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름 크리에이티브한 일로 벌어먹고 사는 주제에

쥐어짜내 쓰기만 하고 집어넣을 시간이 없다는 건 참 아이러니 하다.

일 관련 서적이 아니면 잠 자기 직전 일부러 짬을 내지 않는 한, 책 읽을 시간조차 따로 내기 힘든 현실.

며칠 째 침대 옆 협탁의 책 목록이 변함이 없구나.

참 척박하게 산다.

 

 

자기 전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니콜라 부비에와 티에리 베르네와 함께 앙카라 북동쪽의 살풍경한 드넓은 고원을 통과한다.

경작지는 강 때문에 넓어진 단층 아래쪽에 박혀 있고, 푸르른 원곡 밑바닥에서는 버드나무와 포도나무가 반짝반짝 빛나고, 산더미처럼 쌓인 거름 사이에서 물소와 양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나무로 지은 사원 근처에 집 몇 채가 서있고, 고원까지 똑바로 올라온 연기가 바람에 붙잡혀 쓸려갔다. 벗긴 지 얼마 되지 않는 곰가죽이 못으로 헛간 문에 박혀 있는 게 이따금 눈에 띄기도 했다.

침대 맡에서 1950년대의 소아시아를 횡단한다.

여행기는 그래서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귀스타브 도레

1만점 이상의 판화와 200권 이상의 책에 삽화를 그린 19세기 말 당대 가장 유명하고 성공한 삽화가.

 

수많은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

아마 시오노 나나미에게도 십자군 이야기를 쓰게 한 영감의 원천의 일부가 되기도 했을...

 

어린 시절 부모님의 서재에 유리문이 달린 책장 안에 도레의 판화집이 있었다.

거대한 판형의 이 수입 원서는 당연히 어린 내가 만져선 안되는 금지된 책이었고 부모님이 꺼내서 볼때 곁눈으로나 볼 수 있는 그런 책이었다.

 

이젠 판화집이던 삽화집이던 내돈 주고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시절 그의 그림에 대한 굶주림으로 기갈에 시달린 탓인지. 이제 그의 그림을 인쇄물이 아닌 실물로 보고 싶은 욕망이 인다.

 

귀스타브 도레- 수수께끼 

 

죽기 전에 오르세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을까.

 

 

엄청난 다작을 하면서 부와 명성 모두를 손에 넣은 천재.

귀스타브 도레를 보면 남달리 신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란 이런 게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석영의 밥도둑
황석영 지음 / 교유서가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 작가의 창작물인 소설은 별로이나 사적인 영역인 산문이나 인터뷰는 유난히 끌리는 작가가 있는 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소설은 너무 좋지만 작가가 드러내는 인품이나 사상에 너무 심하게 거부감이 들면 도저히 그 작가의 작품마저 볼 수 없는 지경이 되는데... 

설마 황석영이 내게 그런 케이스가 되리라곤...

 

황석영 선생은 존경을 넘어 성역같은 경외감을 가지게 했던 작가다.

치열했던 삶도... 글도... 글은 이런 사람이 쓰는 거라며 동경하고 표본으로 삼았던 작가다.

 

선생에게 묻고 싶다.

청춘이라니...

막을 내린 청춘이라니....

진심으로 그게 마른오징어를 씹으며 청춘의 끝자락을 떠오르게 하는 흐뭇한 일화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 나옴직한 라스콜니코프 같던 선생의 친구는 짝사랑 하던 시골분교 여교사가 청혼을 받아주지 않자 군대가기 전 표적이라도 남기겠다며 밤의 보리밭에서 강제로 덮친다. 하지만 술에 취해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고 여교사의 구두만 덜렁 가져오는데...

나타난 친구가 덜렁 여교사의 구두를 던져놓자 황석영 선생이 하시는 생각이 가관이다.

