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의 지구사 -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옥창준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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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강대국 간 냉전이 제3세계에서 나타난 연관성을 치밀하게 보여준다. 미국과 소련 모두 스스로를 자유와 정의라는 가치의 최후 수호자라 믿었지만, 이상은 쉽게 변질되는 법. 그리고 ‘냉전‘이라는 가치 수호 방식은 제3세계 민중에게는 ‘제국주의‘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지옥이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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넙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3
귄터 그라스 지음, 김재혁 옮김 / 민음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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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3대 화가라는 라파엘로는 <아테네 학당>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디오게네스, 유클리드 등 고대 세계의 이름높은 철학자와 과학자를 등장시켰습니다. 이 중에 단 한 명의 여성이 있는데, 그녀의 이름은 히파티아(Hypatia). 안타까운 사실은 그녀의 이름이 오랫동안 남게 된 원인이 학자로서의 업적이라기 보다는 배타적인 종교와 남성우월주의에 의한 희생자 또는 순교자이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의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당대 최고의 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에도 언급되고 있는데, 그녀는 알렉산드리아를 지배하게 된 기독교도들에 의해 이교도로 낙인찍히면서 잔혹하게 살해당합니다. 그녀의 죽음은 광신(狂信)의 횡포였고, 독단과 독선이 어떻게 학문과 예술을 파괴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가운데 보라색 옷을 입고 턱을 괸 사람이 헤라클레이토스이고, 왼쪽 옆으로 두번째 흰 옷읍 입은 여성이 히파티아 

 

귄터 그라스의 [넙치]는 히파티아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넙치]는 귄터 그라스가 가한 일종의 문명 비판으로 읽을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젠더(gender)의 관점에 입각한 물질문명 비판, 즉, 가부장적인 남성중심의 물질문명 비판이라는 점입니다. 자연의 힘을 이용할 뿐만 아니라 정복하고자 하는 문명, 자유와 평등을 힘의 논리로 바꾸어 약육강식의 억압과 폭력을 정당화했던 문명,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셀 수 없을 정도의 전쟁을 치르고도 아직도 물질문명의 유지와 착취를 위해 질주하는 문명. 귄터 그라스는 [넙치]에서 이와 같은 야만적인 문명이 남성의 문명이었으며, 이 문명 하에서 희생하거나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했던 것이 여성이었음을 9명의 여성과 한 마리 넙치의 입을 통해 지적합니다.

 

[넙치]의 기본적인 틀거리는 신석기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가운데 살다 간 9명의 여성의 삶으로 구성됩니다. 이들 9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9개월(여성의 임신 기간)을 한 달 단위로 나누어 각 달마다 한 명씩 배치됩니다. 여기에 게르만족의 대이동, 중세 마녀재판, 그단스크(단치히)의 자유노조운동 등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바스코 다 가마, 아우구스트 베벨, 로자 룩셈부르크 등 역사적 인물이 삽화처럼 끼워지면서 때론 고대에서 현대로, 때론 현대에서 중세로 시간과 공간과 시점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면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길고 긴 인류의 역사와 여성의 삶은 어떻게 연결될까요? 귄터 그라스는 ‘요리’를 통해 두 가지를 매개짓습니다. [넙치]에 등장하는 9명의 여성들은 모두 요리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들은 음식재료를 구하여 불을 피우고, 다양한 조리방법을 활용하여 음식을 요리하고, 그것을 남편과 자식들, 이웃에게 먹였습니다. 기근과 질병으로 식량이 없을 때에는 대체식량을 찾아내어 인류가 연명하도록 하였습니다.

여성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것이 불의 사용법입니다. 요리를 위해서는 반드시 불이 필요한 법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전형적인 남성영웅적 신화라면 [넙치]에 나오는 불의 인류 전래 신화는 완전히 다른 양상입니다. 불은 첫 번째 시대의 여성인 아우아가 하늘의 늑대로부터 자신의 성기 속에 감추어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불은 대대로 여성들에게 전해졌습니다. 여성들은 젖을 넣거나 호박을 녹이거나 버섯을 가미하여 스프를 끓이기도 하고, 감자를 구워내기도 하고, 양배추와 돼지고기를 볶아내어 투쟁중인 노동자의 단체 식사로 내놓았습니다.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 가족들을 먹이기 위한 여성들의 고단한 노력은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대략 7천년을 생존하도록 한 ‘참된 투쟁’이었던 것입니다.

