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
캐서린 호우 지음, 안진이 옮김 / 살림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실 ‘최강대국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면서 미국사의 그늘진 부분을 복원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소위 서부개척시대에 대한 관점의 변화이겠지요. <인디언=악, 백인 기병대=선>이라는 철저한 이분법 위에서 ‘빛나는 프론티어 정신’을 자랑스러워했던 서부개척의 역사가 사실은 잔혹한 인종차별의 역사요, 식민지개척의 역사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다지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세일럼의 마녀재판’으로 불리는 미국에서의 마녀사냥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마녀’의 누명을 씌워서 처형했던 중세말 유럽의 마녀재판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이러한 마녀재판이 청교도 사상이 지배하던 식민지 개척시기 미국에서도 있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청교도들은 성탄절마저도 이교도의 관습으로 여기고 배척했던 사람들로서, 현재 우리나라와 미국의 근본주의 목사들도 울고 갈 ‘슈퍼 근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마저도 부족하던 시절, 청교도들에게 질병과 불행한 사건을 만났을 때 행해야 하는 것은 기도와 회개 뿐, 그 외에 행하는 민간요법은 모두 신성모독이며, 악마의 사주를 받은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캐서린 호우의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은 17세기 후반 미국 청교도사회에서 벌어졌던 마녀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절묘한’ 소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절묘하다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인 캐서린 호우가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무게있는 주제의식과 역사적 사실을 비트는 장르문학적인 상상력 사이에 줄을 매어 놓고 그 위를 오가며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주려고 노력합니다.

저자의 의도대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번 놀랐음을 고백합니다.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 처음 제목만 보고서 유행을 타고 새로 나온 아동용 판타지 문학이 아닌가 했습니다. 마치 [해리포터와 ○○○○○]하는 식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초반부를 읽어가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물과 배경에 대한 묘사도 꼼꼼했지만, 무엇보다 ‘마녀사냥’이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00년의 시차(20세기 후반의 미국과 17세기 후반의 미국)를 두고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이야기는 마녀사냥이 가지고 있는 ‘집단의 광기’라는 인간사회의 어두운 치부를 슬며시 백주대낮으로 끌어냅니다. 이것이 ‘주제’ 측면에서 느낀 첫 번째 놀라움이었습니다.

이 무거운 주제를 저자는 어떻게 해결할까 흥미있게 보다가 두 번째 놀라움을 만났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마녀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장르문학의 상상력은 우리가 가진 기존의 편견과 지식을 이렇게 단번에 전복시켜 버립니다. 이제 <마녀재판=무고한 사람들에게 씌워지는 누명>이란 역사적 사실은 비틀어졌습니다. 최소한 이 책 안에서 마녀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가 오랫동안 면밀히 조사해 온 식민지 시대 미국 거주자들의 행태, 복장, 식생활, 습관 등은 마치 그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생동감을 부여합니다. 이것이 ‘재미’ 측면에서 느낀 두 번째 놀라움이었습니다.

소설적 상상력이긴 하지만 캐서린 호우의 이런 비틀기는 내게 ‘마녀’ 또는 ‘주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녀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마녀재판’에 대한 반감을 가지면서도 ‘마녀’의 형상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고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거나 거대한 냄비에 온갖 동식물(두꺼비나 고양이 등등)을 넣고 끓이며 큰 주걱으로 젓는 쭈그렁탱이 늙은 할머니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을 읽고 그런 이미지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사회에서는 주변에 언제라도 존재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병에 걸렸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다양한 민간요법(주로 약초)과 자연 속의 기(氣)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일종의 ‘동네 주치의’들이자 ‘술사(術士)'들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녀재판에서 기소된 여자들이 행했다고 하던 치료법, 그녀들의 언어(주문)의 실체는 중세시대 관념화된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 그러니까 종교가 좀 더 현실의 개념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던 원시 기독교 시대의 색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과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고방식, 그래서 질병이나 불행을 하나님이 노했다는 징후로 해석하던 청교도적 사고방식 하에서, 병과 불행에 맞서기 위해 일개 개인이 비밀스러워 보이던 구전 형태의 과학의 힘을 빌리던 것은 바로 ‘사악한 악마의 주술’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청교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질서와 신성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연과 대화하던 사람들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나아가 악마의 편에 세워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켰던 것입니다.
이 시기의 종교재판관들과 마녀로 몰려 화형대와 교수대에서 처형된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은 그로부터 300년 이상 시간이 흐른 21세기 현재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은 재미도 있었습니다. 묘사가 지나치게 많고 사건 전개가 빠르지 않다는 점이 지루하다고 지적하는 경우도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서서히 흘러가는 흐름의 책을 좋아하는지라 잘 읽혔습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성실성이 좋았습니다. 미국 식민지 개척시대의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당시의 생활상과 모습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준비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인 캐서린 호우의 선조가 바로 세일럼의 마녀재판 당시 희생된 사람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호우’였다니... 혹시 자신들은 마녀가 아니라는 절규 속에 죽어간 죄없는 여성들의 외침이 그 후손을 통해 이렇게라도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닐까요.


댓글(4)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0-04-0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었지만 이렇게 훌륭한 리뷰를 남기지는 못했습니다.
글의 배경 분석과 의미까지, 잘 읽고 추천 드리고 갑니다.

