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인 대산세계문학총서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유숙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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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의 1,000엔짜리 지폐에는 일본이 낳은 병리학자인 노구찌 히데요 박사가 그려져 있다. 그는 우리에게 [닥터 노구찌]라는 만화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1,000엔 지폐의 도안은 일본의 ‘국민작가’인 나쓰메 소세키였다. 우리나라 지폐 도안에 그려진 인물들 모두가 근대 이전의 인물들인 것에 비해 나쓰메 소세키는 20세기, 그러니까 현대의 인물이다. 과거의 유명한 인물들을 제치고 어째서 현대의 인물이 한 국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지폐의 도안 인물로 결정될 수 있었을까? 그건 아마도 나쓰메 소세키가 작품을 통해 메이지 유신 이후라는 격동기를 살아가는 일본인들의 고뇌와 절박한 심정을 제대로 짚어 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는 흔히 ‘에고이즘’이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가끔 에고이즘(Egoism)을 이기주의나 자기중심주의라고 번역하면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동’으로 이해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내가 아는 에고이즘은 (최소한 철학이나 윤리학 영역에서는) 이윤 동기가 모든 가치판단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시장만능주의적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주로 이야기되던 쾌락주의와 더 통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결국 영혼의 평화라는 자기 자신만의 쾌락 추구 목적에 도덕적 행위가 얼마나 부합하느냐를 가치판단의 척도로 보는 철학적 전통 위에 서 있는 입장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책은 주로 ‘에고(Ego)’, 즉, 자아에 충실하고 자아에 천착하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유미주의적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 [그 후]의 다이스케, 아집으로 변화해 버린 지나친 순수함에 번민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마음] 등이 그 예이다. 물론 이들의 삶이 과연 바람직한가는 또다른 가치판단의 문제이다. 좀 부정적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자아에 충실하다 못해 완전히 자아라는 늪(?) 속에 빠져서 외부와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의학은 흔히 신경쇠약이니, 자폐니 하는 진단을 내려 놓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는 누구도 감히 넘어서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자아 달성(즉, 자신의 쾌락 충족)의 목표를 높게 쌓아올린 인물이 등장하여 그 목표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에고이즘적 작품’이다. 하지만 어디 현실이 그렇게 만만한가. 달성하고자 하는 자아의 이상은 멀고 높지만, 그 곳에 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어째서? 에고의 보장 욕구가 인간의 선천적 욕구라고 한다면, 사람들 속에서 ‘관계맺음’을 가져야 하는 것 역시 인간이라면 숙명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고이즘에 빠진 자아는 그에 비례하여 외부로부터 고립되고, 외부의 자극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은 채, 안으로안으로 침잠(沈潛)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고립은 필연적으로 외부와의 긴장을 유발하는 것은 물론, 심할 경우 자아의 분열에 따른 개인의 폭주를 부른다는 점에서 비극적 결말로 나타날 수 있다.

[행인(行人)]에 등장하는 이치로 역시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들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에고이스트의 범주에 속한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높은 학식을 갖춘 인정받는 학자이지만, 견고한 자아의 벽 속에 사는 사람이다. 그는 특히 남녀관계에서 사랑(특히 부부간의 사랑)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진, 비정상적이면서 가변적인 가치라고 여긴다. 가족관계에서나 친구관계에서 흔히 기대되는 인간적 정(情)이나 결속력이란 것도 자아를 훼손시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인물인데(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피곤한 인간이다), 반면 이상스러울 정도로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 내지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서로 다른 성장배경과 성격을 가진 여러 사람이 부딪쳐 관계망을 형성할 수밖에 없는 사회생활에서 에고이스트의 주변은 긴장의 자기장이 형성된다. 이치로의 주변도 마찬가지로서, 가족들(부모님, 아내, 동생, 친척)과의 관계에서,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손님들과의 관계에서 그는 침울함과 어색함, 긴장감의 원인이 되어 버린다. [행인(行人)]에서 이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장면이 있는데,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팽팽하게 조여진 현악기의 현을 누르듯이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형과 동생 사이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 총칼을 든 것보다 더욱 격렬한 정신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형수의 정조를 시험하다니, - 관두는 게 좋겠습니다.”
“어째서?”
“어째서라뇨, 너무 바보 같지 않습니까?”
“바보 같다니, 뭐가?”
“바보 같지 않을진 몰라도, 그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필요가 있으니까 부탁하는 거다.”
나는 잠시 침묵했다. 넓은 경내에는 참배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아, 의외로 사방이 고요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마지막으로 우리 두 사람의 쓸쓸한 모습을 한 귀퉁이에서 발견했을 때, 어쩐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시험하다니, 어떻게 해야 시험당하는 겁니까?”
“너와 나오, 두 사람이 와카야마로 가서 하룻밤 묵기만 하면 돼.”
“말도 안 돼”하고 나는 한 마디로 뿌리쳤다. 그러자 이번엔 형이 침묵했다. 물론 나도 말이 없었다. 바다로 내리꽂히는 석양빛이 점차 엷어짐에 따라 얼마 남지 않은 열을 불그레 먼 저편으로 한층 길게 늘어뜨렸다.
“싫으냐?”하고 형이 물었다.
“예,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그것만은 싫습니다.”하고 나는 분명히 단언했다.
“그렇다면 부탁하지 않겠다. 대신, 난 평생 널 의심하겠다.”  (p.129)

