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수업 - 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
김헌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간경화를 앓던 이가 백신을 접종한 뒤 나흘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망자의 십대 때부터 알고 지낸 터라 비보를 듣고 장례식장을 다녀왔다. 칠순의 노모는 망연자실한 채 넋을 놓고 있었고 상주인 아들은 이제 겨우 열여섯이라 막막함은 더했다. 정신을 잃고 병원에 누워 있다 황망한 죽음을 맞은 이의 영혼을 떠올리며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자유롭지 않은 삶을 떠올린다. 비보를 듣고 상가를 찾았다 오는 길,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유한한 인생에 물음을 던지며 울음을 삼킨다.

 

   여느 동물들과 달리 사람은 존재에 대한 물음을 던지며 인간답게 살아가려고 한다. 욕구들에 바탕을 둔 본능을 통제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하기를 바란다. 찰나의 감정에 이끌려 본능대로 행동하다가도 추하지 않은 몸짓이었는지 물음을 던지며 마음을 다잡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천 년이 넘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철학과 인문학은 자아의 본질을 참구하는 일에 관심을 드러냈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서 언급한 프로네시스는 여러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며 시의적절하고 상황에 걸맞은 답을 끌어내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는 삶을 위해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할 9가지 질문들에 대한 사유는 회한을 낳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는 경쟁 구도는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기보다는 남들과 비교하며 더 높은 데로 오르기 위해 방향을 잡는다. 평준화된 삶에서 이탈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며 살아가는 일은 유별난 일로 비춰져 규격화된 생활을 저해하는 요소로 받아들이기 일쑤다. 남들과 다른 길을 걸을 용기가 있더라도 쉽게 걷지 않은 길을 향해 걸음을 떼기 쉽지 않은 사회 분위기는 개인의 주체적인 판단까지 흐리게 한다

 

   지식을 암기하여 기술하는 시험에 익숙한 학생들은 의무교육 과정을 거쳐 입학한 고등학교는 대학 진학을 위한 가교로 친구들과 특별한 경험을 쌓을 시간조차 쉽사리 허락하지 않는다. 고전 속 가르침을 새기며 점수에 저당 잡힌 채 마음의 여백을 찾지 못하는 수험생은 앞만 보고 달리느라 곁을 내주어 자연의 질서를 음미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입버릇처럼 피곤하다고 말하며 여유 있게 우정을 쌓을 시간도 내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정작 자신을 성찰하지 못할 때가 있다. 수시전형 접수를 끝낸 학생들은 마감된 경쟁률을 보면서 불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동일한 학교의 학과를 지원한 이들을 누르고 우위를 차지해야 합격선에 들어간다는 기대감이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물음을 던지며 스스로 답을 찾는 해결능력보다는 정답을 쉽게 찾는 방법을 익히는 데 집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여러 분야에서 인공지능이 사람의 역할을 대신함으로써 수많은 일자리가 사라지고 특정한 기술의 필요성이 커질 수 있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잘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어릴 때부터 의문을 품고 그 내용을 질문하며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일상이 수반되어야 미래를 살아갈 힘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을 전달하는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할 힘을 길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에 함께 서서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친부 살해의 비극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신화 속 주인공들 이야기를 통해 기성세대와 다음세대의 마찰과 갈등을 가늠할 수가 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그들이 짜주는 틀을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부모의 관념을 자식에게 이식하려는 데서 갈등은 점화한다. 울며 겨자 먹기로 부모의 뜻을 좇아 안정적인 일을 하고 있지만 발전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이에 반해 자유를 갈망하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고정적인 틀을 깨고 새롭게 자신만의 틀을 만들어가는 일은 나답게 살 수 있는 길로 이어진다

 

   나를 잘 알고 나아가서는 인간을 잘 알고 행복한 삶을 꾸리기 위해 인문학적 통찰은 필요하다.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가늠하기 어렵고, 한 번뿐인 인생이 언제쯤 끝이 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현재적 삶을 바로 사는 일은 후회를 줄이는 일이다.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길에 물음을 던지며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묻지만 질문에 섣불리 답을 내리기보다는 끊임없이 판단을 중지하는 에포케가 필요하다. 인생의 완급을 조절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에 속도를 제어함으로써 일상에서 발견하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꿋꿋이 행동하면서도 융통성을 가지고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있는 토대는 인생의 주인공인 내가 마련해야 한다.

 

  행하는 이 일이 멋있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추하지는 않은가?

