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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
캐서린 호우 지음, 안진이 옮김 / 살림 / 2010년 2월
평점 :

사실 ‘최강대국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면서 미국사의 그늘진 부분을 복원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소위 서부개척시대에 대한 관점의 변화이겠지요. <인디언=악, 백인 기병대=선>이라는 철저한 이분법 위에서 ‘빛나는 프론티어 정신’을 자랑스러워했던 서부개척의 역사가 사실은 잔혹한 인종차별의 역사요, 식민지개척의 역사였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그다지 오래 전의 일이 아닙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세일럼의 마녀재판’으로 불리는 미국에서의 마녀사냥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마녀’의 누명을 씌워서 처형했던 중세말 유럽의 마녀재판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반면, 이러한 마녀재판이 청교도 사상이 지배하던 식민지 개척시기 미국에서도 있었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청교도들은 성탄절마저도 이교도의 관습으로 여기고 배척했던 사람들로서, 현재 우리나라와 미국의 근본주의 목사들도 울고 갈 ‘슈퍼 근본주의자들’이었습니다.
자연과 인간에 대한 과학적 이해마저도 부족하던 시절, 청교도들에게 질병과 불행한 사건을 만났을 때 행해야 하는 것은 기도와 회개 뿐, 그 외에 행하는 민간요법은 모두 신성모독이며, 악마의 사주를 받은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캐서린 호우의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은 17세기 후반 미국 청교도사회에서 벌어졌던 마녀재판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평가하자면 ‘절묘한’ 소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절묘하다고 표현한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자인 캐서린 호우가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무게있는 주제의식과 역사적 사실을 비트는 장르문학적인 상상력 사이에 줄을 매어 놓고 그 위를 오가며 ‘의미’와 ‘재미’를 동시에 주려고 노력합니다.
저자의 의도대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번 놀랐음을 고백합니다.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 처음 제목만 보고서 유행을 타고 새로 나온 아동용 판타지 문학이 아닌가 했습니다. 마치 [해리포터와 ○○○○○]하는 식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초반부를 읽어가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물과 배경에 대한 묘사도 꼼꼼했지만, 무엇보다 ‘마녀사냥’이라는 만만치 않은 주제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00년의 시차(20세기 후반의 미국과 17세기 후반의 미국)를 두고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이야기는 마녀사냥이 가지고 있는 ‘집단의 광기’라는 인간사회의 어두운 치부를 슬며시 백주대낮으로 끌어냅니다. 이것이 ‘주제’ 측면에서 느낀 첫 번째 놀라움이었습니다.
이 무거운 주제를 저자는 어떻게 해결할까 흥미있게 보다가 두 번째 놀라움을 만났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책은 “마녀가 실제로 존재했다”고 말합니다. 장르문학의 상상력은 우리가 가진 기존의 편견과 지식을 이렇게 단번에 전복시켜 버립니다. 이제 <마녀재판=무고한 사람들에게 씌워지는 누명>이란 역사적 사실은 비틀어졌습니다. 최소한 이 책 안에서 마녀는 실제로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가 오랫동안 면밀히 조사해 온 식민지 시대 미국 거주자들의 행태, 복장, 식생활, 습관 등은 마치 그 시대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생동감을 부여합니다. 이것이 ‘재미’ 측면에서 느낀 두 번째 놀라움이었습니다.
소설적 상상력이긴 하지만 캐서린 호우의 이런 비틀기는 내게 ‘마녀’ 또는 ‘주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녀의 이미지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마녀재판’에 대한 반감을 가지면서도 ‘마녀’의 형상에 대해서는 은연중에 고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거나 거대한 냄비에 온갖 동식물(두꺼비나 고양이 등등)을 넣고 끓이며 큰 주걱으로 젓는 쭈그렁탱이 늙은 할머니의 모습 말입니다. 그런데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을 읽고 그런 이미지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마녀는 자연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사회에서는 주변에 언제라도 존재했던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병에 걸렸거나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다양한 민간요법(주로 약초)과 자연 속의 기(氣)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질병을 치료해 줄 수 있는 일종의 ‘동네 주치의’들이자 ‘술사(術士)'들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마녀재판에서 기소된 여자들이 행했다고 하던 치료법, 그녀들의 언어(주문)의 실체는 중세시대 관념화된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 그러니까 종교가 좀 더 현실의 개념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던 원시 기독교 시대의 색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직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구원과 축복을 받을 수 있으며, 인간의 행동은 영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고방식, 그래서 질병이나 불행을 하나님이 노했다는 징후로 해석하던 청교도적 사고방식 하에서, 병과 불행에 맞서기 위해 일개 개인이 비밀스러워 보이던 구전 형태의 과학의 힘을 빌리던 것은 바로 ‘사악한 악마의 주술’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청교도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질서와 신성을 유지하는 방법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자연과 대화하던 사람들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나아가 악마의 편에 세워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시켰던 것입니다.
이 시기의 종교재판관들과 마녀로 몰려 화형대와 교수대에서 처형된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의 모습은 그로부터 300년 이상 시간이 흐른 21세기 현재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마지막으로 책에 대한 평가를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세일럼의 마녀와 사라진 책]은 재미도 있었습니다. 묘사가 지나치게 많고 사건 전개가 빠르지 않다는 점이 지루하다고 지적하는 경우도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서서히 흘러가는 흐름의 책을 좋아하는지라 잘 읽혔습니다.
무엇보다 저자의 성실성이 좋았습니다. 미국 식민지 개척시대의 문외한인 제가 보기에도 당시의 생활상과 모습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준비를 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저자인 캐서린 호우의 선조가 바로 세일럼의 마녀재판 당시 희생된 사람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호우’였다니... 혹시 자신들은 마녀가 아니라는 절규 속에 죽어간 죄없는 여성들의 외침이 그 후손을 통해 이렇게라도 알려지게 된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