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주토끼 - 개정판
정보라 지음 / 래빗홀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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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일 35도를 웃도는 폭염 경보 아래 책을 읽는 것마저도 편치 않은 시간에 소설을 읽다 보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선량한 사람의 사업이 번창하여 수익이 커지자 부당한 방법으로 손에 넣은 양조자 일가를 파멸로 이끄는 과정은 괴기스럽다.

‘밭도랑을 베게 하고 죽을 놈’

이라는 속담은 용서할 수 없는 악인에게 퍼붓는 저주를 담고 있다. 선의의 피해자가 죽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원한을 품고 ‘저주 토끼’를 만들었을 듯하다. 저주 토끼를 예쁘게 만들어 토끼의 머리를 쓰다듬도록 유인한다. 저주 토끼를 가까이하는 이들은 죽음에 이르는 파멸의 구도를 띤다. 저주당하는 이들은 자신을 파괴하는 원인에 대한 분석이나 관찰 없이 자멸한다. 복수의 화신인 저주 토끼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정도로 예쁘다는 것이 치명적이다. 죽음으로 앙갚음하는 도식이 씁쓸함을 더하지만 부당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의 신화는 오래 가지 않음을 극명하게 보인다.

구전되어 오는 옛날이야기에 상상력을 보태어 현대적 구성에 담은 아홉 편의 단편 소설 역시 괴기스러움에 공포를 욱여넣은 듯하다. 변기 속에서 ‘머리’가 나오는 이야기는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하던 시절 화장실에 박혀 사는 귀신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떤 색깔의 종이를 줄지 물음을 던지며 말을 건넨다던 귀신의 환청과는 달리 볼일을 보고 변기에 물을 내려도 계속 나타나는 머리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던지는 남편의 한마디는 인간에 대한 경외와는 거리가 멀어 당혹스러움을 더한다.

자신의 고독을 이해하고 슬퍼하는 인간이 흘리는 눈물은 처연함이 묻어난다. 마을의 역병을 물리치고자 괴물에게 바쳐진 소년의 이야기 ‘흉터’는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내용의 설화를 모티브로 한다. 쇠사슬에 묶인 채 칠흑같이 어둡고 습한 동굴에 갇혀 지내는 소년의 목뼈에 단단하고 뾰족한 것을 쑤셔 넣는 이가 있다. 뼛속 깊이 고통이 흉터로 새겨진 소년은 무방비인 채로 잔혹한 고문에 시달리다 동굴로 내몰렸다. 갇힌 공간에서 위압적 권력을 행사하는 이에게 짓밟힌 소년도 어느새 청년이 되었다. 청년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길을 탐색하다 탈출에 성공해 야생의 열매를 먹으며 생명을 유지하지만, 환골탈태하여 인간으로 자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한 청년은 괴물이 이끄는 대로 투견장의 개처럼 짐승을 상대하거나 사람을 상대로 피 튀기는 싸움을 벌여 이겨야 했다. 청년은 상대와 싸워 승리해야 하는 압박의 사슬을 끊고 전쟁 같은 싸움터를 탈출하여 비극의 시원을 찾지만, 공중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해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고통으로 얼룩진 흉을 통증처럼 안고 살아야 하는 숙명에 내몰렸다.

야생 동물을 포획하기 위한 ‘덫’에 한 번 걸리면 헤어나기 힘든 상황에 빠진다. 덫에 걸린 여우의 머리에서 나는 금빛 액체를 굳혀 금덩이를 만들어 팔아 돈을 모은 아버지는 더 많은 금을 얻기 위하여 생명체에 상처를 낸다. 가정을 이룬 뒤에는 순도 높은 양질의 금을 모으는 데 쌍둥이 남매를 도구로 삼는다. 탐욕에 눈이 멀어 부성애까지 저버린 아버지는 자식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삼은 가장의 가정은 무너지고 모녀는 목숨까지 잃어 참척의 슬픔을 배가시킨다.