   되짚어 물으며 가치 판단의 기술을 적용하며 다변화된 시대를 살아갈 때 점진적인 발전이 가능함을 경험으로 알아차린다. 겪어보지 않은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린 고전을 읽으며 그 속에 담긴 삶의 지혜로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찾는 과정은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갈수록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다른 세계의 다양한 삶을 이해하고 대리 경험하여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에 고전은 한 획을 긋는다. 지나고 보면 어느 것 하나 평탄하지 않았던 인생의 좌표에 독서 경험은 적절한 처방으로 자리한다. 그 어떤 사람들의 위로보다 힘이 되고 평안을 줬던 작품은 인생의 든든한 울타리로 신산한 시간을 버티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향하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걱정 없이 일상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가피한 상황들은 평범한 생활을 잇는 것마저 힘들게 합니다. 선택 기회도 없이 태어나 철이 채 들기도 전에 생계를 돌보며 지내야 하는 소녀들의 고달픔은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는 더합니다. 일본의 야욕에 짓밟힌 민족으로 개개인이 생존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충은 컸습니다. 강제 점령된 나라의 백성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기 녹록치 않은 시간은 무탈한 일상을 파괴하고 가족의 고리마저 떼어 놓는 일들을 견뎌야 했습니다.

 

    나고 자란 곳을 떠나 꿈꾸며 살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나서는 길이 쉽지 않을진대 길 위에 서는 이들이 있습니다. 해외 이주 노동자들이 우리나라를 기회의 땅으로 여기며 고국을 떠나온 것처럼 일제강점기 가난한 한국인에게 하와이는 기회와 꿈의 땅이었습니다.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일하는 남성들은 사진결혼으로 고국의 신부를 맞았습니다. 열여덟 살, 버들은 부산 아지매의 소개로 포와로 시집을 가 못한 공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결혼한 여자들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 쉽지 않았지만 꿈을 펼칠 수 있는 공간으로의 이주는 설렘과 두려움이 함께했습니다.

 

   김해의 작은 동네인 어진말에서 막역하게 자란 버들과 홍주는 사진 한 장 들고 하와이에 도착하였습니다. 홍주는 아버지의 양반 병 때문에 반가(班家)시집을 갔지만 병든 남편이 죽자 이내 어진말로 돌아와 지내다 버들과 함께 희망의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무녀의 딸 송화는 할머니의 부탁으로 포와로 가게 되었습니다. 여성들은 지참금과 함께 받은 사진 한 장에 의지한 채 나은 세상을 그리며 배 멀미를 견뎠습니다. 사진결혼 성사를 위해 거쳐야 할 관문들을 통과할 때마다 동행한 여성들의 희비는 엇갈렸고, 하와이에 도착해서는 사진과 다른 남성들의 모습에 울분을 드러내기도 하였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사탕수수 밭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느라 노화의 진행이 빨라졌기 때문입니다.

 

   버들은 사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태완의 모습에 안도하다가도 사진과는 달리 늙은 남성들 모습에 실망이 큰 홍주와 송화를 보며 내색할 수도 없었습니다. 여인들은 교회에서 합동으로 결혼식을 올린 뒤 각자의 영역으로 흩어져 가정을 이루고 지내야 해 이별의 아쉬움이 컸습니다. 낯선 땅에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고 살아야 할 일이 꿈만 같았지만 세 사람은 첫발을 내디딘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버들은 중풍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아버지를 모시면서도 세탁장에서 번 돈을 친정에 송금하였고, 삯바느질로 번 돈을 식비에 보태었습니다. 세탁장에서 사진결혼의 내력을 들은 버들은 달이를 가슴에 품고 사느라 자신에게 냉랭한 태완에게 서운함을 삼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뜬 시어머니 산소를 찾은 날, 버들은 남편으로부터 달이 이야기를 듣고서야 오해를 풀 수 있었습니다.

 

   태완은 맏아들 정호를 얻은 뒤 독립 운동의 의의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유랑민으로 한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기 힘든 시간을 견디느라 고단했던 시간을 돌려놓는 일은 조국의 독립이라 여겼습니다. 자식들만큼은 독립된 나라에서 마음 편히 살 수 있기를 바라며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역사는 하와이로 이주해온 한인들 사회에서도 뚜렷했습니다. 태완은 독립단 사무직원으로 활동하며 영역을 넓혀 중국까지 가서 항일 운동에 가담하였습니다. 의병 활동을 하다 세상을 뜬 아버지, 일본 경찰에게 저항하다 목숨을 잃은 오빠를 둔 버들은 대의를 품고 떠나는 남편에게 살아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하였습니다.

