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끌기
제임스 모로 지음, 김보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一讀 : 2007년 10월 21일]

  책에 관련된 짧막한 이야기를 접하면서부터 지금 서평을 쓰는 이 순간까지 두가지의 대립된 생각들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았다.

  '신성모독' 과 '상상의 극'

  이 책을 쓴 제임스 모로 또한 대립각을 세운 두 가지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에서 이 두가지 요소는 배제할 수 없는 요소가 되었으리라. 그만큼 이 책은 논란의 요지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 신성을 건드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문제작이 될 수 있는 요지와 기발한 상상력을 발현했다는 찬사를 동시에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 '다빈치 코드'가 이와 비슷한 예라면 어불성설일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 모태신앙을 가진 신앙인으로서 보자면 자칫 불경스러운 책이 될 수도 있지만, SF와 미스터리를 사랑하는 독자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만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책을 다 읽은 후에 내린 결론은 '나는 행운아' 라는 것이다. 동시에 소설을 덮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이 책은 오히려 신성을 찬양하는 쪽에 가까운 작품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죽음' 이라는 소재가 일견 신자들로 하여금 반발을 살 수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결론을 이르는 길은 비교적 쉽다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성경의 내용을 빗나가자도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서 어긋나지도 않는다. 오히려 모든 상황의 설명은 성경과 하느님의 뜻에서 비롯된다. 결국 신성모독이니 불경이니 하는 것들은 우리들이 평소에 가졌던 신앙에 대한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신은 죽을 수 없다' 라고 누가 말한 것일까. 그것은 그곳에 범접할수조차 없는 인간이 그은 선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소설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도 그것이었으리라.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신을 없애라. 신에 대한 외경이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고 하게 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만든다. 자살을 택한 하느님이 인간에 하고 싶은 말도 결국 그것이 아니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뿌리 깊은 나무 1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이 주는 고전적인 느낌이 소설을 20년은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사실은 출간된지 2년도 채 안된 소설이다. 게다가 반듯한 느낌의 소설일 것이라는 생각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삐딱선을 타선 좀처럼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세종 때의 조선을 배경으로 겸사복 채윤이라는 인물을 세워 살인 사건을 풀어가는 것을 기본 골격으로 삼고 있다. 조선 시대에 그것도 궁 안에서의 살인 사건은 곁길로 들어가도 한참 들어간 것이리라. 그렇지만 그 덕에 이 소설은 정사임을 내세우는 다른 소설과 다른 참신함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참신함만을 무기로 삼으려 했다면 그렇게 큰 성공은 예의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책을 보면 작가가 이 소설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미술, 천문, 문학, 역사, 역법 등 수많은 분야에 대해서 녹록치 않은 식견을 보여준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가 아닌 이상 이 모든 것을 애초에 섭렵할 수는 없었을 터, 작가의 노력에 감탄사를 보낼 수밖에 없다. 이 책의 판매 기록은 그에 대한 작은 보상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책은 최근 '팩션' 열풍의 정점에 있는 소설이다. 대체 역사라는 것은 그것 자체로 의미를 가져야 한다. 논란이 되고 있는 것처럼 정사에서 벗어난 소설이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팩션의 미래는 달려있다. 정사는 정사대로 대체역사는 대체역사대로 따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 역사 왜곡 수준이 아니라면 자유로운 상상은 최대한도로 허용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一讀 : [2007.2.19]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라는 책의 제목은 얼핏 생각하기에 흔한 사랑얘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책을 조금만 읽다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이 서명은 '나는 누구인가' 와 비등한 위력을 가지는 철학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피상적으로 드러난 것들에 대해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지만 결국 그 질문의 핵심은 영원히 알 수 없는 미궁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는 것이 어려운만큼 사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리라.