 

먹거리를 장악한 여성들이 인류사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지나간 역사는 그 반대였습니다. 왜 여성과 남성의 위치가 바뀌었을까? 여기서 귄터 그라스는 그림 형제의 우화에 등장하는 한 마리 넙치를 등장시킵니다. 이 넙치는 일종의 세계정신 또는 절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넙치는 지난 세월동안 철저하게 남성들의 편만 듭니다. 신석기시대에 한 남성에게 나타난 넙치는 남성들을 충동질하여 여성들에게 반기를 들게 함으로써 평화로운 여성지배시대를 끝장내고 가부장제도를 확립하도록 배후조종 하게 되고, 그 결과 인류를 다툼과 경쟁으로 몰고간 주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지켜온 불은 생존을 위한 따스함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불의 용도가 넙치의 사주로 ‘금속을 녹이는 도구’로서 새롭게 변화됩니다. 이제 인류는 불을 이용해 광석을 녹여 금속을 생산하고, 그것으로 도구와 무기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획기적인 생산수단의 혁명은 생산량의 비약적 증가를 가져왔으며, 곧이어 사적 소유의 개념을 발생시켰고, 재산 축적 과정에서 계급을 발생시켰습니다. ‘계급’의 발생이란 곧 차별과 지배-피지배 관계의 구축을 의미하는 것이니, 모계사회의 따뜻함과 평등함은 이윤동기의 충족을 위한 경쟁과 다툼, 갈등과 전쟁의 역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금속을 녹여 만드는 것이 무기에만 국한될까요? 화폐 역시 금속으로부터 만들어집니다.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이 말한 바, ‘자본주의라는 이름의 히드라’를 등장시킨 물질문명의 기반은 바로 이 시기부터 시작합니다.

 

남성의 세계 지배를 배후에서 조종한 넙치가 직접 밝히는 ‘남성 지배 이후의 모습’을 들어 봅시다.

 

그(넙치)는 남자들의 행동이 위대한 쪽에서 괴물 같은 모습으로 급변해 버린 데 대해 개탄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에게 지식과 권력을 주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원한 것은 전쟁과 고작 비참함뿐이었다. 자연을 너희에게 내맡겼으나, 너희들은 기껏 자연을 강탈하고 오염시키고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고, 파괴해 버렸다. 내가 너희에게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풍요로움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세계를 풍족하게 먹여 살리지 못하고 있다. 굶주림은 증가하고 있다. 너희의 시대는 단말마를 지르며 끝나가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너희 남자들은 끝장이 난 것이다. 허튼 수작만 계속해서 벌이고 있으니 이젠 당해낼 재간이 없구나. 자본주의 사회이든 아니면 공산주의 사회이든, 도처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이성의 탈을 쓴 광기뿐이다.」 (제2권 p.299)

 

지금 넙치는 페미니스트들로 구성된 ‘여성 법정’에 피고인으로 서 있습니다. 발트해에서 3명의 여성에게 붙잡힌 넙치는 법정에 기소되었고, 남성이 구축해 온 가부장적 역사를 비판하고 앞으로 여성들의 편을 들겠다고 선언합니다.

 

중요한 것은 귄터 그라스는 여성에 의한 지배 역시 바람직한 것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가 보기에 남성에 의한 지배라느니, 여성에 의한 지배라느니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결과물을 낳는 방식입니다. 나치 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 폴란드 자유노조운동 등 극단의 시대 한복판에서 일생을 살아왔던 귄터 그라스는 남성에 의한 여성의 지배는 야만적이었음을 지적하지만, 그 역의 관계가 반드시 새로운 시대에 부합하는 방식이 아니란 점 역시 분명히 합니다. 그는 특히 가부장제도를 종식시키기 위한 투쟁의 과정에서 ‘적과 싸우면서 적을 닮아가는’ 모습에 경멸과 반대를 분명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극단적 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으로 제시되는 사건이 ‘아버지의 날’에 벌어진 참극입니다. 앞서 언급한 넙치를 발트해에서 잡아 법정에 세우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3명의 여성에게는 사실 감추고 싶은 전력이 있었습니다. 그녀들은 ‘아버지의 날’에 ‘진짜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라는 명목하에 술에 취한 채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남성 성기’를 달고 잠들어 있던 친구를 강간합니다. 그리고 충격에 빠져 혼자 돌아가던 이 친구가 폭주족에게 다시 강간당하여 무참하게 살해되었음에도 무관심하게 일상으로 돌아가 버립니다(이들이 자신들의 폭력적 행위를 반성했다는 내용도, 폭주족을 고발했다는 내용도 없습니다. 이들중 한 명인 지클린데 훈챠는 법정의 검사 역할을 맡아 맹활약한다는 이야기만 나올 뿐입니다).