백 세 시대라고 하지만 인간은 환갑을 지나면서 신체 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다른 이의 도움을 받으며 지내게 된다. 유약한 인간을 보조하여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하여 개발된 인조인간의 도움을 받는다. 노후 된 인공 반려자는 새 제품으로 교체되어 쓰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동안 자신을 보필하였던 1호가 주인을 습격해 죽음에 이르게 한 ‘안녕, 내 사랑’은 사랑이라는 숭고한 단어의 의미가 무색해진다. 폐기되기 전 주인을 먼저 없애버린 인조인간의 습격은 디스토피아의 단면을 반영하는 듯하다.

돌연한 사고로 기억을 잃고 암흑 속에 갇힌 선생은 희미해지는 기억을 부여잡고 ‘차가운 손가락’이 가리키고 말하는 대로 움직였다. 늪지대를 벗어나려 하지만 점점 늪으로 빠져 차체가 내리누르는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동차와 함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차가운 손가락은 자신이 시키는 대로 행하던 선생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선생이 소중히 여기는 반지를 빼내어 취하며 설상가상의 상황에 놓인 선생을 방치한다. 예고 없이 오는 사고로 목숨을 잃고 인생의 향방이 틀어진 경우를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는 비정한 현실은 곳곳에 널려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의미 있었던 시간을 반추하며 지금의 고통을 상쇄하며 사는 삶에서 좋고 나쁨은 함께 존재함을 느낀다. 행복한 삶을 갈구하며 현재의 피로와 고통을 감내하며 자신을 옭아매는 현실을 견딘다. 어떤 기대를 걸 수도 없는 상황에서도 찰나의 행복을 발견하며 살아가기 위하여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의 물꼬를 튼다. 생존본능이 꿈틀댈 때마다 경각에 달린 삶의 시각도 조금씩 다른 빛깔로 주변을 물들인다. 망각의 시간과 만나며 망자들을 소리를 듣는 능력이 있는‘재회’의 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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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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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한 사연들은 공유해야 힘을 갖는다.’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하여 단절된 기억을 되살려 우리 민족의 맥을 이으려는 작가의 말은 전율케 한다. 국경을 초월한 채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찬 미래를 발원하던 사람들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의 강을 건넜다. 지금도 강을 건너다 목숨을 잃는 피란민들이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하여 강을 건너는 이들이 있다. 바다에 인접한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조선인 차별 속에서도 언젠가는 강 건너로 돌아가야 한다는 믿음으로 러시아인의 횡포를 견뎠다. 회령군 영산 전투에서 대패한 안중근은 구사일생으로 연추로 복귀하여 1909년 3월 눈 덮인 연추의 자작나무 숲에서 동지 열두 명과 함께 단지(斷指)로 혈맹을 결의하였다.

러일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제지하라는 일본의 압박 아래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강요하였다.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압박이 커질수록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려는 독립운동 의지는 더해 곳곳에 의병을 조직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임시정부 당시 동의회 창립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견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을 위하여 그는 한인 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극동 아시아 진출의 핵심 거점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광활한 공간에 닿고 싶은 바람을 싣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한인들의 이주가 많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러시아로의 귀화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한인들은 유교와 무속 신앙에 기반한 생활을 지속하다 콜레라 창궐로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 정부는 감염병 창궐의 원인을 제사 때 쓴 돼지고기를 빌미로 삼아 한인들이 거주하는 개척리를 폐쇄하였고, 극동지역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러시아 정부는 한인들의 노동력을 흡수하기 위해 힘을 썼다.

2004년 5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시 지신허 마을에 서태지가 헌정한 비가 섰다. 그는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과 러시아의 친선 우호를 돈독히 하며 우리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흥성거리던 옛 자취는 사라지고 황량한 터만 남아 사라진 사건과 기록을 불러내 서사를 복원하려는 듯하여 숙연해진다. 개척리에서 쫓겨난 한인들은 궁벽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새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으로 신한촌을 일궜다.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여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에 활력이 더해졌다. 노인동맹단의 일원인 강우규는 조선총독부 3대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러시아 내전으로 정세가 악화된 데다 일본군의 증파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로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간도 15만 원 사건으로 일본의 밀정으로 드러난 엄인섭의 변절은 그가 민족적 신념보다 우위에 둔 금력이 자신을 옭아맨 상황이 되어버렸다. 엄인섭과 달리 이범진은 헤이그 특사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이들의 활동을 도왔다. 극한에 이른 이범진은 자신의 최후를 부탁하며 자기를 파멸하였다. 무연고 묘로 분류돼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범진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추모비를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니 끊어졌던 민족적 서사가 이어지는 듯하다.

