지능을 지닌 로봇은 분명 사람에게 익숙한 존재지만 사람들은 로봇을 꺼린다. 결국 초창기 이후 로봇은 인간 사회와 멀어졌다는 전제에서 소설은 출발한다. 아니, 어쩌면 한동안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기간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인간들이 로봇을 거부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미 인공지능 로봇의 출현이 상당기간 지났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로봇만의 사회는 ‘망하지 않았다’ 는 것 또한 듀나의 상상 속에서 나온 설정이다. 분명 인간에게는 환영받지 못하지만 로봇만의 세계를 이루며 살아간다. 소수이긴 하지만 인간과 공존하려는 움직임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하지만 로봇의 시대는 한 번 지나갔고,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선지 로봇을 멀리한다. 로봇이 존재하는 줄은 알지만 그들을 이용하려고도 그렇다고 그들을 없애버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격리된 하나의 기계 이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여타 다른 작품과 달리 로봇과 쉽게 부딪칠 수 없는 ‘로봇 사회’ 에서의 사랑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결국 질문은 하나의 점으로 수렴된다.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일까? 아니, 그 이전에, 로봇이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이 이모와 트린과의 사랑에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모는 트린과 사랑에 빠져 온갖 애정을 다 쏟아붓지만 정작 나중에는 과연 트린이 자신을 사랑했는가를 의심하게 된다. (사실 이 과정이 아이러니컬함은 부정할 수 없다. 트린과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은 둘과의 관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로봇의 출현에 의한 것으로 표현된다. 결국 로나의 등장은 이모가 과연 내가 사랑받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준 계기가 된다. ) 바로 1법칙에 의해서 인간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해 사랑하는 척 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과연 로봇이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까. 이모는 진정 사람과 나누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나누었다고 할 수 있을까. 듀나는 정확한 결론을 내지는 않고 있지만 ‘사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독자에게 심어주고 소설을 마무리 짓는다. 결국 듀나는 로봇도 인간의 감정을 지니며, 인간 감정의 정수인 사랑을 느낄 수 있다고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첼로는 다분히 이모 중심, 그러니까 인간 중심으로 이야기가 씌여진 면이 있다. 이모의 사랑이 절대적이었고, 트린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다. 트린의 감정이 어땠는지에 관한 것은 글의 마지막까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독자들은 그저 로봇도 약간의 애정 정도는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하지만 이모의 일방통행적인 사랑에도 로봇의 법칙들을 갖대다면 상황이 간단하면서도 복잡해진다. 트린이 이모를 사랑했는가? 의 해답은 , 트린이 제 1 법칙의 수행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만들어 냈는가? 라는 의문과도 일치한다. 결국 로봇에게 있어 복잡 미묘한 감정은 생길 수 있는가? 그것이 기본적인 로봇 법칙들을 깨고 성립 가능할 것인가? 결국 종국의 의문은 이렇게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시점에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어리석다. 결국 로봇 시대라는 것이 겪어봐야 아는 것이고, 다가올 미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예측할 순 없다. 결국 수많은 상상력이 허구 아닌 허구를 만들어 내고 있는 셈 이다. 그저 단순히 로봇이 있어 편리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은 우리와 같은 지능을 지닌 하나의 개체가 만들어지는 것 이상의 의미, 그러니까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경쟁자가 등장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 전쟁과 같은 극단적인 상황만을 생각할 수는 없다. 매력적인 로봇이 나의 아내를 유혹한다면? 그래서 나의 위치가 불분명해진다면? 실로 이러한 것이 진정한 위협이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이 로봇이 감정을 가지는 것에 큰 반감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로봇과의 융화는 결국 전쟁 이상의 파괴력을 지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로봇 사회라는 것이 도래한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인간 사회에 미래의 로봇이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가 정답이리라. 하지만 적어도 모두 살아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 싶다. 벌써부터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너무 버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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