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 이야기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독자들에게 전한다. 그만큼 소설은 장르적인 특성상 일반적인 독자와 친숙하면서도 쉽게 의도를 전달할 수 있는 중요한 매체인 셈이다. 작가가 말하려는 바를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소설을 통해서 그가 말하려는 것이 내화되어 은연 중에 행동으로 사고로 표현된다면 제 역할을 충분히 한 것이라 할 수 있을것이다. 또한 이러한 성향을 지닌 소설들을 우리는 흔히 '좋은 소설' (소설적인 재미와 작가의 의도를 적절하게 버무린 작품) 이라고말한다. 이 소설 또한 작가의 그러한 점에서 봤을 때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이 작품은 재밌다. 작품이 비등점을 향해가기까지 적지 않은 페이지가 할애되는 덕에 몇몇 사람들이 초반에 책을 덮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 같지만, 비등점을 넘기고 나면 책을 읽는 내내 끓어오를 수 있는 충분한 재미가 있다. 호랑이와 단 둘이 좁은 구명보트 안에서 227일 간을 표류하면서 살아난 이야기는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경외에 더해서 긴박감을 놓치지 않아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책의 핵심은 그 재미에 있지 않다. 작가가 독자로 하여금 초반을 지루하게 만들면서까지 얘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종교와 신, 그리고 인간이다. 인도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다종교를 가지는 한 소년을 통해 그는 종교에 대해 언급할 것임을 암시한다. 또한 주인공의 별명도 무한과 흔히 대체되곤하는 파이라고 지음으로써 자신이 앞으로 할 이야기가 단순한 표류기가 아님을 거듭 내세운다. 그렇지만 소년이 표류하게 되면서 앞에서 얘기되었던 신을 얘기하려고 했던 의도는 없어진 것처럼 보인다. 소년은 이따금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채식주의자임을 내세울 뿐 어떤 종교적인 색깔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여린 소년이 거친 호랑이와 어떻게 그 긴 기간을 버텼는지 풀어낼 뿐이다.

 마지막 장에 가서야 앞의 두 이야기가 상충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게된다. 파이는 사건의 조사를 맡은 일본 선박회사 관계자에게 앞의 이야기와는 다른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에서 호랑이는 소년 자신으로 오랑우탄은 그의 어머니로 하이에나는 요리사로 각각 대체된다. 소년이 호랑이로 대체되면서  이 이야기는 호랑이와 단 둘이 긴 시간을 살아남은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소년이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요리사를 죽이고 혼자 표류하다 잡힌 어쩌면 뻔한 스토리가 되어버릴 운명에 처한다. 

 하지만 일본 선박 관계자들은 오히려 호랑이가 나오는 이야기가 더 나은 이야기라고 말한다. 독자들도 그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호랑이와 살아남은 이야기는 이성적으론 믿을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결국 믿을 수밖엔 없다는 것. 작가가 말하고 싶은 종교도 결국엔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고 한대도 결국엔 알 수 없는 것, 하지만 종국에는 믿게되는 것. 우리가 알고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계가 그 전부는 아니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과학을 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러한 종교와 과학 감성과 이성의 문제는 언제나 상충되는 것처럼 보인 것이 사실이다. 과학적으로 파고들어가보면 신이 안 보이고, 종교를 맹신하게 되면 이성은 무의미하게 된다. 하지만 경험상으로 보더라도 둘은 상충되는 두 대립체들이 아니다. 사람은 이성적이면서도 감성적일 수 있고, 과학적이면서도 종교적일 수 있다. 과학으로 설명이 안 된다고 해서 믿지 못할 것도 아니며, 종교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가 알아낸 이성이 바뀌지는 않는다. 실제로 종교를 믿는 과학인이나 과학하는 종교인은 수없이 많고, 일각에선 가장 큰 대립각일 보이는 진화론마저 창조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을 정도다.