얄리얄리 2010-04-02 18:28   좋아요 0 | URL
아이쿠.. hnine님.
유명하신 분께서 이렇게 누추한 서재에 찾아오셔서 글을 남겨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저 진짜 허둥지둥하고 있습니다. 서재도 못 치워서 앉으실 자리도 없었을텐데...)

저 지금 hnine님의 서재에 놀러가서 눈팅하고 왔는데 많이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찾아뵙고 님께 내공 전수를 좀 받아야 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0-04-1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계속계속 드는 생각.
마법만 안썼다면 좋았을텐데.
이건 흡사 엄숙한 결혼 예식을 치른 신랑 신부를 만세삼창 장난질을 쳐서 성스러운 예식을 장난으로 반전시키는 그런 결혼식 같지 뭡니까. 역사 고증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아무것도 될 수 없었을 거란 생각까지 했어요.

얄리얄리 2010-04-13 15:16   좋아요 0 | URL
저도 동감이에요. 갑자기 짠! 하고 나타나는 해리포터..
그 외에는 의외로(?) 괜찮은 책인 것 같았습니다. 저자의 고증도 성실했고, 무엇보다 잘 모르던 미국의 마녀재판에 대한 역사도 흥미로웠구요.
아.. 그리고 또 한가지 이후에 독서주제로 올릴만한 관심사가 생겼는데, 바로 연금술이에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서양의 연금술이란 것이 그냥 잘 알려져 있듯이 금을 합성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뭔가 사회적으로 복잡한 양상이 얽혀 있다는 느낌이 드네요.
 
허풍선이 남작 뮌히하우젠
고트프리드 뷔르거 지음, 염정용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오래전에 뮌히하우젠이라는 주인공의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림이 많이 들어간 [허풍선이 남작의 모험]을 읽었다. 나는 아직도 달리는 말의 뒤를 따라온 늑대가 엉덩이부터 목까지 말을 파먹어 들어가 마침내 말의 껍데기를 둘러쓴 늑대가 마차를 끌게 된 에피소드의 그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 그림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밤에 화장실 가는 것도 겁이 났던 일을 기억한다(그 때만 해도 화장실이 밖에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허풍선이 남작 뮌히하우젠]을 읽으면서 잊고 지냈던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생각나면서 즐거운 독서시간을 보냈다. 주인공의 이름이 뮌히하우젠이라는 점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물론 나이를 먹고 세상을 경험한 시간이 길어지면서 어릴 때와 같이 남작의 허풍에 개연성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책을 읽는 내내 기분 좋은 향수를 느꼈다. 왜 사람들이 추억을 사진에 담아 보관하려 하고, 지나간 물건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를 새삼 실감한 책읽기였다고 할까.

우리 주변에도 말과 행동에서 남들보다 과장이 심한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흔히 ‘허파에 바람들어갔다’거나 ‘오바한다’라고 하면서 어딘가 신뢰성이 부족하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부지불식간에 내리게 된다. 그런데 뮌히하우젠 남작의 허풍은 단순한 ‘과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백문이 불여일견. 남작이 말하는 에피소드 몇 가지를 보자.
 

                   
어느 날 밤에 말뚝에 말을 묶어놓고 잠이 든 뮌히하우젠 남작.
아침에 일어나니 말은 행방불명.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은 교회 지붕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알고 보니 폭설이 내린 줄 모르고 눈 위에서 잠든 것인데, 밤새 눈이 모두 녹아 버린 거다.

                       
전쟁중에 열심히 말 달리며 싸우던 남작.
잠시 숨을 돌리면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데... 이 놈의 말이 물을 먹어도 먹어도 멈추지 않는거다. 알고 봤더니 어느 틈엔지 몸통 반이 날아가 버린 말. 그러니 물을 아무리 마셔도 뒤로 다 빠져 나오고 계속 목마를 수밖에.

                              

해마를 타고 바다를 지나가는 뮌히하우젠 남작의 아버지.
뒤에 잘 보면 바닷가재가 매달려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게 바로 ‘바닷가재 나무’
 

                                            

멋진 뿔을 가진 사슴을 발견한 남작. 하지만 총알은 다 떨어졌고....
임기응변으로 가지고 있던 버찌씨를 장전하여 사슴의 머리에 발사하였다.
몇 년 후 다시 마주친 사슴의 머리에는 버찌가 주렁주렁 달린 나무가 자라 있었다.
 

                          

한 쪽 콧바람만으로도 풍차를 돌리고 배를 날려버리는 남작의 하인.
뮌히하우젠 남작은 이런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하인을 몇 명 더 두고 있었다. 빈에서 콘스탄티노플까지 몇 시간만에 다녀오는 발빠른 하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있는 귀밝은 하인, 세계 최고의 천하장사 등등.

                                         

뮌히하우젠 남작이 만난 달나라 거주민.
몸은 거대하고 머리는 신체와 분리해서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음식은 한 달에 한 번씩 배를 열고 집어 넣으며, 성기가 없어서 아기도 낳지 않고, 열매처럼 아기가 나무에 열린다.

뮌히하우젠 남작의 허풍은 믿을 수 없고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한 것들 뿐이지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너스레를 떠는 남작의 모습이 그다지 밉게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은 허풍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달나라에 다녀온 자신의 말이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직접 달에 가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사실임’을 확인해 보라고 오히려 큰소리치는 남작의 모습은 귀엽기까지 하다.