결국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고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너무나 뿌리깊게 인식되어 있는 지배-피지배 관계의 잔재 속으로 다시 매몰됩니다. 억압과 횡포의 주체만 바뀔 뿐이죠. 히파티아의 참극이 광신이라는 극단의 횡포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날의 참극 역시 극단의 횡포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귄터 그라스는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게 [넙치]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최초의 여성인 있는 ‘아우아’에게 달려 있었다고 하는 세 번째 유방입니다. 세 개의 유방을 가지고 아우아는 당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에게 골고루 젖을 나누어 주었습니다(편애하던 남성에게 아주 약간 더 주기는 했지만). 귄터 그라스가 보기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아우아의 유방이 2개가 된 시점부터 평화와 형평의 세계는 어그러진 것입니다. 2개의 유방이란 곳 양자택일(兩者擇一), 또는 일방에 의한 일방의 지배, 또는 두발 자전거처럼 쓰러지기 쉬운 불안정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가부장적 질서와 극단적/전투적 페미니즘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제3의 길, 제3의 유방을 찾고 있는 셈입니다.

 

이 쯤에서 또 생각나는 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나오는 <수의 신비>라는 단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아마 이게 귄터 그라스가 [넙치]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인용해 봅니다.

 

2는 1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2는 분할이며 상호 보완성이다.

2는 서로 대립하며 보완하는 남성과 여성을 나타낸다.

2는 사랑을 뜻한다.

2는 자기 자신과 세계 사이의 거리를 상징한다.

2는 다른것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나타낸다.

2는 오로지 자기 자신, 즉 1에만 관심을 갖는것에서 벗어남을 뜻한다.

2는 남과의 대립을 상징한다. 따라서 2는 전쟁이기도 하다.

2는 선과 악, 흑과 백, 명제와 반대명제, 음과 양, 표면과 이면이다.

2는 모든것이 나누어질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좋은것이 나쁜결과를 가져올수 있고 반대로 나쁜것이 좋은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2는 서로 반대되는것을의 충돌을 뜻하며, 이 충돌이 창조적으로 승화되면서 3이 생겨난다.

 

3은 만물이 정, 반, 합을 거쳐 발전해 간다는 것을 나타낸다.

3은 1과 2의 결합에서 생겨난 자식이다.

3은 삼각형을 만들어 내며, 1과 2가 벌이는 싸움의 관찰자가 된다.

3은 입체를 뜻한다. 세계는 3이 있음으로 해서 부피를 갖는다.

3은 1과 2 사이에 관계를 맺어주고 그 관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 힘이 분산되지 않고 한방향으로 모이면 3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 3의 운동은 4로 넘어가면서 일시적인 안정국면을 맞는다.

 

귄터 그라스의 상상력이라고 할까... 귄터 그라스의 작품을 보면 개인의 삶이 한 국가, 한 민족, 한 시대와 어떻게 결합하여 흘러가는지를 보여주기로는 정말 최고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소한 [넙치]에서의 생각에 대해서는 제한적으로나마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제3의 유방’ 그러니까 대립 관계 사이로 난 ‘제3의 길’은 사실 현실에서 구현하기에는 너무나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독일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양자택일하는 것은 충분히 문제 소지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가운데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두 가지 대립항 가운데 제3의 길은 (좀 극단적인 말이라 조심스럽지만) 현재의 모순을 은폐하는 수단으로 이용당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한 제3의 길을 찾자는 이야기는 두 체제의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민사회의 힘이 발달한 서구사회에서 보다 의미있는 문제입니다. 솔직히 우리 사회에서는 제3의 길이 아니라 ‘천민적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직은 더 의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니면 좀 더 양보해서 제3의 길을 찾는 과정은 현재에 대한 비판과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사회의 가부장적 구조의 뿌리는 여전히 강고합니다. 최소한 한국에서 여성문제의 일차적인 출발점으로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의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운동 역시 인간이 하는 운동인지라 오류가 나타날 수도 있고 끊임없이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겠지만 여기에 ‘전투적 페미니즘’ 운운하는 것은 보다 나은 운동을 위한 건강한 비판이라기 보다 현실에 대한 은폐는 아닌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넙치]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치게 번져간 것 같습니다만 현대판 히파티아라 할 수 있는 자유와 학문, 지성에 대한 공공연한 억압을 우리는 경험하였습니다. 부디 우리 사회에서도 전근대적인 인습과 질곡이 청산되고, 제3의 길을 적극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몇 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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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트리스 2015-11-14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잘 읽었습니다. 정연하게 잘 쓰셨네요. `넙치` 외에도 리뷰를 많이 올리셨네요. 담에도 간간이 들러 읽어보겠습니다.
 
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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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비난하기’는 인간의 자기보호 본능이 발현되는 현상 중에 하나이다. 사람들은 타인의 행동에 대하여 분명한 근거없이, 그리고 그 행동이 이루어진 전후사정에 대한 이해없이, 때로는 루머에 근거해서, 때로는 질투심이나 이기심으로 인해서 비난을 퍼붓는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Human Stain)]에서 이런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은근한 칼날을 들이댄다. 그가 비판적으로 보는 인간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오점(stain)을 가진 존재인데 그것을 감추고, 속이며 부정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둘째, 다른 사람의 밝혀진 오점에 대해서 (자신도 오점을 가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때 ‘자신만이 성자인 척 하는’ 태도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위선이다.

