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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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격무에 시달리다보니 자꾸 휴식의 의미로만 독서를 활용하게 된다.

덕분에 앞뒤 재지 않고 닥치는대로 힐링용 에세이들을 사들이는 우를 범했다.

그 중 가장 거하게 낚인 책.

앞으로는 가벼운 에세이라도 절대 앞 뒤 재고 사겠다는 결심을 해본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다분히 페미니스트 전사 냄새가 풀풀나는 이 제목은 대체 출판사에서 지어준 걸까? 아니면 작가 본인의 아이디어일까?

올해 읽은 책들 중 가장 실소가 나오는 페이크 마케팅이 아닐 수 없다.

한국에서의 페미니즘이란, 분명 관심을 끌 수 있는 뜨거운 화두요. 잘 팔리는 상품이긴 한가 보다.

페미니즘 붐이 몰아치니 아예 기획을 그렇게 잡았던 것인지, 저자도 초반부엔 양념처럼 페미니스트 냄새를 풍기려 애쓴다.

김제동의 말말말을 비판하거나 남녀 가사노동의 차이 같은 걸로 부당함을 토로하는 등 sns나 블로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상식적이고 짧은 글들로 말이다.

허나 시종일관 기묘한 느낌.

저자가 도통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불편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관심도 없고, 그냥 팔리는 옷이니까 겉핥기 식으로 억지로 걸쳐봤다는 느낌?

 

 

하이힐을 신고 나갔다가 집에와서 벌겋게 달궈진 발이 아파 투덜거리던 저자의 일화다. 

14살 아들이 대뜸, 그러게 왜 하이힐은 신었냐며, 엄마는 결혼도 했으면서 누구한테 잘 보이려는 거냐며 잔소리를 한다.

그만 실소가 나왔다.

하이힐이 젊은 미혼여성들의 전유물이던가? 책에서 수차례 언급되었듯 저자는 고작 40대.

아들의 견해에 의하면 하이힐은 누군가에게 잘보이려 젊은(?) 여자들만 신는 전유물이며 나이들면 졸업해야 하는...40대 이상기혼녀에겐 맞지않는 물건이다.

제 깐엔 엄마의 발건강을 염려한다고 한 소리겠지만, 필시 어딘가의 어른에게 주입된 요상한 논리를 펼치는 아들의 말에, 나는 페미니스트이자 워킹맘인 저자가 내 좁은 시야조차 뻥 뚫리게 해줄 멋진 한마디라도 툭 던져줄 줄 알았다.

나 조차도 내 아들이고 조카였다면 여자들이 누구한테 잘보이려고 힐을 신는 게 아니란 말 정도는 해줬을 것 같거든. 

헌데 저자는 이제 나이를 먹어서... 하이힐을 신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며 자신의 늙음만을 서글피 한탄한다.

아들은 엄마의 표정이 안 좋으니 그저 어리둥절...

그렇구나.

저런 아이들이 그대로 자라 사회에 풀려나니, 지성의 장이라는 대학에서도 노브라인 여학우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다 학내 게시판에 자기가 봤는데 노브라더라. 브라 좀 하고 다니라는... 선배요 오빠의 탈을 쓰고, 걱정해서 그런다는 허울 좋은 무례한 잔소리를 해대는... 자신의 행동의 어느 부분이 잘못된 건지 도통 모르는... 그런 어른으로 자라는 거구나.

 

문득,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아직도 가끔 힐을 신으시는 존경하는 노교수님이 떠올랐다. 

요즘 젊은 사람들의 킬힐과는 다르겠지만, 칠순이 다되셨음에도 누구에게 잘보이려 신거나 입는 것이 아닌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보여주는 그 교수님의 패션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하고 존경한다.

나도 빨리 노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드는 분들 중 하나이다.

헌데 저자는 또 한번 어이없는 에피소드로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어리바리하다 잘못 내린 지하철 역에서 정장 재킷 입고 안전요원 띠를 두른 할아버지께 잔소리를 들었을 때의 일화다.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나. 나처럼 늙은이도 아니고. 파란색 버튼 눌러요. 문열라니까." 하시니, 

"죄송합니다. 고맙습니다."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저자는 기분이 아주 좋았단다.

<하루종일 무료하고 심심했을 할아버지에게 잠시나마 존재의 이유를 제공해드렸으니> 야단을 맞아도 기분이 좋더란다.

여기선 실소조차 안나왔다.

엄연히 일터에서 일하고 계신 분께 이 무슨 망발인지.

노인들이란 존재의 이유가 없는 부류인가?

젊은 사람을 야단치게 해드리는 걸로 잠시나마 존재의 이유를 제공해 드렸다?

장애인은 동정받는 존재가 아님에도, 사회가 나서서 동정해야 하는 존재란 프레임을 씌운다며 애석해하던 작가가,

노인들은 늘 무료하고 할일 없는 존재라는 요상한 프레임을 씌워버린다.

이 오만에 격렬한 불쾌감을 느끼는 내가 이상한가?

 

 

 

이 책은 사람들이 널리 공감할 만한,(귀여운 딸과의 일상이나 돌아가신 엄마와의 에피같은...) 꽤 감상적인 이야기들에 워킹맘 페미니스트의 양념을 뿌린 채 잘도 팔려나간다. 베스트셀러란다.

숱한 세상의 영화 중, 하필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사랑들을 유달리 좋아하며, "여고생이 왜 남자랑 자는줄 아세요? 외로워서요." 라는 은교의 대사가 자몽처럼 시고 시큼한 분홍즙이 나올것 같다는 저자가 페미니스트와는 일백만광년은 멀어 보이는데도 말이다.

 

해괴하다. 진짜 해괴한 책이요 해괴한 페이크마케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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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ne_Hebuterne 2017-08-17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기웃거렸는데 다스베이더 님 리뷰를 읽은 것이 정말 다행!!

akardo 2017-08-1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안 읽어봤지만 홍상수 영화 좋아하고 은교에 관해 의아한 얘기 늘어놓는 거 보니 안 읽길 잘한 것 같습니다.

베란다위에뜬달 2019-02-09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뿐히 피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