그럼 뮌히하우젠 남작의 이런 엄청난 허풍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남작의 허풍에 끝까지 일관된 웃음을 지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작품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중후반 시기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겠다.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는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전 유럽으로 확대되면서 물적(物的) 지배의 관념이 팽배해지던 시기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절대왕정 체제가 서서히 몰락해 가면서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새로운 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하고 있던 부르조아들에게 부도덕한 왕과 귀족들, 성직자들은 비난의 대상이었고, 이들 구체제 지배계층이 영향력을 행사하던 농민들은 새로운 생산양식으로 편입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대상이었다.

그래서 뮌히하우젠 남작의 허풍에서는 쇠락해 가는 귀족중심 사회에 대한 조롱과 풍자가 그득히 담겨 있다. 하는 일 없이 사냥이나 다니고 모험이라는 이름으로 시간이나 축내면서 ‘쓸데 없는 짓’을 하고 다니는 귀족들, 걸핏하면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 안전한 곳에 앉아 승리의 명예만 얻고자 하는 귀족들. 바로 토스타인 베블렌이 지적한 바 ‘유한계급(有閑階級)’이 이 시대 대부분의 귀족들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귀족인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은 실상이 아닌 허풍의 수준에 머무른다. 밉게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에서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기 때문에 허황되다. 새롭게 변화하는 시대를 선도하지도 못하고 전혀 적응하지도 못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조선 후기에 여러 문화적 형태(소설, 시조, 판소리, 가면극 등등)에서 양반의 무능함에 대해 신랄한 풍자와 비판이 이루어진 것과 유사한 맥락이다.

뮌히하우젠과 같이 허풍스럽게 ‘과거’라는 허상을 쫓던 인물을 또 한 사람 우리는 알고 있다. 바로 ‘돈키호테’이다. 이 둘은 저물어가는 시대를 부여잡으려 했다. 하지만 한 개인의 힘으로는 무모하게 도전하여 몸만 축내거나(돈키호테) 술자리에서 허풍을 섞어가며 ‘그 땐 좋았지!’하면서 과거의 화려한 시절을 돌아볼 뿐(뮌히하우젠), 시대의 흐름을 돌려세울 수 없었다. 그렇게 한 시대는 가고, 그와 함께 그 시대를 지배했던 계층도 사라지는 법이다. 그게 허풍이 아닌 실제의 ‘역사’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eong 2010-03-29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재미있는 이야기에 이런 깊은 의미가 숨어있었군요. 어렸을 때 어찌나 재미있게 읽었던지 아직도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정말 압권은 대포알을 타고 정찰을 나가는 장면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마음에도 끽끽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얄리얄리 2010-03-29 16: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재미있게 읽었던 책이었어요.
근데 역시 나이들고 읽어보니 또 다른 '맛'이 있더라구요. ㅎㅎ

대포알 타고 정찰 나가는 장면도 있었어요. 그런데 가다가 중간에 '이거 안되겠군'하는 생각을 하면서 적군이 쏜 대포알을 공중에서 갈아타고 돌아왔답니다.
 
서울은 깊다 - 서울의 시공간에 대한 인문학적 탐사
전우용 지음 / 돌베개 / 200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땅에서 ‘서울’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나 인정하듯이 서울은 정도(定都)된 이후 600년이 넘게 이 나라의 수도이며, 그에 따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분야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도시이다. 어떤 이들은 서울의 이러한 발전상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남한 면적의 0.6%에 불과한 서울시의 독점적 위치를 비판하기도 한다. 서울에 대한 이러한 긍정적, 부정적 인식의 가장 큰 근거는 서울이 바로 ‘수도’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도시’로서의 서울은 ‘수도’로서의 서울과는 다소 다른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한다. 물론 한강 하류 지역이 가진 전략적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제의 초기 도읍이었던 ‘위례’시대를 빼고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서울은 ‘수도’가 아니었고, 그래서 정치적 중심지도, 경제적 중심지의 위치를 차지하지도 못했다. 서울이 가지는 현재의 독점적이고 절대적인 위치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 한 국가의 수도가 됨으로써 시작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따라서 서울에서 ‘수도’라는 딱지를 떼어 버리고, 이 ‘도시’가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 아닌가 한다.

전우용의 [서울은 깊다]는 그런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관공서의 여행안내서가 가지는 딱딱한 공무원체를 싫어하고, 일부 여행기들이 가지는 과도한 감상의 남발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워 한다. 그런 점에서 서울이 어떻게 ‘근대성’을 확보하면서 주민들을 통제하는 거대도시가 되어 왔는지를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차분하게 반추한 이 책은 서울에 대한 관광 안내서로는 부족할지 모르나, 도시(서울)의 형성에 대한 뜻깊은 고찰이라고 평가한다.

도시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압축적으로 표현된 근대적 공간’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도시를 근대적 공간이라고 평가하는 것에는 두 가지 함의를 내포한다. 무엇보다 전통사회에 비교해 볼 때 도시는 근대적 특성,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적 특성’을 가진 공간이라는 의미이고, 둘째 이와 같은 근대적 특성은 그 상대 개념인 전근대적 농촌(산촌 및 어촌까지 포함한 개념)과 질적으로 구분되는 확연한 차별성을 가지는 공간이라는 의미이다.

