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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개정증보판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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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1996년 발간된 이후 100만권 이상 팔린 초베스트셀러이자 말 그대로 밀리언셀러다. 3년전 집에 사다놨다 얼마전에야 읽은 책도 초판164쇄본이니 그 판매량은 짐작조차 쉽지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했던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로 이 책의 진정성을 들고 싶다. 이 책이 발간되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역사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책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누군가의 해석을 거치면서 각색되고 포장되기 마련이다. 요즘들어 인기있는 소설 분야 중 하나인 역사소설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긴장감이나 몰입도는 뛰어날지언정 독자들로 하여금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데는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결국 독자들은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길 원한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은 역사소설이나 각종 역사 비평서를 읽음에 있어서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당대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각색을 거친 사건들을 다시 작가들의 상상력으로 더 꼬아버리는 일은 그저 재미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뚜렷해진다. 이 책은 필자의 의견은 최소화되어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현대인의 시각은 최대한 배제되었다는 말이다. 최초의 실록 자체가 객관적인 역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에게 재해석된 역사만은 보여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활동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 할 뿐이다. 그렇기에 방대한 실록의 약술 밖에는 안되는 이 한 권의 책이 사랑받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독자들은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들을 원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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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 선거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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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의 아니게 '인더풀-공중그네-면장선거' 로 이어지는 닥터 이라부 시리즈를 연이어 읽게 되었다. 토요일에 있을 독서토론의 주제가 바로 이 시리즈였기 때문인데, 사실 세 권을 모두 읽지 않아도 토론 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연작이라기보다는 단편 모음집의 성격이 강하고, 각각의 에피소드가 거의 아무런 연관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배열되어 있는 것같은 이 14편의 에피소드들 사이에도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줄만한 공통점은 존재한다. 각각의 상황을 웃으면서 보지만, 환자로 분류되는 그들이 정작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증세를 보는 경우가 적잖다.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일단 그 환자들과 공감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들과 비슷한 증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진 못한다. 그들 주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내 친구들도 나를 신경외과로 보낼지 모르니까.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것이 신경외과에 가는 것보단 낫다.

 개인적으론 정전기에 대한 공포가 있다. 겨울이면 현관문을 한번에 잡지 못하는 건 예사고, 심지어는 스태인레스컵에 있는 물조차 바로 손을 댈 수 없다. 가상의 공포 뿐이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열에 한두번은 꼭 손끝이 아릴 정도의 정전기가 흐른다. 때론 과감하게 손을 대보려 하지만 언제나 전기가 오를 때쯤해서 손을 멈추곤 서서히 다가간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다가도 쇳조각을 만질 일만 생기면 그런 증상이 나타나니 스스로 적응이 안될 지경이다. 그렇다면 나도 닥터 이라부를 찾아야하는 환자라는건가.

 결국 작가가 말하려는 것도 닥터 이라부가 말하려는 것도 결국 같은 것 같다. 우리 중에 진정한 의미의 정신병환자는 없다. 아니, 우리 모두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다. 하지만 이라부는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그들에게 치료보다는 그 병(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당당하게 맞서라 한다. 그렇다면 분명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신경증이라는 것은 신경을 쓰면 쓸수록 더 발전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신경을 쓰지 않는 행위 자체가 또다른 신경을 건드릴지 모른다. 닥터 이라부처럼 사는 게 그리 쉬운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또다른 신경증이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라부의 환자라는 생각. 언젠가는 그를 찾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의 15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한국 남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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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풍의 날
모르데카이 로쉬왈트 지음 / 세계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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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반세기 전 핵은 인류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핵은 세상에서 가장 파괴력 있는 무기이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있다. 핵을 없애지 못한 탓에 권력이 생기고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핵보다 더 큰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나오기 전엔 핵이 없어질 수 없음은 극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지금의 핵탄두와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지었던 그것과는 엄연히 말해서 다른 것이라해도 무방할 정도로 다른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핵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화두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기실 그 동안 논쟁이 되었던 내용들은 세밀한 내용만 바뀌었을 뿐 큰 틀은 하나 변한 게 없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결국 같은 논쟁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59년에 씌여졌다. 하지만 이 책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핵의 위협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핵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냉전 상황, 국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하호를 파고 국민들을 대피시킨다. 지하호에는 어김없이 권력이 생기고 균열이 생기고, 사랑이 생긴다.