아테나 대학의 전(前)학장인 콜먼 실크는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를 썼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불명예스럽게 사직한다. 그는 철밥통들이 가득하던 아테나 대학을 학문 탐구로 활기가 넘치는 학교로 변모시켰고, 최초로 흑인 교수를 임용하는 등 과감한 개혁조치를 단행하였으나 수업에 장기간 결석한 학생을 유령에 비유한 스푸크(spook)라는 단어를 썼다는 이유로 한 순간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spook는 속어로 흑인을 비하하여 ‘검둥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필 또 그 학생이 진짜 흑인이었다.)
콜먼 실크의 억울함과 분노는 그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던 아내마저 사망하면서 극에 달한다. 그런데 이 극심한 분노가 사그러드는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일어난다. 딸보다 나이 어린, 그래서 40년 가까이 나이차이가 나는 30대의 여성, 자신이 재직하던 학교의 청소부로 일하던 여성인 포니아 팔리와 사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콜먼 실크의 자식들조차 각종 억측과 루머를 담아서 그들을 비난하였지만, 서로 가슴아픈 오점을 가지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이 진정한 것임을 깨닫는다. 포니아 팔리의 전남편인 레스터 팔리에 의해 현세에서의 사랑이 비극적으로 마무리될 것임을 깨닫지 못하는 채로 말이다.

[휴먼 스테인]의 등장인물들은 제목처럼 모두 얼룩덜룩한 오점(stain)을 가진 인간들이다. 필립 로스는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들의 삶이 ‘숨기고자 하는 오점과 비밀’들로 얼마나 가득차 있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폭로해 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진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불충분한 것인지, 나아가 오점으로부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인지를 이야기해준다.

탄탄대로의 콜먼 실크의 인생을 망가뜨려 놓은 것은 표면적으로는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파멸의 원인은 자신의 정체성을 평생동안 부정하면서 감추어 왔던 그의 위선적 태도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콜먼 실크는 ‘당연히’ 백인인 것이라고, 그리고 ‘당연히’ 유태인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읽어가던 어느 순간 그의 부모님이 흑인이었음을, 그래서 콜먼 역시 ‘당연히’ 흑인이란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이 아이러니의 절정은 백인 여성과 결혼하기 위하여 어머니와의 인연을 냉정하게 끊어버리는 콜먼의 행동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건 비겁하고 이기적인 행동이었다. spook라는 단어를 썼다고 해서 콜먼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님을, 따라서 그는 누명을 쓴 결백한 사람임을 확신하던 독자들도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어머니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청년 콜먼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의 불명예스러운 노년이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까지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기쁨으로 가득해야 할 출산의 시기, 자녀들이 태어날 때 콜먼 실크는 얼마나 불안에 떨어야 했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백인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인종차별을 받지 않고 현재의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자신이 가진 흑인으로서의 유전적 형질이 자녀에게서 나타난다면 그의 오점은 백일하게 드러나 버리고 말 것이다. 좀 심하게 비유하자면 갓 낳은 아기를 보러가는 그의 마음은 시한폭탄을 열러 가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책을 보니 그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백인과 흑인의 피를 반씩 섞어 물려받았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콜먼 뿐만 아니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의 위선도 그에 못지않다. 다만 그들의 저열함이 콜먼처럼 파급력을 가지고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자기 자녀를 수석 졸업시키기 위하여 콜먼의 가족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는 대신에 콜먼에게 성적 조작을 부탁하는 이웃, 콜먼이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처음 임용한 흑인 교수였지만 그를 배신해 버리는 교수. (이 사람은 콜먼의 장례식에서 자신의 배신을 어떻게 해서든 합리화하기 위한 미사여구를 일삼는다.) 콜먼의 자녀들은 아버지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몰리고 포니아 팔리와의 소문이 돌았을 때, 아버지를 믿기 보다는 세상의 소문에 동조하여 아버지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아버지에 대해서 경멸과 비난으로 대우했던 그의 자녀들이 콜먼의 장례식장에서는 울며불며 ‘훌륭했던’ 아버지를 추모하고, 아테나 대학의 건물 중 하나에 아버지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 다른 교수들과 흥정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이다.
위선의 절정은 콜먼에게 애증의 감정을 느껴왔던 델핀 루 교수에게서 나타난다. 그녀는 콜먼에게 익명의 협박편지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성적 취향을 담은 이메일을 동료 교수들에게 보낸 실수를 무마하기 위하여 절도 사건을 날조한 후, 자신의 실수와 절도혐의를 모두 죽은 콜먼 실크에게 뒤집어 씌운다.

