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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백 ㅣ 브라운 신부 전집 1
G. K. 체스터튼 지음, 홍희정 옮김 / 북하우스 / 2002년 7월
평점 :
이 책을 고르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브라운 신부' 나 '체스터튼' 아니라 '추리문학의 고전' 이라는 문구였다. 사실 이 책을 고를 때까지만 해도 브라운 신부나 체스터튼의 이름은 몇 차례 스쳐들었을 뿐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에 빠져들어가면서 단지 '고전' 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는 이유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감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추리소설이라고 볼 수 없다. 추리소설의 태를 취하고 있긴하지만, 현대의 독자들이 바라는 극적 추리 기법이나 반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신부가 나와 '이건 이런겁니다' 하고 설명하는 정도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고전이기 때문에 근간을 이루는 소설에서 나오는 탄탄한 구성이나 증거의 치밀함, 극적 반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대에 추리소설의 근간이라고 설명되는 애드거 앨런 포나 코난도일의 소설에서 추리소설의 맛을 볼 수 있다면 체스터튼의 소설에서는 그러한 맛을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 다른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대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은 추리소설이 아니라 단순한 사건록이나 야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추리소설이라고 잘못 알려진 것만 빼면 그리 나쁜 소설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추리 소설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면 이 소설에서는 다른 재밌는 요소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브라운 신부의 누추한 차림이나, 여타 다른 탐정에서 느낄 수 없는 어리숙함. 게다가 너무나 순순히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는 범죄자들. 적어도 이 소설에 나오는 범인들은 키 작은 브라운 신부를 고려해서인지 사건이 밝혀진 다음 반항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물론 플랑보라는 힘 좋은 탐정이 함께하기 때문에 종종 힘을 써야 하는 일은 그가 다 처리하곤한다.) 결국 남는 것은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미가 아닐까. 작가가 신부를 사건을 풀어가는 해결사로 등장시킨 것은 독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명석한 탐정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작가는 신부로 하여금 죄와 인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브라운 신부는 사건을 해결하긴 하지만 사건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자신이 용서를 베푸는 과용을 부리지 않는다. 그저 하느님의 생각되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할 뿐이다. 그저 하늘에 맡기고 자신은 진실에 가까이 가는 데에만 힘을 다할 뿐이다.
이 소설은 극적인 구성이나 재밌는 에피소드는 등장하지 않는다. 각각이 어쩌면 교훈적인 내용으로 독자들을 감화시키려는 듯 찬찬히 읽을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이 일어나는 자리에 신부가 불리는 것이 아니라 신부가 있는 곳에 사건이 일어나는 방식은 사건의 우연성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그가 그리 능력있는 탐정이 아니라는 방증도 된다. 이는 독자들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누구도 반기지는 않지만 항상 그 자리에서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는 그의 모습은 탐정이라기 보다는 성직자에 더 가깝다. 부디 이 책을 골라야 할지 고민하면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표지에 있는 '추리소설' 이라는 문구에 현혹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저 재밌는 에피소드와 함께 휴머니즘을 느낄 수 있는 소설을 원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