도시에 ‘근대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위해서는 도시 속에서 사회적 관계, 특히 위계적 질서라는 관계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관계는 농촌과 달리 도시가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벗어날 때에 비로소 형성된다. 도시는 공간과 시간의 제약조건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보도록 하자. 여기에 ‘도시’라는 말 대신에 대한제국 선포를 즈음한 구한말의 ‘서울’이란 단어를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도시는 농촌과 외형적으로 아주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는데, 바로 성벽(또는 목책, 울타리 등등)이라는 것으로 대표되는 공간적 경계선을 가진다는 점이다. 부르주아라는 말도 ‘성 안에 사는 사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조선시대 서울을 생각해 보면 서울의 경계는 딱 사대문 안, 그러니까 성문을 열고 닫는 종소리를 들을 수 있는 성벽까지가 경계였다.
성벽은 도시를 농촌이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공간으로 만드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문제는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면서 단순한 구분점에 불과했던 성벽이 그 안의 사람들과 밖의 사람들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계선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농촌 사이의 섬’ 정도의 상대적으로 대등한 의미를 가지던 도시는 본격적으로 생존과 확장을 위해 농촌을 수탈하는 일방적이고 위계적인 의미를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도시의 성장사는 곧 농촌의 수탈사이기도 했다. 생산 보다는 소비를 그 특성으로 하는 도시는 농촌에 무언가를 ‘공급’해 주기 보다는 농촌으로부터 각종 생산물과 사람(인재)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태생적 특성을 가진다. 따라서 근대사회 도시가 주위 농촌을 수탈하고 ‘문명’을 생산하여 집적하는 동안 농촌은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도시는 이렇게 집적된 생산성을 바탕으로 주위로 확장된다. 바로 공간적 한계를 뛰어넘게 되었다는 의미인데, 이에 따라 과거에는 ‘농촌 사이의 섬’과 같았던 도시가 인구집중과 더불어 ‘메갈로폴리스’가 되어 간다. 이건 아마 누구나 경험적으로 느낄 것 같은데, 경부선 기차를 타고 부산 쪽으로 내려가면 천안 정도까지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농촌이라기보다 오히려 도시의 연속에 가깝다. 인천 방면도 마찬가지로서, 서울지하철이 연결되는 곳은 어디든지 이제는 ‘도시’라고 보아야 할 정도이다.

도시 공간의 확장이 근대적 도시형성과 관련하여 가지는 의미는 사회적 권력관계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일개 도시 수준이 아니라 전체 사회구성원들에게 확장되어 간다는 점이다. 자연적 특성이 강한 농촌에 비해 도시 공간은 인위적으로 구성되는 특성이 강하기 때문에 도시 공간이 확장된다는 것은 도시가 가지는 인위적인 통제력이 확장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권력’이란 ‘공간을 개조할 수 있는 힘’으로 정의내릴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미미한 권력을 가진 나 같은 사람에게 개조할 수 있는 공간은 내 책상 주변 정도이지만, 서울시장이라면 서울시를, 대통령이라면 한 국가 전체의 공간을 개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추진한 청계천 복원사업이나 지금 추진하는 ‘4대강 사업’도 공간에 대한 권력의 크기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어쨌거나 도시는(엄밀히 말하자면 도시공간을 개조할 수 있는 권력자들은) 건물과 도로, 광장과 공원 등을 인위적으로 배치하고 개조함으로써 그 안에 생활하는 사람들의 시선과 동선을 통제하고, 사고와 태도를 지배하는 효과를 노린다. 조선왕조가 서울로 천도하면서 남북 방향의 지금의 세종로를 중심대로로 삼고 그 주위에 관가와 육의전을 배치한 것이나,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가 경희궁을 육교로 연결하고 동서 방향의 종로를 중심대로로 인식한 것도 다 이런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마포에서 동대문까지 종로를 관통하던 전차길이 그대로 지하철 1호선으로 계승된 것도 도시가 가지는 공간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다.

도시에 근대적 공간이라는 특성을 부여하여 거주민들의 사고와 태도를 지배하는 효과를 노린다고 할 때 반드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시간’에 대한 통제이다. 사실 산업의 주된 형태가 농업이었던 전통 사회에서는 시간을 엄밀하게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해가 뜰 때쯤 일어나 일을 나갔다가 해가 질 때쯤 하루를 마무리지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전통 사회의 시간 관념에서는 중요한 것은 대체적인 ‘절기’ 정도를 아는 것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수공업과 서비스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도시 생활에서는 시간을 정확하게 준수해야 할 필요성과 함께 시간을 ‘나누고’, ‘절약하는’ 양적인 개념으로 바꾸는 것이 중요해졌고, 이를 위해서 현재의 시간을 도시민 모두가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필요하였다. 주요 역을 중심으로 도시 곳곳에 나타나기 시작한 시계탑이 바로 그런 역할을 담당했으며, <학교종이 땡땡땡>같은 노래들은 시간 관념의 중요성을 아이들에게 각인시켰다.
이제 도시는 인위적인 구조물들을 통해 거주하는 사람들을 시선과 동선을 통제할 뿐만 아니라 시간을 미분화함으로써 사람들의 생활 양상을 통제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예전처럼 시간을 두루뭉실하게 썼다간 무능력하고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우리 사회가 소위 Korean Time을 얼마나 창피하게 여겨 극복하려고 했던가!!) 시간이 양적인 개념으로 바뀌면서 그 동안 질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여지던 근무시간이나 근무량 등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결국 생산성이 높다거나 효율적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시간에 많은 물품을 생산한다는 바로 ‘시간당 ~’ 하는 개념이다. 이 양적인 개념이 우리들의 생활 형태와 근로 형태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크고, 그 영향력이 확대되어 왔는지는 아마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실감할 것이다.