‘이 방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덴히그 이준 열사기념관에서는 미스터리에 부쳐진 그의 사망진단서가 걸려 있다.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의 만국 평화 회의에 출석,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 각국에 호소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 등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안중근이 생전에 가장 존경했던 인물 이상설은 상해에서 신한혁명당 활동의 성과가 미미하여 실의에 빠져 쇠잔해졌다. 이상설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동지들이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해 달라고 유언하였다.

북한의 함경도 지방과 중국, 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항일무장 독립투쟁을 벌인 홍범도 장군의 유품 사진을 봤을 때는 감동이 밀려왔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대승한 전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외손녀 김알란이 기억 속에는 없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커 보인다.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한국 독립군 부대와 소련 적군이 벌인 전투에서 숱한 사상자가 발생한 참변은 동족 간의 갈등이 초래한 비극적인 역사로 남았다.

사진은 소멸과 기억의 단절을 막는 발화제로 역사적 사건의 증거로 남는다. 퇴색된 사진을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당시의 상황을 남긴 사진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로운 출사는 알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궤적을 찾아나서는 길 위에서 빛을 발한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의 의로운 죽음을 조명해 망각하지 말아야 할 민족적 당위성을 톺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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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출 수 없는, 표정의 심리학 - 얼굴이 모든 것을 말한다
디르크 아일러트 지음, 손희주 옮김 / 미래의창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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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색이 별로 안 좋다며 어디 아픈 것 아니냐며 안부를 묻는 지인들의 관심에 감사하는 인사를 건넨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아픈 데가 없는지 낯빛을 보고 물어봐 주는 이의 관심은 소소한 애정의 표현이다. 알 수 없는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해도 상대에게 한마디 건네지 않고 자기 일만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몸이 만든 전체 언어를 해석하고, 각각의 다양한 신호가 합쳐져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지 분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책을 만났다.

뇌의 감정 중추와 연결되어 있는 안면 근육은 하루에도 여러 번 행복, 슬픔, 분노 또는 놀람과 같은 감정을 경험할 때, 뇌는 얼굴의 특정 근육에 신호를 보낸다. 이로 인해 눈썹의 위치, 입 모양, 눈가의 주름, 목소리의 높낮이 등이 감정에 복합적으로 실려 표정으로 드러난다. 변연계에서 일어나는 얼굴의 표정은 신체 언어로 감정을 표출하는 무대로 다름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신뢰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중요한 신호채널이다.

‘나는 너를 본다. 나는 너를 모든 감정과 희망, 바람을 가진 사람으로 바라본다. 너의 전부를 온전히 받아들인 다.’

아프리카 인사 방식인 사우보나에 담긴 의미를 새기며 감정의 무대라 불리는 표정에서부터 발과 다리의 움직임을 포괄하는 자세까지 관찰의 대상으로 삼아 저자는 심리적 해석을 돕는다. 보편적인 신체 행동 분석뿐 아니라 개별적인 신체 행동 분석을 위하여 면밀히 관찰하여 반복된 행동 패턴을 중심으로 분석한다.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손이나 몸을 반복적으로 만지는 횟수가 는다는 점에서 공감하며 태아가 뱃속에서 흥분을 조절하기 위하여 자신을 만진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다양한 실험과 연구를 통해 신체 언어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주는 실험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이해를 돕는다. 신체언어는 우리가 어떤 감정 상태인지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뿐 아니라 신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자신의 감정 상태에도 영향을 준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처럼 타인에 대한 이해가 부조한 채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느라 답답할 때면 심리학 서적을 들춰 볼 때도 있지만 해결은 쉽지 않았다. 타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상대의 표정과 말투에 귀를 기울이며 표정에 공명하려는 실천은 유대감 있은 관계 형성의 전제조건이다.