 이성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라고 해서 항상 그른 것은 아니다. 우리 이성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진실이 있을 수 있고,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파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던가. 우리는 무한인 파이를 유한하게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지 않나. 결국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도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우리 나름으로 바꿔버린다. 파이가 무한에서 유한으로 바뀌어 받아들여졌듯이. 하지만 마지막에 정당한 판단을 하는 것은 오롯이 각자의 몫이 아닐까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 개정증보판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 8
박영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1996년 발간된 이후 100만권 이상 팔린 초베스트셀러이자 말 그대로 밀리언셀러다. 3년전 집에 사다놨다 얼마전에야 읽은 책도 초판164쇄본이니 그 판매량은 짐작조차 쉽지 않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했던 것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로 이 책의 진정성을 들고 싶다. 이 책이 발간되기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역사서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책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역사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누군가의 해석을 거치면서 각색되고 포장되기 마련이다. 요즘들어 인기있는 소설 분야 중 하나인 역사소설의 경우도 같은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긴장감이나 몰입도는 뛰어날지언정 독자들로 하여금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데는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결국 독자들은 역사를 이해함에 있어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길 원한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은 역사소설이나 각종 역사 비평서를 읽음에 있어서 하나의 가이드라인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당대의 역사가들에 의해서 각색을 거친 사건들을 다시 작가들의 상상력으로 더 꼬아버리는 일은 그저 재미로만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뚜렷해진다. 이 책은 필자의 의견은 최소화되어 있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지만 현대인의 시각은 최대한 배제되었다는 말이다. 최초의 실록 자체가 객관적인 역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에게 재해석된 역사만은 보여줄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활동들은 독자들로 하여금 혼란을 일으키게 할 뿐이다. 그렇기에 방대한 실록의 약술 밖에는 안되는 이 한 권의 책이 사랑받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독자들은 역사의 객관적인 사실들을 원하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면장 선거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본의 아니게 '인더풀-공중그네-면장선거' 로 이어지는 닥터 이라부 시리즈를 연이어 읽게 되었다. 토요일에 있을 독서토론의 주제가 바로 이 시리즈였기 때문인데, 사실 세 권을 모두 읽지 않아도 토론 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 같다. 연작이라기보다는 단편 모음집의 성격이 강하고, 각각의 에피소드가 거의 아무런 연관없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배열되어 있는 것같은 이 14편의 에피소드들 사이에도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시켜줄만한 공통점은 존재한다. 각각의 상황을 웃으면서 보지만, 환자로 분류되는 그들이 정작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정도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증세를 보는 경우가 적잖다. 그래서 많은 부분에서 일단 그 환자들과 공감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들과 비슷한 증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진 못한다. 그들 주변 사람들이 그랬듯이 내 친구들도 나를 신경외과로 보낼지 모르니까.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것이 신경외과에 가는 것보단 낫다.

 개인적으론 정전기에 대한 공포가 있다. 겨울이면 현관문을 한번에 잡지 못하는 건 예사고, 심지어는 스태인레스컵에 있는 물조차 바로 손을 댈 수 없다. 가상의 공포 뿐이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열에 한두번은 꼭 손끝이 아릴 정도의 정전기가 흐른다. 때론 과감하게 손을 대보려 하지만 언제나 전기가 오를 때쯤해서 손을 멈추곤 서서히 다가간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다가도 쇳조각을 만질 일만 생기면 그런 증상이 나타나니 스스로 적응이 안될 지경이다. 그렇다면 나도 닥터 이라부를 찾아야하는 환자라는건가.

 결국 작가가 말하려는 것도 닥터 이라부가 말하려는 것도 결국 같은 것 같다. 우리 중에 진정한 의미의 정신병환자는 없다. 아니, 우리 모두가 정신병을 앓고 있는 환자다. 하지만 이라부는 (그것이 의도된 것이든 아니든) 그들에게 치료보다는 그 병(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당당하게 맞서라 한다. 그렇다면 분명 그것에서 해방될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신경증이라는 것은 신경을 쓰면 쓸수록 더 발전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의식적으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신경을 쓰지 않는 행위 자체가 또다른 신경을 건드릴지 모른다. 닥터 이라부처럼 사는 게 그리 쉬운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또다른 신경증이 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라부의 환자라는 생각. 언젠가는 그를 찾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의 15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한국 남자일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핵폭풍의 날
모르데카이 로쉬왈트 지음 / 세계사 / 1989년 5월
평점 :
절판