 

    딸만 다섯을 둔 덕삼은 아들을 얻기 위해 하와이로 와서 노동하며 지냈습니다. 사진결혼으로 홍주를 아내로 맞은 덕삼은 아들 성길을 얻은 뒤 아들과 함께 고국으로 떠났습니다. 홍주는 병든 시모를 봉양하는 덕삼의 전처를 생각하며 아들을 떼어 보내고 버들과 함께 세탁소 일에 매달렸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낸 빈자리를 채우기라도 하듯.....솜씨 좋은 버들과 일감을 몰아오기를 잘하는 홍주와 함께하는 시스터즈 런드리 사업은 조금씩 번창해 갔습니다. 남편을 잃고 함께 지내던 송화는 딸을 낳은 뒤 무병이 더 심해져 고국으로 돌아가고, 딸은 버들이 친딸처럼 키우며 가슴에 품은 펄을 대신하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나답게 살기 위해 춤을 추며 살고 싶은 펄은 뒤늦게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전도유망한 오빠의 돌연한 군 입대 결정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을 굳힙니다. 하와이에 온 세 엄마를 의지하며 생활해 온 펄은 자신을 낳아준 엄마, 키워준 엄마, 함께 지내게 해 준 엄마의 삶을 떠올립니다. 새로운 세상과 만나 성장하는 자신을 그리며 꿈을 찾아 어진말을 떠나 하와이로 이주한 엄마들은 갖은 풍파를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왔고 살아갈 것입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내려는 이들의 생명 의지를 톺아보며 펄은 오롯한 나를 찾아가는 여정에 섰습니다.

    ‘선택한 내 삶의 여정에 축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완전한 행복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은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로 시작한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한 삶을 사는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이들은 저마다 행복을 갈구하며 지낸다. <<완전한 행복>> 속 유나 역시 자신이 정해둔 기준에 맞춰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 했다.

행복은 뺄셈이야. 완전해질 때까지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 가는 것.’

행복한 순간이 더해지는 셈이 행복이라는 은호에게 아내 유나는 불행의 가능성을 없애가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 했다. 지금껏 유나는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기는커녕 모든 일이 자신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너 때문에 짜증이 난다.’

    는 말을 딸에게 서슴지 않는 유나는 반달 늪이 있는 시골집에 들러 잔혹한 일을 벌일 때가 있다. 민서기· 믹서· 칼 등으로 돼지고기로 오리 먹이를 능숙하게 만드는 엄마와 지낼 때면 지유는 엄마가 정해놓은 많은 규칙을 따라야 했다. 착한 딸은 엄마에게 부정적인 답을 하지 않아야 한다며 유나는 딸 지유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길들여왔다. 딸의 생각은 고려하지 않고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을 어기면 벌을 주는 엄마였다. 엄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날에는 유치원생 딸을 보육원으로 내모는 일도 서슴지 않는 가학성을 띠었다. 영악한데다 눈치가 빠른 지유는 지배력을 행사하는 엄마의 뜻대로 움직이거나 침묵하여야 했다. 유나는 가족들의 음식 기호와는 달리 온 가족이 함께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이 즐기는 음식 굴라시를 만들어 식탁에 올릴 정도로 자기 본위로 살아왔다.

 

    부모 사정으로 언니 대신 시골 조부모 집에 따로 떨어져 지내야 했던 동생 유나는 그 상황을 전부 언니 탓으로 돌렸다. 할머니 네에서 지낸 시간, 유나는 조부모의 사랑을 받기는커녕 고통을 겪으며 지낸 시간을 언니 재인 탓으로 돌리고는 성인이 되어서도 언니를 도둑년이라 부르며 괴롭혔다. 착한 딸 콤플렉스에 빠져 지낸 재인은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스스로 감내해야 할 몫이라 여겼을 뿐이다. 재인은 대학 시절 스스럼없이 잘 지낸 준영과 동생 유나가 결혼하는 맥락 없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자매간의 거리는 극단으로 치달았다. 서로 엮이지 않고 제 갈 길을 찾아가는 것이 나은 길이라 여기며 지내왔을 터이지만 엮일 일이 없을 것 같았던 자매 사이에 운명의 고리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채워지곤 한다.