필립 로스는 [휴먼 스테인] 곳곳에서 클린턴 대통령과 르윈스키의 섹스 스캔들을 집어넣었다. 미국과 세계를 흔들었던, 미국 대통령으로서 부적절한 행동으로 오점을 남긴 클린턴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던 시기를 왜 배경으로 삼았을까. 글쎄. 어쩌면 필립 로스는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모두가 클린턴을 비난하는데, 그는 성욕이라는 욕망의 실천자이면서 그것이 외부에 노출된 처지의 사람일 뿐이다. 들키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도 모두 오점을 가진 존재가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대통령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혹시 이런 태도는 나만 깨끗한 성자인 척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휴먼 스테인]에서 저자의 주제 의식을 잘 나타내 주는 인물은 오히려 포니아 팔리일 것이다. 자신의 오점을 숨기기에 급급한 콜먼 실크를 비롯한 상류층의 위선과 비교해 볼 때, 포니아 팔리의 삶의 방식은 솔직한 ‘오점 드러내기’로 동정과 이해, 호응을 불러 일으킨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추행과 강간, 남편의 폭력이라는 가부장 사회의 폭력과 자녀의 죽음이라는 상처로부터 생존해 왔다. 누군가를 비난해도 정당성을 얻을만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돌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실제로는 읽고 쓸 줄 알았지만) 죽을 때까지도 문맹인 것처럼 행세함으로써 자신의 오점을 세상에 드러내어 비난을 이겨낼 수 있는 ‘당당함’을 획득한다.
자신이 흑인이라는 사실이 언제 들통날까봐 노심초사했을 콜먼 실크, 자신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근거없는 비난을 들어야 했던 콜먼 실크에게 그녀의 이런 솔직한 ‘오점 드러내기’는 일종의 구원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그녀에게는 콜먼의 오점, 즉, 그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진짜로 그가 인종차별주의자인지 여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포니아에게 사랑할 사람이란 인종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현재 이 순간 그녀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각자의 삶에 대해 과도하게 간섭하지만 않는 사람이면 충분하다. 이것을 콜먼 실크가 인정하는 순간 콜먼은 팔리아를 향하여 ‘나는 사실 흑인이요’라는 필생의 고백이 나온다.

필립 로스는 책의 앞 부분부터 ‘자기만이 성자인 척하는’ 이라는 어구를 반복하여 사용한다. 물론 이런 태도는 잘못이다. 당연히 우리는 상대방이 살아가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 그가 인생에 대해 가지는 자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니 말이다. 그래서 단순하게 윤리적으로만 생각해 본다면 신약성서에 나오는 이 말은 과연 올바르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런데 이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을 그대로 수용할 경우 우리는 일종의 양비론자 또는 불가지론자가 되어 버린다. 그럼 누가 누구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을까. 나에서부터 시작해서 내 옆의 가족들과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에 이르기까지 다들 불완전한 존재인데 누가 그들을 평가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런 이해와 포용에는 뭐랄까... 일종의 전제조건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해와 포용이 의미를 가지려면 오점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그것을 고치고자 하는 진정성 있는 노력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복수심에 불타던 콜먼이 궁극적으로 삶에 대한 진정성 있는 태도를 회복해 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포니아의 삶을 보고 평생을 감추어 왔던 비밀(자신은 흑인이다!)을 고백하면서 그것이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니란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용서한 것에는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후회와 뉘우침을 먼저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의 오점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하여 알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겠지만, 그 오점을 감추기 위하여 얽매여 사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필립 로스는 이런 사실을 콜먼 실크와 포니아 팔리라는 거울로 삼아 우리 앞에 놓아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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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2012-08-05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2권이 1권의 반복 설명같다는 말을 듣고 우연히 얻은 1권 밖에 안 읽었는데, 이 글을 보고나니 2권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6
헤르만 헤세 지음, 임홍배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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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란 지극히 개인적인 취미인지라 책을 읽고 난 후의 경험과 평가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벼락을 맞은 듯 눈앞을 확트이게 해주었던 책이 [데미안]이었다. 그래서 헤르만 헤세는 영원히 싫어할 수 없는 작가가 되어 버렸고, 누가 내게 ‘가장 인상깊었던 책이 뭐냐?’라고 물어보면 [데미안]이라고 말해주곤 하였다.

하지만 헤르만 헤세의 작품 속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역시 골드문트였다. 아마 지금까지 읽은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 가운데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데미안은 어쩐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과 같고, 싱클레어 역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던 나 자신과 오버랩되기도 하였지만 데미안(또는 에바 부인)의 말에 껌뻑 죽어버리는 지극히 모범적인 마무리(?)가 딴 세상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골드문트는 얼마나 멋진가!!! 또한 얼마나 반항적인가!!! 세상 속에 뛰어들어 자신이 바라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두려움없는 용기, 혈혈단신으로 독일 전역을 종횡무진 헤매는 그 자유로움,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변덕은 있으되 결코 변하지 않는 우정, 뭇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황금입술 골드문트, 사랑하는 여자의 죽음에 슬퍼하면서도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였을 때 느끼는 생명의 에너지 등등. 남자가 보기에도 멋져 보이지 않는가? (아닌가?)