 사랑은 인류 최고 불멸의 주제다. 근래에 들어서 사랑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원리와 본질의 복잡함에는 접근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나마 사랑과 그 시작점을 같이하는 철학 정도만이 사랑의 설명에 있어서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하고 있다. 소설에서 필자는 이 철학적인 요소를 이용하여 사랑에 대해서 최소한의 설명을 하려고 노력한다. 정확히는 사랑 전반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자신의 상대(들)에 관한 심리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자신과의 관계에 이용하려는 도구로써 자신의 철학적인 지식을 이용하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대상 범위가 줄었다고 하더라도 그 복잡함의 정도는 결코 덜하지 않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소설의 기본적인 이야기 구조는 진부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다. 남녀가 만나고 싸우고 헤어지는 진부한 구성 속에 던져진 주인공은 거의 모든 일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해결하려 한다. 무엇하나 결정하고 판단하는데 자신의 모든 철학적 지식을 동원하고 상대를 해석하려는 시도가 독자로 하여금 괴리감을 느끼게 할 정도다. 그렇다고 그의 철학적인 해석들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그가 했던 철학적 사고의 과정은 최선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철학적으로 해석을 하면서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 라는 철학적 방어막을 가지게 되니까. 그걸로 그의 사고는 최선을 다한 것이다. 누구나 그랬고, 원래 그런 것이니까.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사랑도 그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철학적 잣대를 대지 않을을 뿐 그 복잡함과 심도에 있어선 이 어려운 남자보다 더 쉽다고 할 수 없을 듯 하다. 사상가들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을 뿐 결국 우리가 하는 사랑이라는 것도 철학적인 판단 위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철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다행이지 그랬다면 데이트 한 번에 칸트를 잠자리 한 번에 데카르트를 생각해야되는 상황이 생겼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칸트가 어렵고 데카르트가 난해하다 하더라도 사랑보단 쉬우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집어 들었다. 매번 '역겹다' 라는 말로 서평을 쓰곤 했던 그녀의 소설에 다시 손을 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역겹다고 해서 그녀의 소설을 거른 적은 없다. 역겹다는 것이 곧 싫다는 것의 표현은 아니다. 무라 정의할 수 없지만 노통의 매력에 끌린다고 할까. 아니면 마조히스트적인 또 다른 나가 그녀 소설의 또다른 '역겨움' 을 찾아내고 즐기려 하는 것일까. '앙테 크리스타' 의 출간 소식을 듣고 나서 들었던 생각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분명히 노통류의 소설임에 분명한데 내가 또 봐야 할까? 하지만 또다른 역겨움을 찾기 위해 다시 책을 들고 말았다.



  역시 노통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16살 소녀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여지껏의 노통이 보여줬던 소설에서와 같이 적(適)도 등장한다. 하지만 이전의 적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다른 소설에서 더 어리거나 이미 사회인이 된 주인공을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단순히 나이에 따른 차이라고 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적의 처음 등장이 다르다. 하지만 '나에게만 적으로 느껴지는 현실' 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앙테크리스타에서 적은 아군으로 가장해 다가온다. 적의 의도된 접근이었는지, 아니면 스스로가 악의 화신을 찾아나선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만났고, 적은 나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적은 만인의 적은 아니다. 오로지 하나의 희생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준비가 되어 있다. 누가 먼저 파멸하는가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것처럼 둘의 신경전은 독자들의 신경을 자극한다.



  이 부분에서 노통의 전매특허인 '역겨움의 미학' 이 잘 나타난다. 물론 역겨움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했지만 그녀의 소설에서 역겨움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코묻은 휴지를 다시 펼쳐 보는 어린 아이에 대한 역겨움, 언변으로 듣는이로 하여금 구역이 나게 만드는 지적인 역겨움, 작가 자신을 죽여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역겨움.... 이 소설에서도 형태는 달리하지만 역겨움은 존재한다.  아마 그 역겨움은 적이 나를 괴롭힐 때 느끼는 희열이 클수록 독자들은 심하게 느끼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블랑슈가 크리스타에 끊임없이 당할 때 크리스타의 머리를 잡아채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되고, 가족들이 결국 블랑슈보다 크리스타에 마음을 뺏겨버릴 때는 책에 대고 소리라도 질러버리고 싶어진다. 크리스타의 행동이 잔인하다기 보단 역겨움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결론을 향해 끊임없이 책장은 넘어간다. 역겨움을 이기기 위해... 짜릿한 복수가 이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블랑슈의 복수도 어떤 면에서 보면 상대를 괴롭히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상대가 결핍되어 있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절묘하게 파고들어가 정곡을 찌르는 복수. 하지만 이 부분에서 쾌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여전히 무언가 거북하다. '그게다야?' 라는 생각과 함께 '이런 방법을 쓰면 해결이 되는걸까' 라는 생각이 교차한다. 하지만 무언가 응어리진 것이 풀리지 않음은 부정할 수 없다. 



  분명 크리스타는 블랑슈에 있어 최고의 적이었다. 자신의 모든 영역을 침범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블랑슈의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크리스타라고 할 수 있다. 키스를 알게 해 주었고, 자신의 몸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해 주었다. 어쩌면 크리스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멜리 노통이 잊을만하면 꺼내들던 '또 다른 나' , 크리스타가 블랑슈의 또 다른 나는 아니었을까. 16살의 사춘기에 찾아온 정신적 육체적인 혼란을 이기는 과정에서 내가 생각했던 나와 다른 또 다른 나를 발견했을 때의 서먹함.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공존해야 하는 불합리함. 결국 적이 나를 이기고,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 결국엔 습관처럼 적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자신.