 

통금이 되어서도 그는 돌아오지 않더니 한시가 넘어서야 술에 만취해서 방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아무말 없이 그 무렵에 젊은 여자들 사이에 대유행이던 흰색 하이힐을 비좁은 방 가운데로 던졌다. 나는 이불 위에 떨어진 여자구두를 내려다보았다. 잠이 번쩍 깨는 느낌이었다. 엽기적인 생각과 함께 그가 성공을 했을지 모른다는 부러움이 동시에 지나갔다. 

 

엽기적인 생각이란 뭡니까?

청혼을 안받아주면 욱해서 강간이라도 하는 거요?

친구가 보리밭에서 강간에 성공했으면 참 부러우셨을까요?

이후 제대한 그 친구와 재회해 마른오징어를 씹으며 그 때 그 여자가 자기보다 힘이 세더라. 밀치니 되려 나동그라졌다며 낄낄거렸을 두 남자.

여자가 오죽했으면 신발을 벗어두고 맨발로 도망쳤을까.

어두운 보리밭에서 남자가 다리를 덥석 안았을 때 그 여자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글로 보고 있던 나조차 싸늘한 얼음물이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듯 섬뜩한 느낌이 드는데...

때로는 그런 기억이 20년 30년이 지난 뒤 외상후 장애로 발현되기도 한다. 외상후 장애가 그렇게 무섭다는 걸 나 또한 최근에야 알았다.

라스콜니코프 같던 선생의 친구에겐 그저 스쳐가는 청춘의 무용담이었겠지. 과연 그 분교 여교사에게도 청춘의 추억이었을까? 내가 그 여교사고 선생의 산문에 그 악몽이 무용담처럼 써갈겨진 걸 본다면 정말 소름이 끼쳤을 것 같건만.

 

예전 어느 아침프로에서 개그맨 양원경이던가...

어리고 예쁜 아내와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선배인 서세원이(역시 그 방법으로 결혼한) 우선 자빠뜨리라고 조언해줘서 강간이 결혼계기가 된걸 자랑스레 떠들던... 그게 일부 인성 쓰레기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강간이 자랑이고 무용담인, 보편적 남자들의 정서가 야만스런, 이 나라는 그런 나라구나. 그게 아니고서야 아무리 예전에 연재한 글이라 해도 2016년 책이 나온 날짜가 최근이니 교열은 하셨을 터. 세월이 이렇게 흘러도 철없던 그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의식의 변화나 거리낌이 없으셨을 수가 있나.

기분좋게 읽고 있던 책에서 갑자기 똥물을 뒤집어 쓴 듯한 모멸감. 그럼에도 선생의 글들은 여전히 마음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더 입맛이 쓰다. 모른 척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인가.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하던가? 그 또한 변명치곤 우습다. 인식조차 못하는 거라고 치자. 꼰대라서... 그 단어를 정말 싫어하지만, 선생도 "남자는 감성적이면 못써!" "강간시도 정도는 남자다운 거지!" 라고 교육받고 자란 이땅의 불쌍한 꼰대라서.

잘못인 걸 알고도 외면한다기엔 너무 악하고 잔인하지 않은가. 단테의 11번째 인페르노가 알고도 모른척 하는 자들이 가는 지옥이던가?

쓰다. 쓰다. 정말 쓰다.

존경하던 소중한 별 하나를 잃어버린 기분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씨(BookC) 2020-08-2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고은, 안희정, 박원순에 이어 황석영......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낯익은 기시감이 아닌 낯설은 기시감.

그제야 문득 시인의 약력을 보니 83년생이란다.

허... 막내 사촌동생 보다 어리디 어린 나이.

2천년대에 청춘을 보냈을 이의 감성치곤 올드하다.

이 감성은 상상의 산물인가. 아니면 진짜인가...

창작이 굳이 다큐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냥... 문득 궁금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이것 한권 만으로 십자군 연대기라기엔 좀 부족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시리즈와 함께 읽으면 상호보완적 대척점을 이룬다. 마치 건담 우주세기가 지온공국과 지구연방 양쪽의 입장을 모두 보여주는 것처럼.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양쪽 모두의 시선으로 역사를 보게 한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