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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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는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이 발현되는 현상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에 대하여 분명한 근거없이, 그리고 그 행동이 이루어진 전후사정에 대한 이해없이, 때로는 루머에 근거해서, 때로는 질투심이나 이기심으로 인해서 비난을 퍼붓는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Human Stain)]에서 이런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은근한 칼날을 들이댄다. 그가 비판적으로 보는 인간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오점(stain)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감추고, 속이며 부정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둘째, 다른 사람의 밝혀진 오점에 대해서 (자신도 오점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때 ‘자신만이 성자인 척 하는’ 태도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위선이다.

아테나 대학의 전(前)학장인 콜먼 실크는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불명예스럽게 사직한다. 그는 철밥통들이 가득하던 아테나 대학을 학문 탐구로 활기가 넘치는 학교로 변모시켰고, 최초로 흑인 교수를 임용하는 등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수업에 장기간 결석한 학생을 유령에 비유한 스푸크(spook)라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한 순간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spook는 속어로 흑인을 비하하여 ‘검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필 또 그 학생이 진짜 흑인이었다.)
콜먼 실크의 억울함과 분노는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아내마저 사망하면서 극에 달한다. 그런데 이 극심한 분노가 사그러드는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일어난다. 딸보다 나이 어린, 그래서 40년 가까이 나이차이가 나는 30대의 여성, 자신이 재직하던 학교의 청소부로 일하던 여성인 포니아 팔리와 사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콜먼 실크의 자식들조차 각종 억측과 루머를 담아서 그들을 비난하였지만, 서로 가슴아픈 오점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이 진정한 것임을 깨닫는다. 포니아 팔리의 전남편인 레스터 팔리에 의해 현세에서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채로 말이다.

[휴먼 스테인]의 등장인물들은 제목처럼 모두 얼룩덜룩한 오점(stain)을 가진 인간들이다. 필립 로스는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들의 삶이 ‘숨기고자 하는 오점과 비밀’들로 얼마나 가득차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폭로해 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불충분한 것인지, 나아가 오점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이야기해준다.

탄탄대로의 콜먼 실크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파멸의 원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평생동안 부정하면서 감추어 왔던 그의 위선적 태도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콜먼 실크는 ‘당연히’ 백인인 것이라고, 그리고 ‘당연히’ 유태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가던 어느 순간 그의 부모님이 흑인이었음을, 그래서 콜먼 역시 ‘당연히’ 흑인이란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이 아이러니의 절정은 백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의 인연을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콜먼의 행동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건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spook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콜먼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님을, 따라서 그는 누명을 쓴 결백한 사람임을 확신하던 독자들도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청년 콜먼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의 불명예스러운 노년이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출산의 시기, 자녀들이 태어날 때 콜먼 실크는 얼마나 불안에 떨어야 했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백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인종차별을 받지 않고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자신이 가진 흑인으로서의 유전적 형질이 자녀에게서 나타난다면 그의 오점은 백일하게 드러나 버리고 말 것이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갓 낳은 아기를 보러가는 그의 마음은 시한폭탄을 열러 가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책을 보니 그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백인과 흑인의 피를 반씩 섞어 물려받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콜먼 뿐만 아니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의 위선도 그에 못지않다. 다만 그들의 저열함이 콜먼처럼 파급력을 가지고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자기 자녀를 수석 졸업시키기 위하여 콜먼의 가족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는 대신에 콜먼에게 성적 조작을 부탁하는 이웃, 콜먼이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처음 임용한 흑인 교수였지만 그를 배신해 버리는 교수. (이 사람은 콜먼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배신을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하기 위한 미사여구를 일삼는다.) 콜먼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리고 포니아 팔리와의 소문이 돌았을 때, 아버지를 믿기 보다는 세상의 소문에 동조하여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아버지에 대해서 경멸과 비난으로 대우했던 그의 자녀들이 콜먼의 장례식장에서는 울며불며 ‘훌륭했던’ 아버지를 추모하고, 아테나 대학의 건물 중 하나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 다른 교수들과 흥정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위선의 절정은 콜먼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껴왔던 델핀 루 교수에게서 나타난다. 그녀는 콜먼에게 익명의 협박편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적 취향을 담은 이메일을 동료 교수들에게 보낸 실수를 무마하기 위하여 절도 사건을 날조한 후, 자신의 실수와 절도혐의를 모두 죽은 콜먼 실크에게 뒤집어 씌운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 곳곳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을 집어넣었다. 미국과 세계를 흔들었던, 미국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오점을 남긴 클린턴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던 시기를 왜 배경으로 삼았을까. 글쎄. 어쩌면 필립 로스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모두가 클린턴을 비난하는데, 그는 성욕이라는 욕망의 실천자이면서 그것이 외부에 노출된 처지의 사람일 뿐이다. 들키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도 모두 오점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대통령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혹시 이런 태도는 나만 깨끗한 성자인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휴먼 스테인]에서 저자의 주제 의식을 잘 나타내 주는 인물은 오히려 포니아 팔리일 것이다. 자신의 오점을 숨기기에 급급한 콜먼 실크를 비롯한 상류층의 위선과 비교해 볼 때, 포니아 팔리의 삶의 방식은 솔직한 ‘오점 드러내기’로 동정과 이해, 호응을 불러 일으킨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추행과 강간, 남편의 폭력이라는 가부장 사회의 폭력과 자녀의 죽음이라는 상처로부터 생존해 왔다. 누군가를 비난해도 정당성을 얻을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실제로는 읽고 쓸 줄 알았지만) 죽을 때까지도 문맹인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자신의 오점을 세상에 드러내어 비난을 이겨낼 수 있는 ‘당당함’을 획득한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이 언제 들통날까봐 노심초사했을 콜먼 실크, 자신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근거없는 비난을 들어야 했던 콜먼 실크에게 그녀의 이런 솔직한 ‘오점 드러내기’는 일종의 구원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는 콜먼의 오점, 즉, 그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진짜로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포니아에게 사랑할 사람이란 인종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현재 이 순간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각자의 삶에 대해 과도하게 간섭하지만 않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것을 콜먼 실크가 인정하는 순간 콜먼은 팔리아를 향하여 ‘나는 사실 흑인이요’라는 필생의 고백이 나온다.

필립 로스는 책의 앞 부분부터 ‘자기만이 성자인 척하는’ 이라는 어구를 반복하여 사용한다. 물론 이런 태도는 잘못이다. 당연히 우리는 상대방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그가 인생에 대해 가지는 자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니 말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윤리적으로만 생각해 본다면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 말은 과연 올바르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런데 이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우리는 일종의 양비론자 또는 불가지론자가 되어 버린다. 그럼 누가 누구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을까.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내 옆의 가족들과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에 이르기까지 다들 불완전한 존재인데 누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이해와 포용에는 뭐랄까... 일종의 전제조건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와 포용이 의미를 가지려면 오점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진정성 있는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복수심에 불타던 콜먼이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회복해 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포니아의 삶을 보고 평생을 감추어 왔던 비밀(자신은 흑인이다!)을 고백하면서 그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란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한 것에는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후회와 뉘우침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의 오점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여 알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그 오점을 감추기 위하여 얽매여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필립 로스는 이런 사실을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라는 거울로 삼아 우리 앞에 놓아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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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2012-08-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2권이 1권의 반복 설명같다는 말을 듣고 우연히 얻은 1권 밖에 안 읽었는데, 이 글을 보고나니 2권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