근대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던 대한제국 시기 서울시민들이 가장 경이롭게 받아들였던 변화가 무엇이었을까? 역시 전차가 아니었을까? 말과 소, 또는 인력으로 움직여야 했던 교통수단에서 벗어나 전에 보지 못했던 시커멓고 거대한 물체가 달려오는 모습은 당시에 경이로움 자체였을 것이다. 이렇게 전차는 ‘도시’가 가지는 공간적 한계를 뛰어 넘도록 하였다. 마찬가지로 시계는 전통 사회가 가지고 있던 시간적 한계를 뛰어 넘도록 하였다. 이제 시간은 절약할 수도, 낭비할 수도, 더하고 빼고 나눌 수 있는 사물이 되었다. 이렇게 세분화되어 버린 시간은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동력과 어울려 도시생활 자체를 물질 중심적 공간으로 바꾸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현대 서울의 모습이 비로소 구성되기 시작하였다.

이제 글을 마무리지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서울이 가지는 절대적이고 독점적인 현재 위상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서울은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 필수적인 것은 오히려 결핍된 공간이다. 물품이야 산더미처럼 쌓아 놓았는지 모르지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맑은 물, 깨끗한 공기, 신선한 음식물, 여유로운 생활에 언제나 목말라 한다. 여러 동물실험에서도 증명되지 않았는가. 생존에 필수적인 요인들이 제한된 상태에서 개체의 밀도가 높아질 때 그 생명체가 얼마나 폭력적이 되고, 얼마나 공격적이 되던가.
나는 서울의 절대성과 독점성을 이제 지방으로 나누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바로 지금도 정치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세종시 문제가 아닐까 한다. 누구든 기회만 있으면 올라오려고 하는 서울, 지방경제가 질식하고 있다는 절박한 외침의 한가운데 있는 서울, 한국의 다른 도시나 농촌은 감히 넘볼 수 없는 특권을 유지하고 있는 서울. 계속 커지고 수탈하여 규모가 커져가는 것은 무엇이든 폭발하거나 블랙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세종시 논란이 서울시민의 삶의질을 위해서라도 서울의 권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뱀다리
사실 이 글을 쓰기 위해 반드시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 주제가 있었다. 바로 <근대=자본주의>라는 다소 도식화된 논리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적용 가능한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런 시대구분은 서양사, 특히 유럽사적인 성격이 강한데, 한국사에 있어서 ‘근대’를 어떻게 구분짓느냐의 문제와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고종 연간을 중심으로 하는 구한말을 우리 사회에서 본격적인 근대로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물론 임진‧병자 양란 이후 생산성의 증대와 신분제도의 문란을 근대사회가 가지는 전형적인 특징으로 파악할 수도 있겠으나, 이 시기는 하나의 태동기 또는 발달기 정도로 보고 중세시대의 생산양식과 사회양식이 혼재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근대’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대한제국 칭제를 중심으로 한 고종 연간으로 설정했다고 보면 되겠다.

대신 우리 사회의 근대성이 지금 극복되어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할 정도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다. 이런 점에서 10여년 전에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포스트모던 열풍과 미셀 푸코는 그 의미와 아울러 비판점이 분명 존재한다. 나중에 ‘근대’라는 시대구분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하게 내 입장을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 ‘근대사회’로의 이행은 여전히 그 과정중에 있다는 생각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포스트모던’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다소 의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마장 가는 길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15
하일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1.
1980년대 후반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변화의 시기였지만 개인적으로도 잊혀지지 않는 시기였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게 아직도 귀에 선한 소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들리던 학교 앞 대학교에서 울려퍼지던 구호와 노래 소리, 그리고 뒤이어 터지는 최루탄 소리였다.
TV를 보면 가끔 연예인들이 군대내 화생방 훈련장에서 눈물 콧물 쏟아내는 장면을 볼 때가 있는데, 난 그걸 중학생 때부터 해왔다. 최루가스가 스며든 교실 안에서 울며 짜며 수업을 받다가 결국에는 그 날 수업을 마치지 못하고 또다시 최루가스 범벅인 채로 집에 돌아와야 했던 경험은 이제 그 시대에 대한 개인적인 추억이 되었다.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화염병과 최루탄의 가투(街鬪)가 상징하듯이 최소한 1990년대 초반까지 우리 사회는 대립하는 두 집단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불’의 시대였고, 날카로운 예각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집단’의 시기였고, ‘조직’의 시기였다.
정권은 정권대로 ‘사회질서’와 ‘총화단결’을 모토로 사회불순분자들에 대응하려고 안간힘을 썼다면, 그 반대편은 조직의 힘, 단결의 힘, 대오의 힘으로 거기에 맞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두 집단이 지향하는 바는 달랐을지 모르지만, 수단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조직화와 집단 속에서 하나의 힘으로 뭉치는 것을 강조했고, 그 속에서 개인적 삶과 가치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집단이 강조되려면, 집단의 가치를 절대화하고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작동된다.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로 환원되던 시기였다. 사회변동도, 전세계적인 혁명도, 그리고 심지어 개인의 사생활 하나하나까지도 변화를 추동하던 동력을 이데올로기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새로운 사회를 여는 길이라고 여겼던 시대였다.