내가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이 작가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읽느냐에 따라서 느끼는 바가 달라진다는 점 때문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이번에 새롭게 읽으면서 10대나 20대에 읽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받았다. 치기에 가까운 자신감이 넘치면서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 내가 골드문트에게서 본 것은 ‘니가 나를 밟고 지나갈 테냐? 깔려 죽을지언정 길을 비킬 수 없다’라고 선언하듯 수레바퀴 앞에 앞발을 쳐든 사마귀의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좁은 수도원 골방에 쳐박혀서 세상과 담을 쌓은 삶을 사는 나르치스의 인생은 얼마나 쫌스러워 보였는지 모른다. 뭐하러 그렇게 산담.... 나는 자연히 골드문트의 삶에 이끌렸고, 이에 비교하여 나르치스의 삶에는 거북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보니 골드문트는 그렇게 화염과 같은 격렬함과 화려함으로 뭉친 사람만은 아니었고 나르치스 역시 골드문트를 빛나게 하는 조역으로서만 등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흔히 이 책을 [지(知)와 사랑]으로 번역하면서 골드문트에 감성, 사랑, 예술 등의 의미를 부여하고, 나르치스에 지성, 학문, 종교 등의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지만 둘 사이는 엄밀하게 나누어 보기 어렵다. 그들은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서로 다른 등산로를 택한 사람들과 같이 본질적으로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본질적으로 하나인 존재가 서로 다른 표출방식을 가지고 있는 느낌 말이다.

골드문트는 기본적으로 ‘구원’을 갈망하던 사람이었고 구원에의 여정의 출발은 본능적 부름에서 비롯하였다.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어머니와의 이별과 아버지의 욕망대로 자라야 했던 어린시절부터 그의 앞에 주어진 인생의 선택지는 마리아 브론 수도원에서 평생을 수도사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르치스의 도움(?)을 얻어 어머니의 사랑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고, 아마도 집시로 생각되는 리자라는 여인으로부터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사랑을 발견하면서 세상으로 나온다. 그리고 어떤 경우 사랑이 이끄는대로, 어떤 경우 예술혼이 이끄는대로, 어떤 경우 본능과 욕망이 이끄는대로 세계를 주유한다.
나르치스 역시 ‘구원’을 갈망한다. 그의 삶은 마치 그레고리안 찬트처럼 정형화되어 있고,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함 그 자체이다. 명예, 금전, 권력은 물론이고 남녀간의 애정과 가족에 대한 사랑 같은 본능도 그의 인생에서의 신념을 흔들 수 없다. 헤르만 헤세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르치스라는 이름이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결국에는 한송이 수선화가 되어 버린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과 동일하다는 것은 보통 상징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는 눈을 내면으로 돌리고 자신 속으로 깊이 침잠하여 자신과의 투쟁을 통해 구원을 추구한 셈이다.

구원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나르치스와 같이 속세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자신을 수양하고 치열한 내면의 투쟁을 통해 삶을 끊임없이 교정하는 것도 궁극의 구원에 이르는 한 방법이리라.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이란 영혼과 양심을 가진 존재라고 믿고 있는데, 영혼 깊숙한 곳에 갈무리되어 있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나르치스의 구원 추구 방식이 얼마나 고독하면서도 힘든 일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새삼 존경심을 느끼게 되었다. 사춘기 시절과 대학생 시절에 읽을 때에는 도저히 생각도 못한 감정이었다.
골드문트의 방식은 어떨까? 골드문트가 경험하는 치열한 내적 갈등은 스스로를 세상의 밑바닥에 던져넣는 행동을 통해 구원을 찾고자 한데서 비롯한다. 화려한 여성편력과 두 사람을 죽인 살인행각에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골드문트는 가장 비천한 밑바닥까지 뒹굴었고, 거기서 묻힐 수 있는 온갖 더러움과 흙먼지를 마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용은 약간 다르지만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를 통해 탐구한 석가모니의 삶, 그리고 가장 낮은 곳부터 세상의 모든 고통을 끌어안은 채로 결국 궁극의 구원을 완성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골드문트의 인생역정 가운데 보인다고 하면 지나친 억지일까. 석가모니나 예수 그리스도가 왕자의 삶으로, 또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으로 일관했다면 아마도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한 평범한 인물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아그네스와의 마지막 사랑을 꿈꾸던 골드문트는 사형수의 신분이 되었다가 나르치스를 극적으로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오랜 세월만에 조우한다. 그런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이 후반 부분은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를 떠올리게 한다.