 

    엄마의 이혼 후 주중에는 외가에서 생활하는 지유는 주말에는 새아빠 네로 가서 지낸다. 은호 역시 어머니 집에서 지내는 아들 노아를 데려와 함께 보내지만 결이 다른 시간을 보낸 가정의 재결합은 화목한 가정으로 재탄생하지 못하였다. 실패가 인생의 패턴이 될까 두려운 은호는 먼저 백기를 들고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불안정한 가정을 유지해왔을 뿐이다물불을 가리지 않는 양극단의 성격을 보이는 유나는 짐을 챙겨 지유와 함께 집을 나간 뒤 존재한다는 말로만 들었던 처형 재인을 만난 은호는 감당하기 힘든 요소가 도처에 매복해 있음을 알아차렸다.

 

   아내와의 결혼으로 뭘 감당해야 하는지 미리 알았다면, 그래도 결혼했을지 확신하기 힘든 은호는 이혼 후 바이칼 호수에서 만났던 유나를 떠올린다. 바이칼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호수로 다양한 생태 동식물의 보고이다. 은호는 한없이 넓은 호수, 끝 간 데 없는 시원을 찾아 이혼의 상흔을 녹여 풀어 넣고 싶은 마음이 동한 자리에서 높은 음으로 깔깔 웃는 유나의 치명적인 매력에 현혹되었다. 첫 결혼 실패 후 은호는 지는 것이 망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유나와의 쉽지 않은 재혼을 이어갔다. 은호는 감정 표출에 완벽하게 응하는 유나와의 결혼 생활이 쉽지 않았지만 아내와의 결혼에 책임을 다하고 싶었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유나와의 결혼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노아의 돌연한 죽음으로 아들을 잃은 충격과 살인 혐의에서 동시에 벗어나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인 은호는 유나와의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싶었다.

 

   삶의 매 순간 몰입하여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풀어가려는 여자 유나는 자해를 하거나 가해를 하며 타인의 삶까지 깡그리 짓밟는 인권 유린을 자행하였다. 한 번 제 것은 영원한 제 것으로 자리하길 바란 유나는 제 것이 남에게 넘어가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기 안에 거울을 품고 사는 유나는 자신을 여왕이라 말해주는 마법의 거울을 지니고 있었음을 은호는 뒤늦게 알아차린다. 유나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한 남자들은 졸음운전으로 죽음을 맞았고, 이혼 후 딸의 얼굴을 보겠다는 전남편 준영은 반달 늪이 있는 곳에서 행방이 묘연해졌다. 신재는 서준영의 실종과 유나의 행방이 관련 있을 것이라 여기며 그녀의 뒤를 밟다 죽음의 고비에 이르러서야 동생의 가학성이 지나친 자기애에서 발로된 행동임을 알아차린다. 은호 역시 아내에 대한 두려움과 분노를 느끼면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직장까지 잃은 극한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기 환멸에 이르렀다.

 

   ‘마리아, 마리아

   사랑하는 마리아................

   그대를 잊으려고 꽃을 꺾었네.

   눈물을 흘리면서 꽃을 꺾었네.’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노래는 음울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애절한 그리움을 돋운다.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살다 보면 운명의 힘 같은 것이 작용하여 원치 않는 길로 빠져들어 헤어나기 힘들 때가 있다. 끝없는 미로 속을 헤매듯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외부적 힘에 끌려 나락으로 전락하여 회생불능의 상황에 이를 때가 있다타인에 대한 공감 없이 자신의 생각만을 밀고 나가는 한 인물로 인해 여러 사람의 인생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 생각이 옳지 않다고 수정을 요구하거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였을 때는 반사회적인 행동도 삼가지 않는 그녀의 극악무도한 가스라이팅은 어린 딸에게까지 이뤄졌다. 자신에게 도취되어 생각의 오류를 정정할 생각조차 갖지 못한 채 타인의 인격까지 짓밟아서라도 완전한 행복을 이루려는 유나의 뜻은 꺾였고 이를 견디지 못한 그녀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내재된 불행의 요소를 제거하여 완전한 행복을 이루려 했던 그녀는 관계 파탄을 야기하여 불완전한 행복에 이르고 말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고 삶의 햇수가 늘어날수록 함께한 추억 속 인물과의 이별 시간은 빨라진다.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내고 그럭저럭 살아온 동주는 치매 걸린 언니가 머무르는 요양원 매화나무 아래에서 삶과 죽음을 통찰한다. 기적처럼 할머니가 소생하기를 바라기보다는 그냥 살아 계시며 좋겠다는 손자 승훈의 말을 들으며 뭐라도 할 수 있을 때가 좋은 시절이었음을 떠올린다. 눈을 맞고 서 있던 매화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화사한 빛으로 피어나 상춘객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처럼 죽음을 향해 가는 언니에게도 좋은 기억이 가득하길 바라며 동주는 언니와의 이별을 예비한다.