내적 자원을 활성화하는 코칭 전략인 ‘미소스 미팅’은 자신의 슈퍼 자원을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특정한 기본 욕구의 균형을 맞춰 삶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을 듯하다. 첫째, 나는 오늘 어떤 행동을 통해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는가? 둘째, 오늘 언제 안전하거나 편안하다고 여겼는가? 셋째, 오늘 무엇에 대해 감사함을 느꼈는가? 넷째, 오늘 어떤 기적을 마주하고, 언제 경외심을 느꼈는가? 다섯째, 오늘 누구를 기쁘게 했는가? 를 반복하며 다섯 가지 슈퍼 자원에 감정적으로 접근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람대로 실천하면 긍정적인 감정 회로가 활성화될 듯하다.

사회생활에서 사람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들 때면 정형화된 틀로 타자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표정과 감정이 연계되지 않아 오리무중인 상태라 답답해지기도 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며 발전적인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함께하는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읽을 필요가 있다. 감정이 우리의 경험과 행동에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적시하며 비언어적 신호는 우리의 감정과 생각, 개인적 성향의 결과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신체 언어로 드러나는 타인의 감정이 빚는 여러 현상을 관찰하면서 핵심을 파악하기 위하여 반복할 때에 공감능력은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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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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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갈래로 머리를 딴 소녀가 길 위를 걸어 어딘가로 향하는 그림 표지가 눈길을 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은 낯선 공간으로 발을 내딛는 단란한 가족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소녀는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어떤 말도 없이 엄마의 먼 친척인 킨셀라 아주머니 집에 맡겨진다. 딸을 데리고 간 아버지는 어린 딸과 헤어지는 아쉬움은커녕 짐짝을 부리듯 부리고 휑하니 집으로 돌아갔다. 어떤 이유에서 남의 집에서 생활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딸은 의아스러웠지만 덤덤히 받아들인다. 잘 지내고 있으면 다시 딸을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없이 바쁘게 돌아서는 아버지를 봐야 했던 딸은 슬픔을 삼켜야 했다.

 

   아동은 부모의 보호 아래 지내야 하지만 불가피한 사정으로 남의 집에 의탁한 채 지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주거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아이를 돌볼 여력이 없어 친척 집에 맡겨져 눈칫밥을 먹었던 시절이 떠올라 소녀에게 마음이 쓰인다. 의견을 내세우면서 살아갈 힘도 없는 소녀는 어려서부터 침묵하는 법을 배우고 이 상황을 감내하며 지내는 생존법을 터득해갔다. 낯선 환경에 놓인 소녀는 이전의 생활과는 다른 여유로운 시간에 마음을 놓지 못한 채 현재의 시간에 자신을 맡겼다. 소녀는 킨셀라 아주머니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며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려는 노력이 헛되이 돌아갈 수도 있는 실수를 했다. 자고 일어난 매트리스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지만, 아줌마는 무안해하는 소녀를 위하여 방안이 습하다며 에둘러 말했다.

 

  기존의 규범에서 이탈한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은 가정에서 나고 자라서인지 맡겨진 소녀에게 자꾸만 애가 쓰인다. 자신에게 침묵을 강요하며 인내하던 시절의 슬픔은 누구도 작은 아이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은 데서 왔다. 맏이로 집안 살림을 맡아 할머니 봉양을 해야 했고, 세 살 아래 남동생을 돌보는 일이 의무처럼 지워져 빨리 어른이 되어 집을 벗어나고 싶은 갈망이 컸는지도 모른다. 행여 닫힌 공간을 벗어나고 싶은 속내를 들키면 어떡하나 싶어 마음을 숨기고 지내야 했다. 욕구를 억누르며 스스로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던 시절이 떠올라 소녀가 자꾸만 신경 쓰인다.


   킨셀라 아주머니 집에서 머무는 동안 소녀는 부부가 자신에게 건네는 다정한 한마디 부드러운 손길에 적응하며 화목한 가정의 따스함을 누린다. 아이가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살뜰히 살피며 필요한 생필품을 챙기는 다정함은 소녀에게는 생경하다. 가족 구성원의 마음을 헤아릴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시간을 채워 오느라 에너지를 소진한 부모에게 기대할 수 없는 소중한 정서를 느끼며 소녀는 부부의 아픈 과거까지 알게 되었다. 죽은 아들의 옷을 버리지 못하고 보관 중인 부부는 소녀에게 그 옷을 입혀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 수 없는 피붙이의 흔적을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배가 불렀던, 소녀의 엄마는 때가 되어 아들을 출산하였다. 소녀는 동생의 출생 소식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동안 소녀를 맡아 기른 부부는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소녀가 본가로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동행하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몇 달을 떨어져 지낸 딸을 보고도 반색은커녕 잘 지냈는지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소녀는 반전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부모의 시큰둥한 반응에 서운할 법도 한데 내색하지 않았다. 맡겨둔 물건을 돌려받듯 딸을 마주한 아버지는 킨셀라 부부에게 고마움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