인제는 돌아와 거울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마리아 브론 수도원에서의 우정의 시기를 지나면서 나르치스는 ‘깊이’로, 골드문트는 ‘넓이’로 각자의 방식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 나르치스는 자신의 내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 궁극의 정화된 영혼을 얻고자 수양하였고, 골드문트는 가능한 넓게 퍼져 나감으로써 세상의 모든 삶의 모습을 체험하여 사랑의 기쁨은 물론이고 이별의 아픔과 절망을 경험하였다. 언뜻 상반된 것과 같은 인생을 걸어간 두 사람은 어느 순간 각자가 추구한 구원이, 그리고 상대방이 추구한 구원이 어떤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둘은 마주앉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과 같은 존재였으며, 언제부터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닮아 있었던 것이다. 순결한 영혼을 위한 내면의 투쟁과 발딛고 선 현실에서의 더나은 삶을 위한 투쟁,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대표하는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 이성과 사랑, 학문과 열정은 둘이 아니라 결국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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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영어 산책 - 엉뚱하고 발랄한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정경옥 옮김 / 살림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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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산책]은 기본적으로 미국 문화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문화의 역사를 탐구하기 위하여 선택한 도구가 언어, 그러니까 ‘영어’다. 빌 브라이슨은 1620년 소위 Pilgrim Fathers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온 시기를 전후로 하여 최근까지 약 300여년 동안의 미국 정치, 산업, 문화, 일상생활 등을 씨줄로 하고, 영어를 날줄로 하여 한 편의 미국 문화사를 써낸 것이다.
따라서 (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물론 ‘Bill Being Bill'이긴 하다. 그의 ’글빨‘은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면서 독서의 어려움을 상당 부분 완화해 준다. 다양한 자료들로부터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뽑아내는 능력이나, 독설로까지 보일 정도의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지는 태연함, 그러면서 독자를 킥킥거리게 만들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의 마법같은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쓸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지도 않았고(영어권 국가에 가 본 적조차 없다), 미국 역사와 문화에 대한 지식도 얕다. 그래서 빌 브라이슨이 따발총처럼 내뱉는 영어에는 생경함이 먼저 든다. 책의 원제인 [Made in America]가 왜 [발칙한 영어산책]이 되었는지도 이해가 잘 안 가며(아마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들과 제목을 통일시키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영어를 어떻게 써야 발칙한 것인지 잘 모르겠고(우리말에서 ’에잇! 발칙한 것‘이라고 하면 변사또가 춘향이에게 쓰는 말 아닌가!), 비슷비슷해 보이는 영어 단어와 문장이 가지는 미묘한 뉘앙스 및 그 어원의 차이도 제대로 포착해 내지 못하겠다.
영어에 대한 내 실력을 처음부터 ‘뽀록내는’ 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이 영어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쓰여질 글은 빌 브라이슨이 펼쳐 놓은 미국 역사의 이야기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을 정리하고, 가끔 영어를 양념처럼 뿌리는 정도의 수준이 될 것이라는 변명을 미리 늘어놓은 것이다.
 

2.
개인적으로 미국의 특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melting pot이 아닌가 한다. 원래 다인종사회를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여러 인종이 모였다는 것은 단순히 피부색깔 다르고 생김새가 각각인 사람들이 한 장소에 섞여 살게 되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처한 환경조건에 적응하여 생존을 위해 노력하며, 그 과정에서 여러 유형의 관계망이 성립되는 것은 진화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아닌가. 인간도 예외일 수 없는 것이, 다종다기한 문화적 특색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서 다른 문화와의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 필연의 과정이다. 하위 문화로 분열하기도 하고 때때로 문화 간의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 비극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미국이 그랬다. 인디언과 버팔로만이 초원을 누비던 시절에 유럽에서 건너간 사람들,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을 찾은 유럽 ‘변두리’ 지역의 사람들,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 들어온 아프리카의 사람들, 유대인들, 그리고 상대적으로 늦게 미국을 찾은 아시아 지역의 사람들, 원래 미국에 거주하던 원주민들. 미국의 역사는 이들이 300년의 역사를 가진 용광로 안에서 뒤섞이는 과정이었고, 이들의 문화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이었다. 미국문화가 가지는 독특함은 역설적이게도 ‘미국만의’ 문화가 없다는 점에 있다. [모비딕]의 저자인 허먼 멜빌은 이런 미국의 특징을 “미국은 국가라기보다는 세계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명쾌하게 정의내렸다. 용광로로서 미국의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것이 미국인들의 언어, 영어다(어쩌면 그래서 빌 브라이슨은 미국 문화사의 ‘도구’를 영어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작은 섬나라 영국의 언어에 불과했던 영어는 미국에서 인디언들의 언어, 프랑스, 독일,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언어, 유대인들의 언어, 아프리카 계열의 언어, 아시아 국가들의 언어가 혼합되면서 비로소 더욱 풍성해지고 ‘세계언어’로 발전해 가기 시작한다.
미국이 지금처럼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아마도 American Dream이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할 것이고, melting pot의 불꽃은 꺼지지 않으리라. 현재진행형인 미국의 변화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지 않은가.
 