2.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은 묘하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의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한 시대가 가면 그와 더불어 그 시대의 지배적 가치 역시 종언을 고한다는 사실이 경험으로 다가왔다.

[경마장 가는 길]은 5년 반 동안의 프랑스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R이라는 남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귀국 후 R은 프랑스 유학 도중 3년동안 동거하던 J와 해후한다. 반갑게 맞아 줄 것이라 생각했던 R과 달리 J는 둘 사이에 거리를 두려고 한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때론 낙담하고 때론 화내면서 한국생활에 회의감이 드는 R.
여기에 R의 가족생활이 겹쳐진다. 그의 부모와 여동생은 질병과 가난 가운데도 유학비를 보태 주었고(이런 행동에 대한 보상은 전혀 없다), 그의 아내는 이혼하자는 R의 제안을 거부한다.

[경마장 가는 길]이 놀라운 점은 철저하게 객관적인 묘사를 통해 R과 주위 인물들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의 심리묘사 따위는 없다. 특별히 독자들의 눈을 확 잡아 끌만한 임팩트 있는 사건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R의 일상은 먹고 잠자고 화장실을 다녀오고 친구를 만나고 다방에 들어가고 여관이나 집에서 잠자다가 가끔 대학에서 강의해 주는 것이 전부이다. 이런 일상을 마치 작가가 R의 그림자가 된 것처럼, 현미경을 들이댄 것처럼 끈질기고 세세하게 하나하나 묘사한다. 무엇보다 그 철저하게 객관적인 ‘묘사’에 기가 질린다.

그래서 R과 J의 삶에서 사회 변혁이라든가 가난한 민중의 삶과 같은 거대담론들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문학을 전공하였지만 어떠한 문학이론도 이들의 일상을 설명하는 데에 이용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그들의 삶, 오직 그들의 일상, 오직 그들의 존재 뿐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의 일상만을 메마르게 묘사한 [경마장 가는 길]이 사회의 변화를 아주 예리하게 지적해 낸 작품이 되었다. R과 J의 일상양식 자체가 그 이전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종언한 새로운 형태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3.
나한테 1992년과 1993년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이라고 말하겠다. 소위 X세대는 이전 부모 세대와 질적으로 달랐다. 공동체의 가치 대신에 개인의 가치를 우선에 두었고, 합리적인 이성과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길보다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감성과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해체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경마장 가는 길]에서 가장 웃긴 장면은 잠자리 요구를 거부하는 J에게 R이 내뱉는 말이다.
                      “네가 그렇게 (나와의 잠자리를) 거절하는 이데올로기가 뭐니?”

처음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웃음이 터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잠자리를 거부하는 여자에게 저렇게 말한단 말인가.
그럼 매일 같이 화장실에 가는 이데올로기는 뭐고, 오늘 점심에 된장찌개 백반을 먹은 이데올로기는 뭐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불과 20년 전만 해도 저렇게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로 환원시키고, 그 속에서 정당성을 찾아온 것이 현실이었다. 믿기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렇게 가치가 충돌하고, 과거와 현재가 짬뽕된 시기에는 부조화와 괴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반드시 생겨난다. [경마장 가는 길]의 주인공 R이 바로 그랬다.
그의 5년은 한국이 아닌 프랑스에서 보낸 시기였다. 그가 귀국하여 다시 경험한 한국문단, 한국학계의 현실은 학벌과 인맥이 지배하고 대필과 표절이 난무하며 이름값으로 자리를 결정하는 곳이었다. 어렵게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나, 그 이후에도 찢어지게 가난한 그의 가정생활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인과의 갈등만 깊어질 따름이다.
‘별 것 아니던’ 동료들이 모두 교수가 되었으나, 정작 그는 겨우 시간강사 자리나 알아보고 다녀야 하는 사람이 되어 겉돈다.

이러한 부조화와 배회를 해결하기 위한 첫 번째 수단이 J와의 잠자리였다. 따라서 R의 일상에서 가장 비중이 높고 중요한 일이 J와의 만남이었고, 그의 현실과의 괴리감을 조금이라도 좁혀줄 수 있는 행동이 J와의 잠자리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건 그의 마음의 안정뿐만 아니라 일종의 보상심리, 또는 자존심 회복의 중요한 과정이기도 했다.