 이미 반세기 전 핵은 인류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핵은 세상에서 가장 파괴력 있는 무기이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있다. 핵을 없애지 못한 탓에 권력이 생기고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핵보다 더 큰 파괴력을 가진 무기가 나오기 전엔 핵이 없어질 수 없음은 극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지금의 핵탄두와 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지었던 그것과는 엄연히 말해서 다른 것이라해도 무방할 정도로 다른 파괴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핵이 지난 반세기 동안 인류에게 가장 큰 화두였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기실 그 동안 논쟁이 되었던 내용들은 세밀한 내용만 바뀌었을 뿐 큰 틀은 하나 변한 게 없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결국 같은 논쟁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1959년에 씌여졌다. 하지만 이 책에서 두려워하고 있는 핵의 위협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핵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냉전 상황, 국가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지하호를 파고 국민들을 대피시킨다. 지하호에는 어김없이 권력이 생기고 균열이 생기고, 사랑이 생긴다.

 50 여년이나 지난 얘기라면, 그것도 막 전쟁이 끝나 그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나온 작품이라면, 지금의 것과 사뭇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슬프게도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이젠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지금 어느 작가가 핵에 관한 책을 쓴데도 이 작품과 썩 다르지 않은 작품이 되지 않을거란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디스토피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핵은 엄연한 현실이며, 미래다. 버튼 하나로 인류가 없어질 수 있는 상황. 앞으로 50 년 후에 똑같은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독자도 나와 같은 글을 쓰고 있지는 않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비 일기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민정 옮김 / 문학세계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통브는 정말 부지런한 작가다. 스스로 '글 중독' 이라 불릴만큼 계속 창작을 하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일년에 꼭 한 편씩 새로운 장편을 내놓는 생산력은 그녀를 사랑하는 독자로서도 쉬이 상상할 수 없는 작업속도다. 그런 점 때문에 한편에선 그녀의 작품성이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작품성 논란이 있을 때마다 빠른 작품 주기가 입에 오르는 것이다. '좀 쉬라'는 공개적인 조언을 서슴치 않게 하는 평론가가 있을 정도. 적어도 국내에 소개된 노통브의 소설을 모두 읽은 나로서는 지금까지 이런 평론가들의 말에 기울면서도 그 전부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짧은 주기 속에서도 그녀의 색깔은 분명히 지켜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소설을 읽고는 '이제 그만 좀 쉬었다 쓰지' 라는 생각을 할 수밖엔 없었다. 청부살인업자과 노통브의 만남은 그 자체로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거리임에 틀림없지만, 스스로 자신이 파놓은 구멍에 들어가버린 꼴이 되지 않나 생각한다. 구멍으로 들어갈수록 머리 위에 하늘은 보이지 않고 시각은 한없이 좁아지는 법이다.

 소설에선 청부살인업자가 되어가는 과정이나 제비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 등이 쉬이 납득되지 않는다. '우연한' 사고로 노인을 치여 죽인 후 공공의 적이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고 '우연히' 동료 살인청부업자를 만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기까지가 소설상으로 불과 한 장에 묘사되고 있다. 평범했던 한 사람이 살인청부업자가 되는 과정은 분명 쉽지 않았을 것이고, 이전의 노통브라면 온갖 철학적 이유를 대서라도 독자마저도 그가 살인을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하지만 '어쩌다보니니 그렇게 되었다.' 식의 전개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또한 제비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나 이후에 정말 제비가 방으로 날아들어와 나가지 않는다는 구성은 닳고 닳아 콕 집어 어디서 봤다고 말하기 민망한 지경이다. 뭐, 작가 스스로 마지막에 얘기했듯 이걸 사랑에 미친 한 사람의 기록으로 본다면야 그러한 이야기의 반복 쯤이야 눈감아 줄수도 있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간 보여주었던 작가의 철학적 사유의 과정은 이 소설에선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정말이지 노통브가 일년에 한 권의 책을 출판하겠다는 어떤 강박관념을 가진 건 아닐까. 얇팍한 스토리라도 한 권의 책으로 묶어야 한다는 생각일까.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이야기의 흐름이 잘 전개되는 단편을 쓰는 것이 어떨까. 노통브와 살인청부업자의 납득할만한 만남이 앞으로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