  이러한 과정은 결코 아름다울 수도 없고, 통쾌한 결말을 기대할 수도 없다. 크리스타가 '또 다른 나' 가 아닌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블랑슈는 그녀를 통해 성장했다. 다른 누군가를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 글의 내용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결국 숙제는 성장을 위해 나를 넘어서는 데에 있으니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는 꼴찌에 대한 인식이 낙오자라는 하나의 단어로 대체될 수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 인식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논쟁의 대상이 되고, 수면 위로 올라와 재평가 받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만큼 사회가 많이 변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적어도 1등이 아닌 나머지를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게 꼴찌 열풍이 가지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예전에는 그야말로 1등 위주의 사회였다. 극단적으로 꼴찌만을 언급 했을 뿐이지, 2등 이하 순위권 밖은 꼴찌나 다름없는 대우를 감수해야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 앞에서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그들에게 요즘은 희망을 주는 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야말로 꼴찌에게 희망을 주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 중심에 있다. 최근에는 영화까지 개봉해서 그 위력을 과시한 바 있다. 작가를 비롯한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놀랐을 만큼 그 열풍은 대단했다. 실제 주인공이 저녁 뉴스에 소개되는가 하면, 인터넷에서는 꼴찌 클럽이라는 내용을 알 수 없는 클럽들도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금의 꼴찌 열풍이 과연 모든 사람들에 눈을 돌리는 여유로운 자세에서 나온 것일까.

 

 원래의 ‘꼴찌에게 희망을’ 이라는 생각은 엘리트주의의 부정이나 1등 지향주의를 배타하는 데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서열화 된 세상에 대한 반발, 단편적인 평가 이면에 감춰진 다른 능력을 발견할 수 없는 지금의 제도들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불만의 화살은 그러한 제도를 만든 사람보다는 그 제도를 용케 뚫고 나온 엘리트들에 맞춰지는 경우가 많았다. 몇 점 차이나지 않는 수능 점수로 인생이 결정되는 대학입시, 영어라는 기준 하나에 취직의 당락이 바뀌는 현실. 그러한 기준에 맞추지 못한 사람들은 낙오자라는 평가를 받으면 좌절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그런 사람들인 만큼 다른 방식으로의 평가를 원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반적인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나름의 기준으로 재평가 받고 있는 꼴찌들에 포커스가 맞춰지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과정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럽다. 점점 난해해지는 대학입시, 아무리 노력해도 뚫릴 생각을 하지 않는 취업문. 이런 상황에서 한두번쯤 좌절을 맞본 사람은 그런 희망가에 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선발된 소수에 들지 못한 사람들은 꼴찌라는 일종의 욕구 불만 창구를 만든 셈이다. 자기보다 더 못한 사람을 만들어 놓고 ‘그나마 내가 낫지’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꼴찌 열풍’ 의 정도에 다소 당황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단순한 시대적 흐름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기에는 그 파급효과가 무섭다. 그저 꼴찌라는 이유만으로 관심을 받고 심지어 사랑을 받기도 한다. 그 이면에 숨겨진 노력이나 꾸준함과는 상관없이 그저 꼴찌이기 때문에 관심을 받게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주객전도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꼴찌 자체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셈이 된 것이다.  ‘난 이거 하면 되니까, 다른 것은 포기해도 돼.’ 꼴찌 열풍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무능함을 정당화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정당화의 이면에는 적잖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과연 그 사람이 노력이란 것이 수반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분명 꼴찌에 대해 어김없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노력과 과정에 열렬한 박수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꼴찌를 하곤 있지만 그 꾸준함, 열정이 다른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는 데서 꼴찌의 정당성을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저 꼴찌이기 때문에 인정받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삼미 슈퍼스타즈가 지금까지 사랑을 받는 것은 그들이 꼴찌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끝까지 싸워주었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하면서 팬들을 맞이하는 프로였다면 애초에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 팬들은 이미 그들을 떠난 이후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1등만을 기억하는 현실이 불공정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1등은 1등으로서의 대우를 받아야 한다. 적어도 1등이 되기 위해 흘려야했던 땀방울에 대한 의미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노력이란 것은 1등이든 꼴찌든 모두에게 값진 것이다. 1등의 노력과 꼴찌의 노력이 다를 수 없고, 그 의미 또한 다르게 부여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꼴찌 치켜세우기는 다소 위험해 보인다. 자칫 1등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꼴찌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그 이면에 있는 굴하지 않는 자세, 끊임없는 노력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1등은 1등으로서의 가치가, 꼴찌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