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용도 (양장)
니콜라 부비에 지음, 티에리 베르네 그림, 이재형 옮김 / 소동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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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를 모으는 취미는 없다.

한 때는 있었지만... 다시 읽지 않는 책들마저 다 짊어지고 산다는 것에 회의를 느낀 뒤론, 정말 최소한의 책들을 제외하면 완독 후 바로바로 정리해 부피를 늘리지 않게 되었다.

이 빠진데 없이 빼곡하게 꽂힌 장서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젠 계속 읽히지 않고 꽂혀만 있는 책들을 보면 어쩐지 내가 그 책을 가치 없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 같은 죄의식마저 든다. 덕분에 오늘도 서재에서 정리할 책들을 강박적으로 골라냈다.

하지만, 무려 670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은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정리되지 않고 함께 가게 되지 않을까.

 

세상의 용도.

여행기다. 1953년에서 54년 사이, 작가인 니콜라 부비에와 화가인 티에리 베르네, 두 청년이 제네바에서 유고슬라비아, 터키, 이란, 파키스탄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카불까지의 기나긴 길을 작고 낡은 피아트를 타고 여행했던 이야기.

내게는 단지 그들의 여행 경로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가로지른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했던 책이다.

 

아나톨리아... 입 속으로 소리내는 것만으로 밑도 끝도 없는 서글픔이나 애잔함이 뒤엉키는 곳.

 

내가 아나톨리아에 느끼는 감정은 니콜라 부비에가 이스파한의 왕립사원에서 느끼던 서글픔과 비슷하지 않을까.

이스파한... 17세기에 무려 인구 6만의 도시, 전 세계에서 가장 번잡했을 아케메네스 제국의 수도.

한 때는 사원의 광장에 가득했을 소란함과 번잡함은 어느새 다 사라지고 이제는 한 때 화려했지만 빛바랜 의상을 걸친 늙은 무희처럼... 인적없이 남루해진 샤 아바스의 위대한 건축물들로 가득한 곳. 

 

사파비 왕조의 우아하고 거대한 기념물들은 마치 너무 커져버린 옷처럼 도시 위에 떠있다.

폭풍우가 한번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진흙으로 된 타일들이 떨어져나갔다. 그래봤자 백만개가 넘는 타일 중에 수십개에 불과하고, 모든 게 너무나 넓어서 뭐가 없어졌다는 표가 좀 나려면 50년은 태풍이 불어야 할 것이다. -p406

 

니콜라 부비에가 이스파한의 왕립사원에서 바람에 날려 떨어지는 타일들을 보며 애잔해 한 뒤로 벌써 60년도 더 흘렀는데...

지금 그 웅장한 사원의 아름다운 타일들은 모조리 바람에 날려가고 하나도 남지 않았을까?

 

왕립사원이란 아마도 샤 모스크를 말하는 듯 하여.

찾아보니 여전히 아름다운 푸른 타일들이 웅장한 모스크의 돔 지붕에 가득 붙어 있다.

다행히 그 오랜 세월에도 다 떨어지진 않은 듯 하다.

아니면 이란 정부에서 관광산업을 위해 대대적인 개보수를 했거나...;;

 

어쨌든  이 책은 완독한 뒤에도 계속 내 침실의 협탁 위에 있다.

그리고 여행이 가고 싶을 때마다 그 지역에 해당하는 단락을 들춰본다.

그럼 버드나무가 드문드문 서 있는 작은 계곡 한가운데, 거무칙칙한 얼굴의 세관원들이 서 있는 이란의 국경이나. 벽토로 지어 푸른색으로 문을 칠한 집들, 이슬람 사원의 뾰족탑, 사모바르 주전자에서 솟아오르는 김과 강가의 버드나무가 금빛 레몬색에 잠겨있는 나른한 봄의 마하바드로, 안개처럼 자욱한 아편연기로 가득한, 터번을 두른 사내들이 흔들리는 트럭 짐칸으로 순식간에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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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9-21 0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도 멋지고 다스베이더 님의 생각도 멋지시네요.

아나킨 2017-09-21 19:10   좋아요 1 | URL
별거 없는 감상글에도 좋은 말만 해주셔서 부끄럽습니다.ㄱㅜ

munsun09 2017-09-21 20:17   좋아요 1 | URL
전 아직도 책꽂이에 꽉 찬 책들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데 님처럼 비움을 실천할 때가 오긴 와야지 싶은데 쉽지가 않네요.
감사합니다

아나킨 2017-09-21 20:44   좋아요 1 | URL
엌! 장서 수집 취미 버리지 마세요. 공간만 허락한다면 소장하는 취미도 참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남들의 소장목록을 엿보는 건 좋아합니다. 그 사람의 취향과 살아온 역사가 보여서 참 좋아보여요. 전 그냥 서재가 무척 협소한데다 꽉 찬 것보다 비어있는 공간을 선호하는 아주 개인적이고 몹쓸 습성이 있을 뿐이죠. ^^;>

munsun09 2017-09-21 20:49   좋아요 1 | URL
아직은 님의 말씀대로 장서수집을하고 언젠가는 비워야 될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