[경마장 가는 길]을 읽으면서 나는 이게 바로 1990년대 초반을 헤쳐온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심리가 아닌가 한다.
386세대는 사회의 가치와 이데올로기에 능숙했다. 그리고 하나의 정치세력을 이루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이제 많은 대학생들은 자신의 ‘스펙’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학연수니, 배낭여행이니 하는 것이 대학생들의 통과의례가 되었다.
문제는 이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버린 세대들, 변화의 접점에 놓인 세대들이었는데,
그들은 정치세력화할 준비도,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스펙을 갖출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서 폭탄처럼 맞은 1998년의 IMF 외환위기.
이들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안정과 보상의 기제가 필요했다. J의 몸에 집착하는 R처럼.

4.
생각해 보니, 이들은 이제 30대 후반이다. 대학을 나올 때 IMF를 겪었고, 결혼하고 안정을 찾아야 할 시기에 금융위기를 겪었다.
앞당겨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떨어야 하며, 비정규직‧계약직의 차별 속에 살아가는 이들도 꽤 된다.
변화의 시기, 그 접점에 서 있던 이들이 찾아내야 할 가치가 무엇일까.
R이 찾아 헤매던, 그러나 한 번도 가 본 경험이 없고 어떻게 가야 할지도 알 수 없는 ‘경마장’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아직 한번도 경마장에 가 본 적이 없다. 따라서 나는 경마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오래 전에 언젠가 한번은 누가 나에게 경마장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적이 있다. 나는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다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누구였는지 지금 알 수 없다. 그가 말한 경마장은 어쩌면 이 도시에 있는 경마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대에 있는 경마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바람 부는 오후에 하늘 아득히 떠가고 있는 신문지처럼 경마장은 지금 공중에 아득히 흐르고 있다. (p56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림으로 읽는 국화와 칼 Picture Life Classic 4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진근 옮김 / 봄풀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세력 확장의 자신감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침략하던 제국주의 시대, 유럽과 미국의 서양인들은 동양인을 침략과 수탈의 대상, 왜소하고 미개한(!) 인종으로 파악했으리라. 그런데 그렇게 무시하던 동양의 섬나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미국의 태평양 함대에 제대로 한 방 먹인다.
충격을 받은 미국 정부는 선전포고와 더불어 루스 베네딕트 교수에게 일본 분석을 의뢰하게 되고 그녀는 일본 이해의 기념비적 저작인 [국화와 칼]을 내놓는다. 전쟁은 새로운 군사기술이나 새로운 정치체제만을 낳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상대편에 대한 세밀한 분석도 가능하게 하는 모양이다.

루스 베네딕트 여사는 우선 일본사회, 일본국민이 가진 이중성을 고찰한다. 일본문화란 세련됨과 고요함, 온순함과 예의의 상징인 국화와 거칠고 야만스러우며 잔혹함과 무사도의 상징인 칼이 공존하는 문화라는 것이다. 대립하는 특성을 가진 국화와 칼이 공존하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화가 있어야만 하는데, 이 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다. 똑같이 생긴 벽돌을 쌓아 집을 짓는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울퉁불퉁 멋대로 생긴 벽돌로는 결코 집을 짓지 못한다. 큰 벽돌은 주춧돌이 되어 기단을 받쳐야 하고, 작은 벽돌 하나하나는 모여 벽을 이룬다. 이처럼 일본 사회에서는 개성의 발현이 억제되며, 자신이 들어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역할과 책임을 다하는 자세가 중시된다. 튀는 사람은 왕따와 이지메의 대상일 뿐이다.
조화를 달성하기 위하여 규격화 못지않게 강조되는 것이 ‘질서’의 유지이다. 여기서 질서는 상호평등한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 때 질서란 상명하복, 상의하달 식의 위계적이고 서열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국내적으로는 최고의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천황에 대한 충(忠)이 그 어떤 덕목이나 미덕보다 우선시되며, 국제적으로는 힘있는 국가의 리더십에 다른 국가들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역사적인 사실로 말하자면, ‘대일본제국’은 아버지, 또는 맏형의 역할이고, 다른 아시아 민족들은 대일본제국의 뜻을 잘 받들어 ‘구미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보호할 ‘대동아공영권’에서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네딕트 여사가 일본문화를 분석하는 키워드로 삼은 것, 그러니까 온(恩)을 갚기 위한 의무, 기리(義理)에 대한 집착 등은 결국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해 개인이 감수해야 할 희생이자 의무를 표현한 셈이다. 천황으로 대표되는 상층의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갚아야 하는(그나마 다 갚지도 못하는) 의무가 되는 셈이고, 주군, 동료, 나 자신을 향한 의리는 사회유지를 위한 희생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확대재생산된다.
일본인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자기수양과 후세 세대에 대한 교육은 조화를 위한 규격화와 위계적 질서를 강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의무와 본분을 달성하기 위해 나의 존재를 잊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반대로 자신만의 개성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파렴치한 것인지를 교육에서 가르쳤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세계를 놀라게 했던 ‘가미가제 특공대’는 이러한 일본인의 특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덴노 헤이카 반자이’를 외치며 천황의 은혜에 죽음으로 보답하고자 하는 미학, 일본에 수모를 안겨주는 연합군(미군)에 대한 국가를 대신한 의리의 실현, 자신을 잊고 오로지 국가의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무념무상, 무아의 경지...