 

    지울 수만 있다면 모든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교복을 안 입고 여름 보충수업을 받으러 왔다는 이유로 학생주임으로부터 뺨을 맞은 오기속 초아는 새의 선물을 읽으며 그 시간 노기를 삭혔다. 초아는 김혜원 선생님이 건네 준 책을 아직도 갖고 있었던 점을 떠올리며 선생님이 재직하는 미디어학부 초청 강연을 수락하였다. 강연 후 뒤풀이 자리에서 선생님이 당한 가정 폭력 이야기를 들었다. 초아 역시 아버지와 오빠로 이어지는 남성 중심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온 시간을 불러내 책으로 출간하였다. 초아가 쓴 소설을 보고 선생님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나만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배신감을 전해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위 높은 악성 댓글에 시달리던 초아는 이 일에 대한 고소를 진행하면서 선생님의 오해를 풀기 위해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선생님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는 못한 듯하다. 자신의 고통과 상흔의 깊이를 가늠키 힘들 정도로 잔상들로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직책도 없이 회사에 들어온 미스 김은 회사의 자질구레한 일부터 굵직한 일들을 포괄하여 일을 처리해야 했다. 정해진 일은 없는 대신 모든 일을 척척해냈던 미스 김은 제일 낮은 위치에서 회사의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 조율하여 병원 홍보대행까지 자처했다. 미스 김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던지 미스 김은 해고되었고 그 이후 유령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들이 벌어졌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속 혈연과 학연 등의 인맥 중심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자회사를 지키려는 동물적 본능이 미스 김 해고 이면에는 자리한다.

   ‘엄마, 업데이트 좀 해.’

   라고 말하는 딸의 성장을 보며 여자아이는 자라서속 모녀는 왜곡된 성적(性的) 관념을 짚으며 편협한 성희롱 예방 교육의 허점을 짚어내며 고민한다.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성희롱은 가한 이들의 책임을 묻는 것인 정당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오로라의 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하나하나씩 이뤄내는 기쁨은 크다. 고등학교 교감으로 있는 쉰일곱의 효경은 더 나이 들기 전에 캐나다로 오로라를 보러 가야겠다고 작정한다. 딸 지혜는 직장여성으로 일하는데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효경은 단호하게 이를 거절한다. 딸은 서운함을 비치지만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드러내는 어머니는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낸다. 우여곡절 끝에 팔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니와 떠난 캐나다 여행, 눈밭에 누워 오로라를 보며 고부(姑婦)는 소원을 빌었다. 효경은 한민이 보기 싫다고 외치고, 시어머니는 오래오래 살게 해 달라고 하는 대목이 우습기도 하지만 더 나이 들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는 여성의 당당함으로 비춰졌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이제라도 내 인생 살고 싶다. 나를 찾지 마라.’

   ‘가출하면서 남긴 남편의 쪽지를 본 아내는 가장 중심으로 돌아가던 집안 살림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였다. 공과금 납부일이 다가오자 남편의 가출을 자식들에게 알린 아내는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사는 법을 익힌다. 팬티 한 장과 현금 160만 원을 들고 나간 아버지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자식들은 아버지의 가출로 더 우애 있게 지내며 함께했다. 아버지가 귀애하던 딸이 준 신용카드 소비를 알리는 메시지를 전송받으며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있음에 안심하며 서로의 자리에 충실하였다.

 

   10년을 만난 남자 친구인 현남 오빠의 청혼을 거절하는 주인공은 현남 오빠에게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주인공의 서울 살이 적응을 도우며 오빠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동생이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는 강현남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다. 애정을 빙자해 상대를 가두고 제한하며 무시한 오빠의 애착에 비수를 꽂는 한마디,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강현남, 이 개자식아!’