이치로는 자신의 동생인 지로와 아내인 나오 사이의 관계를 의심한다. 그는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기 위해 형수와 단 둘이서 여행을 떠나서 형수의 본심이 무엇인지 알아내 보고하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평생 의심받을 각오를 하라는 협박을 곁들여서 말이다. 부부간의 관계에 대한 불신은 이렇게 보통 사람은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표출된다.
어쨌든 형의 강력한 요구에 못이긴 형수와 시동생은 여행을 떠나고, 당일치기로 계획되어 있던 여행은 갑자기 만난 폭우로 인해 1박 2일짜리 숙박 여행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다. 나중에 지로는 이치로에게 “형수님의 인격에는 의심하실 만한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치로의 ‘바뀐 안색’ 뿐이었다.

이치로가 아내를 의심하게 된 원인은 확실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추정해 보자면, ‘부부간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부인은 자기를 떠날 수 있고, 그 대상은 가장 많이 얼굴을 맞대고 살고 있는 동생이다’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다. 그리고 자아에 집착하는 그의 성품으로 추정해 보건데, 이런 생각을 확고한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자신의 자아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특별한 근거 없이 아내와 동생의 관계를 의심할 뿐만 아니라 형수의 정조를 주장하는 동생의 이야기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아 천착은 필연적으로 주변과의 단절을 가져온다. 아내와 동생에 대한 불신은 부모를 비롯한 모든 가족에게 확대된다. 혼자 남게 된 고독 가운데 이치로는 갑자기 텔레파시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기도 하고, 사후(死後) 연구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행인(行人)]에는 이치로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 성향이나 그의 불우한 가족환경 등을 고려해 볼 때 [마음]의 주인공과 같은 운명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러니까 미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자아에 대한 철저한 집착과 타인에 대한 불신, 그 불일치에서 나오는 고립이 불러온 고뇌의 종착점이 어디가 될 것인지 상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어쩌면 이치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지식인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시시각각 변화를 요구받아가면서 살아가야 하는 현재 우리들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전통의 정신세계와 서구의 물질문명이 격렬하게 부딪쳤던 시기였던 메이지 유신은 일본 근현대사의 방향을 바꾼 획기적인 2대 사건 중 하나이다. 유신의 영향력을 온 몸으로 받아야 했던 나쓰메 소세키에게 이 시기는 정체성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으로 고민하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더욱이 국비장학생으로서 일본을 떠나 영국에 유학하면서 땅에 대한 그리움을 삭여야 했던 나쓰메 소세키 개인에게 있어서도 정체성에 대한 질문의 답은 아마도 가장 절실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행인(行人)]에도 나타나고 있는 바, 사람들은 이제 기차를 타고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빠른 시간에 오고갈 수 있게 되었다. 물질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봉건주의적 습속을 버리지 못한다. 그들이 사는 일상 자체가 전통적 정신체계와 서구적 물질체계가 격렬히 부딪히는 공간이 되어 버린 것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으로 하여금 자아 보존과 정체성 정립의 열병을 앓도록 하였다. 이 때 개인의 에고이즘은 국가의 에고이즘으로 확대되고, 개인의 고립은 국가의 고립으로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의문.
나쓰메 소세키는 왜 제목을 ‘행인(行人)’이라고 하였을까? 작품 속에서조차 ‘행인’이란 단어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도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겠으나, 일종의 반어법으로 느껴졌다.
행인은 말 그대로 구름에 달 가듯이 그저 지나가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행인은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부유’의 특징을 가진다. 정착한다는 것에는 인연을 맺고, 의미를 부여하며, 역할과 지위가 주어진다는 속성이 부여된다. 하지만 나그네는 그럴 필요가 없다. 형식이나 격식, 운명이나 숙명조차도 그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횡단한다. 어느 곳 하나 정착하지 않지만, 대신 뒤집어 말하면 세상 모든 곳에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나그네로의 삶에는 필수적으로 자유로움과 열린 수용이 필요하다.
따라서 높다란 자아의 벽을 쌓아놓고 거기에 깊이 침잠하는 이치로는 오히려 제목과 상반되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열 살 때 겪은 양부모의 죽음과 두 형의 폐병으로 인한 죽음, 사모하던 셋째형수의 요절, 소세키 본인의 폐병 투병, 부인의 투신 자살 시도, 고독과 신경쇠약에 시달려야 했던 영국 유학생활 등. 어쩌면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모습을 이치로에 투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경계를 초월하고자 한 ‘나그네’의 모습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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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04-13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세키 작품의 제목들은 별 의미없이 지어진 것들이 많은데, <행인>은 정말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생각해보게 되요. 얄리얄리님 말씀처럼 제목은 '부유'의 특징을 지니고,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않지만, 세상 모든 곳에 머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데 그 넘치는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는 면도 있고, 세상 모든 곳에 머물 수 있는 유동성 때문에 오히려 불모성을 지니기도 하는 건 아닐까요?

얄리얄리 2010-04-13 15:19   좋아요 0 | URL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서 반딧불이님께 여러가지로 배워야 하는데,
이렇게 오셔서 댓글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해 주신 유동성과 불모성의 불편하지만 동전의 양면과 같은 동거! 저도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