그렇다면 [국화와 칼]이 현재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국화와 칼]을 읽으면서 과연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부터,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계기가 있어서 전체주의적 시각이 자리잡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물론 그런 게 다 일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편리하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인식이란 것은, 특히 사회 전체가 마치 전염병처럼 앓게 되는 ‘사회적 인성’이란 것은 어떤 계기와 정치세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지거나 이용되는 측면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에 대한 한민족의 존경과 자긍심은 예로부터 있었던 것이겠으나, 그것을 성역화하고 민족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또다른 문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생각해 보았을 때, 일본인들에게 조화와 위계의 관념을 확실하게 내면화시킨 것은 역시 메이지 유신이 아니었나 싶다. 주군에 대한 절대적 충성과 복종, 주군이 베푼 은혜에 대한 갚을 수 없는 의무(‘나는 저 분의 은혜로 이 자리에 있다’라는 관념), 주군에 대한 의리, 불명예를 갚기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죽음의 미학. 사실 이 모든 것은 ‘사무라이’의 도덕이었고, 사무라이의 미학이었다. 따라서 하급 사무라이들이 주축이 되어 에도 막부를 붕괴시키고 천황 중심의 정치적 혁명을 일으킨 메이지 유신이 이후 일본 정치와 일본국민의 정신형성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역할한 것은 사무라이의 미학체계를 전일본인들에게 각인시키고 그것을 내면화시켜 군국주의 일본으로 나아가게 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제 주군에 대한 절대적 충성은 개인, 즉, 천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으로 대치되며, 천황이 곧 국가를 상징한다고 할 때 절대적 국가주의로 넘어오게 된다. 자기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전통적 관념은 이제 국내정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모든 국가들이 따라야 하는 원칙으로 확장된다. 물론 그 속에서 일본은 최상위층에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분수에 맞지 않게 튀는 사람은 은혜도 모르는 파렴치범으로, 사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반체제적 인물로 낙인찍히고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다. 이지메로 대표되는 일본의 배타적 문화는 바로 이 시기에 본격화 될 뿐만 아니라, 밖으로 발산하지 못하는 개성을 안으로만 파고들어 가는 소위 ‘오타쿠’ 문화 역시 메이지 유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최근 일본이 겪고 있는 어려움, 단적인 예를 들자면 일본항공(JAL)의 파산과 도요타 자동차의 위기, 몰락해 가는 1억 중산층의 신화는 결국 메이지 유신으로 구축해 온 일본의 발전모형이 파산에 이른 것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상명하복식 조직문화의 경직성과 비창의성, 엘리트주의와 정경유착에서 비롯된 부패, 창의성이 요구되는 시대에 표준화되고 규격화된 ‘모나지 않은’ 인간형이 가져온 한계와 규격을 벗어난 인간에 대한 이지메... 이런 것들이 성장의 한계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 그럼 일본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분수를 지켜야 한다는 도덕은 우리 역시 어릴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오는 말이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게는 근대화와 서구화를 추진했던 유신지사들의 모습은 1960년대 ‘조국근대화’를 부르짖던 우리 군사정부와 오버랩된다. 나 역시 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일주일에 몇 차례씩 ‘국기에 대한 맹세’를 다짐해야 했고, 월요일 아침마다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여 이른바 훈화 말씀을 들어야 했다. 도덕과 사회 시간은 어떤 주제든 결국 조국과 민족에 대한 충성, 부모와 교사에 대한 절대적 순종을 가르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우리가 나라에 충성하는 길은 학생으로서 지금 자리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라는 ‘자기 자리 지키기’를 반복하여 주입당했다.
사상과 생각은 통제되었고, 일치단결 이외에 다른 것은 이단시되었던, 국가와 민족은 절대 비판할 수 없는 성역의 위치였으며, 국가와 민족을 대표하는 지도자는 추앙받아 마땅한 절대적 믿음의 대상이었다. 이 모습, [국화와 칼]이 그리고 있는 메이지 유신시기와, 또는 세계대전 시기 일본과 너무도 흡사하지 않은가. 이 모든 것이 시간적 편차만 있고 공간의 다름만 있을 뿐이지 똑같은 우리의 자화상이 아니었을까.

이제 시간은 많이 흘렀고 많은 것이 변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일제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으며, 국가와 민족의 절대적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터부시된다. 최근에는 그나마 힘들게 쌓아왔던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마저 침해받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법치와 질서, 사회적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말이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 우리와 많은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이란 사실 또한 부인하기 어렵다. 현재 우리의 심성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와 관념들이 근거하고 있는 물적 토대는 일본식 근대화 모델을 따라 추진했던 ‘조국근대화’에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도 일본 못지않게 개인보다 전체를, 개성보다 분수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을 이어 왔으며, 체면을 중시하고 ‘죄보다 수치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국화와 칼]은 대단히 유용하면서 흥미로운 책이다. 일본에 대해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숙명적으로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국화와 칼]이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일본식의 근대화 모델을 따라 지금 여기까지 걸어온 우리 사회에서 일본문화가 드리운 그림자를 고찰해 보는 데에 대단히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것이 2010년 현재 우리가 [국화와 칼]을 새롭게 읽어내야 할 이유이다.

대다수 서양인은 낡은 규칙과 관습에 반기를 들고 행복을 얻으려면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강자의 면모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의무를 이행하고자 개인의 행복을 포기하는 사람이야말로 강자라고 말한다. 그들은 강인한 성격이란 반항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줄 아는 것이라고 믿는다.(p.30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