 50 여년이나 지난 얘기라면, 그것도 막 전쟁이 끝나 그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나온 작품이라면, 지금의 것과 사뭇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이젠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지금 어느 작가가 핵에 관한 책을 쓴데도 이 작품과 썩 다르지 않은 작품이 되지 않을거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디스토피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핵은 엄연한 현실이며, 미래다. 버튼 하나로 인류가 없어질 수 있는 상황. 앞으로 50 년 후에 똑같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독자도 나와 같은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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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 일기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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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통브는 정말 부지런한 작가다. 스스로 '글 중독' 이라 불릴만큼 계속 창작을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일년에 꼭 한 편씩 새로운 장편을 내놓는 생산력은 그녀를 사랑하는 독자로서도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작업속도다. 그런 점 때문에 한편에선 그녀의 작품성이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품성 논란이 있을 때마다 빠른 작품 주기가 입에 오르는 것이다. '좀 쉬라'는 공개적인 조언을 서슴치 않게 하는 평론가가 있을 정도.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노통브의 소설을 모두 읽은 나로서는 지금까지 이런 평론가들의 말에 기울면서도 그 전부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짧은 주기 속에서도 그녀의 색깔은 분명히 지켜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는 '이제 그만 좀 쉬었다 쓰지'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엔 없었다. 청부살인업자과 노통브의 만남은 그 자체로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거리임에 틀림없지만, 스스로 자신이 파놓은 구멍에 들어가버린 꼴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구멍으로 들어갈수록 머리 위에 하늘은 보이지 않고 시각은 한없이 좁아지는 법이다.

 소설에선 청부살인업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나 제비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 등이 쉬이 납득되지 않는다. '우연한' 사고로 노인을 치여 죽인 후 공공의 적이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고 '우연히' 동료 살인청부업자를 만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기까지가 소설상으로 불과 한 장에 묘사되고 있다. 평범했던 한 사람이 살인청부업자가 되는 과정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고, 이전의 노통브라면 온갖 철학적 이유를 대서라도 독자마저도 그가 살인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어쩌다보니니 그렇게 되었다.' 식의 전개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또한 제비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나 이후에 정말 제비가 방으로 날아들어와 나가지 않는다는 구성은 닳고 닳아 콕 집어 어디서 봤다고 말하기 민망한 지경이다. 뭐, 작가 스스로 마지막에 얘기했듯 이걸 사랑에 미친 한 사람의 기록으로 본다면야 그러한 이야기의 반복 쯤이야 눈감아 줄수도 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간 보여주었던 작가의 철학적 사유의 과정은 이 소설에선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정말이지 노통브가 일년에 한 권의 책을 출판하겠다는 어떤 강박관념을 가진 건 아닐까. 얇팍한 스토리라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야 한다는 생각일까.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이야기의 흐름이 잘 전개되는 단편을 쓰는 것이 어떨까. 노통브와 살인청부업자의 납득할만한 만남이 앞으로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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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끌기
제임스 모로 지음, 김보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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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讀 : 2007년 10월 21일]

  책에 관련된 짧막한 이야기를 접하면서부터 지금 서평을 쓰는 이 순간까지 두가지의 대립된 생각들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신성모독' 과 '상상의 극'

  이 책을 쓴 제임스 모로 또한 대립각을 세운 두 가지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에서 이 두가지 요소는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으리라. 그만큼 이 책은 논란의 요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신성을 건드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작이 될 수 있는 요지와 기발한 상상력을 발현했다는 찬사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다빈치 코드'가 이와 비슷한 예라면 어불성설일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모태신앙을 가진 신앙인으로서 보자면 자칫 불경스러운 책이 될 수도 있지만, SF와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독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만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책을 다 읽은 후에 내린 결론은 '나는 행운아' 라는 것이다. 동시에 소설을 덮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 책은 오히려 신성을 찬양하는 쪽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죽음' 이라는 소재가 일견 신자들로 하여금 반발을 살 수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론을 이르는 길은 비교적 쉽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성경의 내용을 빗나가자도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서 어긋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든 상황의 설명은 성경과 하느님의 뜻에서 비롯된다. 결국 신성모독이니 불경이니 하는 것들은 우리들이 평소에 가졌던 신앙에 대한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은 죽을 수 없다' 라고 누가 말한 것일까. 그것은 그곳에 범접할수조차 없는 인간이 그은 선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도 그것이었으리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신을 없애라. 신에 대한 외경이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고 하게 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 자살을 택한 하느님이 인간에 하고 싶은 말도 결국 그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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