    는 아저씨의 말을 새기며 할 말은 하지만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는 소녀는 소설 말미에서 아빠를 부른다. 소녀를 집으로 바래다주고 걸음을 떼는 아저씨를 붙잡고 다시 아저씨를 따라 가고 싶은 바람이 소녀에게는 있었는지 모르겠다. 지금껏 따스한 보살핌을 받아본 적이 없는 소녀가 사랑의 의미를 일깨우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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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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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여섯 살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펄롱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늘 쫓기듯 살아왔다. 어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오갈 데 없는 그는 미시즈 윌슨 집에 기거하며 일을 거들었다. 모든 것을 잃는 일이 쉽게 일어나 옹색한 삶을 지탱하며 사느라 고단했던 펄롱은 아이린을 만나 결혼하여 슬하의 다섯 딸과 함께 살고 있지만 안락함이 오래 가지 않을 수도 있음을 염려하였다.

 

   펄롱 가정은 부유한 편은 아니지만 다섯 딸은 저마다 소질을 계발하고 역량을 발휘하며 꿈을 품고 실현하려 애쓰는 노력가인 점에 고마워하며 지냈다. 그는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에 쓰이는 재목처럼 딸들이 잘 자라 소용 있는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지냈다. 석탄 배달 일을 하는 그는 기본적인 생활조차 유지하기 힘든 사람들을 보며 혹독한 시기를 견디는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실질적인 가장으로 그는 조용히 지내며 굳건히 버티어 딸들이 세인트머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는 생활인을 자처하였다.

 

강 건너에 자리한 수녀원은 위세를 느낄 만한 시설로 타락한 여자들을 교화하는 공간,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여성들의 인권은 종교 시설인 수녀원의 이익을 창출하는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다. 수녀원으로 배달을 나간 날, 펄롱은 사람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헝클어진 채 바닥을 문지르고 있는 여자들을 보았다.

  “아저씨, 우리 좀 도아주시겠어요?, 강까지만 데려가 주세요. 그거면 돼요.”

  라고 간청하는 아이를 외면하고 나오는 길에 펄롱은 불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사실을 공유하였지만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

 

   힘든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빌 펄롱은 다시 수녀원을 찾았을 때, 석탄광에 갇힌 아이를 보고는 처참한 광경에 이를 외면하기 힘들었다. 수용소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녀의 간절한 외침을 두고 펄롱은 갈등하였다. 아이의 간절한 외침을 듣지 않고 위선자처럼 미사를 보러가는 걸음이 천근만근이었을 듯하다. 펄롱은 사랑의 화신인 성탄의 기쁨과는 달리 묵직한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강 건너 언덕을 오르며 수녀원 바깥을 돌며 수녀원을 둘러보았다. 수녀원 진입로를 따라 올라간 뒤 석탄광을 찾은 펄롱은 광에 갇힌 아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

 

   아일랜드의 모자 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 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친다는 말로 시작하는 소설은 사소한 것으로 여겼던 일이 결코 사소하지 않은 것으로 모아진다. 반복된 일상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감내할 수밖에 없던 펄롱은 내일을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야 했던 지난날과는 거리를 두고 용기 있게 나섰다. 가족의 안위에 중점을 두는 아내의 말을 들어 딸들과 가정을 위하여 침묵해야 할지, 용기를 내어 소녀에게 손을 내밀지 망설인 끝에 종국에는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향하였다. 가족의 냉대를 받을 수도 있지만 인권 유린의 수용소에서 고통 받는 타인을 위하여 구원의 손길을 내민 펄롱의 이타적인 사랑에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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