3.
예전에 세계사를 공부할 때 세계 3대 혁명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프랑스 대혁명, 영국 명예혁명, 미국 독립전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왕권신수설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던 시기에 공화정 체제의 수립이라는 정치적 의미와 <독립선언문>을 통해 만방에 표출한 천부인권 및 자유/평등의 가치는 결코 낮지 않지만, 미국의 역사가 과연 이런 자랑거리에 명실상부한 것이었나라는 의문 또한 어쩔 수 없다.
빌 브라이슨은 식민지 아메리카 거주민들이 독립을 요구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선 파고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 독립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대표없이 과세없다’라는 논리. 그러나 빌 브라이슨에 따르면 독립선언 당시 미국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어떤 측면에서 보아도 목숨걸고 영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일으킬만한 건덕지가 없었던 셈이다.

1776년 미국인은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경제적인 유동성, 지역 대표를 뽑을 권리, 언론의 자유, 한때 어느 영국인이 열을 올리며 말한 “가장 역겨운 평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었다. 더 좋은 음식을 먹었고, 더 안락한 집에서 살았고, 짐작컨대 전반적으로 영국의 사촌들보다 훨씬 더 높은 교육을 받았다. 요컨대 미국의 혁명은 자유를 찾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p.64)

미국혁명이란 당시 식민지 미국인들의 기득권 수호 움직임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한 혁명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혁명은 그 과정과 결과에서 차이점을 보일 수밖에 없을텐데, 이런 모습이 미국 역사가 보여준 ‘배반의 역사’에 원초적인 출발점이 아니었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부인권과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그토록 숭배하는 미국 사회는 어째서 같은 인간을 피부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차별했는가? (그리고 지금도 차별하고 있는가?) 새뮤얼 존슨이 지적한 바대로 “흑인을 부리는 사람들이 꽥꽥거리며 자유를 부르짖다니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노예제도 뿐만 아니라 마치 지금의 미국이 있게 만든 시대정신인 것처럼 찬양되는 서부개척과 프론티어 정신이란 것도 입장을 돌려놓고 보면 동부 백인들의 거주지역을 확장하고 풍요로움을 얻는 도상에서 인디언들을 비롯한 기존 거주민들을 쫓아내는 행위이지 않았던가? 인디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미국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고, 그래서 자신들의 정든 고향을 떠나 보호지역(reservation)에서 살다가 쫓겨나거나 비참한 일생을 마쳐야 했는지는 여기서 재삼 말할 필요도 없다. 자신이 누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독립전쟁은 <독립선언문>에 명시한 고상한 겉모습과 달리 차별받으면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던 또다른 미국인들을 향한 양날의 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국은 인디언과 400가지의 조약을 맺고는 그 모두를 어겼다. 인디언은 1924년까지도 미국 시민이 되지 못했다. (p.230)
 

4.
미국은 현재 세계 최강대국이며, 번영과 광명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발칙한 영어산책]의 원제가 [Made in America]라는 점은 무척 흥미롭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은 유형의 도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의 판단기준으로서 ‘로마’가 가지는 세계제국의 입지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요즘은? 막말로 세계정치와 경제의 판단기준에서 ‘모든 길은 USA로 통한다’. Made in America는 막강한 힘의 상징이면서 문질문명의 중심이자 자부심과 자긍심의 상징이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은 은근히 이 ‘Made in America’에는 그다지 자랑스러워 할 수 없는 역사가 숨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내가 보기에 빌 브라이슨이 미국의 역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적어도 표면적으로라도) 세계 다른 국가들에게 선망이 되면서 가장 높은 생산성을 보여주었던 시기는 melting pot이 제대로 작동하던 시기, 그러니까 다인종들이 역동적으로 미국사회에 정착하던 시기였다. 반대로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인디언들을 속이며, 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나치 뺨치는 편협함을 드러낸 시기는 미국이 주장하는 고상한 가치들의 실상이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음을 지적해 낸다.
현실 정치는 Pax Romana는 Pax Britanica를 거쳐 Pax America로 넘어왔다. 남들 다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미국의 ‘혈맹’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우리나라도 조금은 미국의 본질과 앞으로 나가고 있는 방향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상대에 대한 배려, 합리성, 정당성에 대한 감각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언어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에게 필요한 자질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싶다. (p.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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