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우리돌의 들녘 - 국외독립운동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편 뭉우리돌 2
김동우 지음 / 수오서재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구절절한 사연들은 공유해야 힘을 갖는다.’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하여 단절된 기억을 되살려 우리 민족의 맥을 이으려는 작가의 말은 전율케 한다. 국경을 초월한 채 어떤 환경에서도 희망찬 미래를 발원하던 사람들은 대의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국경의 강을 건넜다. 지금도 강을 건너다 목숨을 잃는 피란민들이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위하여 강을 건너는 이들이 있다. 바다에 인접한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조선인 차별 속에서도 언젠가는 강 건너로 돌아가야 한다는 믿음으로 러시아인의 횡포를 견뎠다. 회령군 영산 전투에서 대패한 안중근은 구사일생으로 연추로 복귀하여 1909년 3월 눈 덮인 연추의 자작나무 숲에서 동지 열두 명과 함께 단지(斷指)로 혈맹을 결의하였다.

러일 전쟁에서 패한 러시아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제지하라는 일본의 압박 아래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강요하였다.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압박이 커질수록 잃어버린 주권을 회복하려는 독립운동 의지는 더해 곳곳에 의병을 조직했다. 독립운동가 최재형은 임시정부 당시 동의회 창립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견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 활동을 위하여 그는 한인 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극동 아시아 진출의 핵심 거점인 블라디보스토크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광활한 공간에 닿고 싶은 바람을 싣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한인들의 이주가 많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러시아로의 귀화를 강요하였다. 하지만 한인들은 유교와 무속 신앙에 기반한 생활을 지속하다 콜레라 창궐로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 정부는 감염병 창궐의 원인을 제사 때 쓴 돼지고기를 빌미로 삼아 한인들이 거주하는 개척리를 폐쇄하였고, 극동지역 개발이라는 명목 아래 러시아 정부는 한인들의 노동력을 흡수하기 위해 힘을 썼다.

2004년 5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시 지신허 마을에 서태지가 헌정한 비가 섰다. 그는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과 러시아의 친선 우호를 돈독히 하며 우리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흥성거리던 옛 자취는 사라지고 황량한 터만 남아 사라진 사건과 기록을 불러내 서사를 복원하려는 듯하여 숙연해진다. 개척리에서 쫓겨난 한인들은 궁벽한 황무지를 개간하여 새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뜻으로 신한촌을 일궜다. 신한촌에서 독립운동의 기틀을 마련하여 러시아 혁명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에 활력이 더해졌다. 노인동맹단의 일원인 강우규는 조선총독부 3대 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러시아 내전으로 정세가 악화된 데다 일본군의 증파로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되었고,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로 신한촌은 폐허가 되었다. 간도 15만 원 사건으로 일본의 밀정으로 드러난 엄인섭의 변절은 그가 민족적 신념보다 우위에 둔 금력이 자신을 옭아맨 상황이 되어버렸다. 엄인섭과 달리 이범진은 헤이그 특사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이들의 활동을 도왔다. 극한에 이른 이범진은 자신의 최후를 부탁하며 자기를 파멸하였다. 무연고 묘로 분류돼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이범진의 탄생 150주년을 맞아 추모비를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니 끊어졌던 민족적 서사가 이어지는 듯하다.

‘이 방에서 이준 열사가 순국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의 덴히그 이준 열사기념관에서는 미스터리에 부쳐진 그의 사망진단서가 걸려 있다. 1907년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헤이그의 만국 평화 회의에 출석,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세계 각국에 호소하려 하였으나 일본과 영국 등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안중근이 생전에 가장 존경했던 인물 이상설은 상해에서 신한혁명당 활동의 성과가 미미하여 실의에 빠져 쇠잔해졌다. 이상설은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도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동지들이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해 달라고 유언하였다.

북한의 함경도 지방과 중국, 러시아 등지를 오가며 항일무장 독립투쟁을 벌인 홍범도 장군의 유품 사진을 봤을 때는 감동이 밀려왔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대승한 전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외손녀 김알란이 기억 속에는 없지만 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커 보인다.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한국 독립군 부대와 소련 적군이 벌인 전투에서 숱한 사상자가 발생한 참변은 동족 간의 갈등이 초래한 비극적인 역사로 남았다.

사진은 소멸과 기억의 단절을 막는 발화제로 역사적 사건의 증거로 남는다. 퇴색된 사진을 복원하기 위해서라도 당시의 상황을 남긴 사진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의로운 출사는 알지 못한 독립운동가의 활약상을 알 수 있는 궤적을 찾아나서는 길 위에서 빛을 발한다. 나라의 주권을 되찾는 일에 목숨을 걸었던 순국선열의 의로운 죽음을 조명해 망각하지 말아야 할 민족적 당위성을 톺아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