 

 

    코로나 확진자가 기록을 경신하고 주위의 확진이 늘어날 때마다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34도를 웃도는 날에도 마스크를 끼고 생활해야 하는 한여름을 건강하게 보내기 쉽지 않다. ‘첫사랑 2020’ 속 초등학생 서연과 승민이 사귀기로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일상을 공유하였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등교일이 늦춰지고 등교하더라도 학교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고 승민은 학원 수업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어 둘의 만남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서연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승민은 울음으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지난한 코로나 정국에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채 서로 애 끓이는 연인도 많을 것이다. 걱정 없이 만나 웃고 떠들며 우리 시간을 꾸려가던 일들도 기억 저편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시간이 점점 두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절망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우리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팀플레이 트리플 6
조우리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직장 생활 32년째 크고 작은 고비가 있었지만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내 그릇이 되니까 이런 일이 내게로 온다고 여기며 지냈다. 열 살이나 위인 선배가 다른 여직원들과 함께 자신을 은근히 따돌릴 때에도 홀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지냈다. 이름 모를 잡초처럼 사회에 던져져 스스로 척박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며 자신을 관리해왔다. 후배에게 다정다감한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후배들이 들어오면 잘해줘야겠다는 마음만 앞섰을 뿐 그다지 잘해 준 기억은 없지만 대놓고 후배를 힘들게 한 기억도 없다. 한 조직에서 희망을 예견할 때 조직 구성원들 간의 협력을 중시할 때가 있다. 서로 다른 개체로 만나 한 방향을 보면서 서로의 욕망을 조절하며 공공의 선을 실현하는 조직은 희망적이다.

 

언니의 일소설을 읽으며 인턴 생활을 시작한 다정에게 좋은 사수가 되고 싶었던 은희의 욕망을 보면서 나를 떠올린다. 한 조직의 팀장으로 신출내기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는 의무가 맡은 일을 잘해내야 한다는 책무를 더하며 후배들을 힘들게 했는지도 모른다. 물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려던 생각은 이미 버린 지 오래다. 정형화된 틀대로 움직이는 교육시스템에서 자구책을 찾지 않는 태도를 보고 물고기를 잡아다 입에 넣어주기 일쑤다. 후배 다정의 우연한 연락을 계기로 옛 직장 동료들과 만나 오랜 세월 간극을 메워 줄 그 시절 이야기는 전개되는데 각기 기억하는 부분이 달랐다. 모임을 주선한 은희는 괜한 짓을 해서 왜곡된 기억을 바로 잡을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자 후회막급이다. 그렇다고 하여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도 없는 상황에서 한때 한 공간에서 함께했던 기억들을 바로 잡으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상사에게 혼나는 인턴 사원이 주눅 들지 않게 격려하던 은희를 성취욕을 충족하기 위해 욕망을 드러내는 이로 치부하지만 우산의 내력에 나오는 희진은 다르다. 정규직 전환을 앞둔 인턴 지우에게 힘이 되는 상사이다. 재계약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지우가 회의 준비 미흡으로 허둥댈 때 위기를 넘길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한다. 지우가 필요로 하는 부분을 채워주는 희진은 업무 능력이 뛰어난 양민지를 보면서 인간적으로 믿음이 가는 상사가 되려고 노력하였다.

  ‘이해가 안 되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양민지는 부족함이 있는 직원들을 하대하는 경향이 컸고, 잘하고 싶은 희망의 싹까지 앗아가는 인물이었다. 그 시절 희진은 매일같이 야근을 하면서도 자주 나무람을 들어야 했다. 직장 생활하다 보면 부정적인 말들로 상대의 마음까지 어둡게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잘 안 되더라도 기운을 불어넣는 이가 있다. 어떤 이를 가까이 하며 지내야 할 것인지는 개인의 판단 몫이겠지만 긍정적인 태도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희망적일 테다. 우산을 잡다 우산 속에 남자가 있음을 뒤늦게 발견한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경험으로 알아차리고 속단은 금물이라는 진리를 다시 떠올린다.

 

   원하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이 삶이라 했지만 올해는 유독 마음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하며 지내야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트러블 메이커로 한 직장 분위기를 진창으로 만드는 이로 인해 여럿이 마음을 다쳤다. 코로나로 힘든 정국을 헤쳐가야 하는 상황에서 팀플레이가 좋아도 힘든데 동료들과 함께 의견을 모으는 일이 쉽지 않았다. ‘팀플레이속 지연은 한 대학의 대학원에 자리 잡은 지연은 은주에게 졸업 작품을 제작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졸업을 위해서라면 장 교수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는 지연은 은주에게 작성한 시나리오를 보여 달라고 하였다. 은주의 허락도 없이 시나리오는 지연의 손을 거쳐 장 교수에게 넘겨졌고 어느 새 그 시나리오는 장 교수 작품으로 둔갑되었다.

 

   뜻하지 않은 자리에 함께하면서 나의 선택과 결정과는 알리 일이 꼬일 때가 있다. 우연한 일이 반복되면 필연이 된다는 말처럼 우연한 만남이 건널 수 없는 심연의 강을 넘고 말아 다시는 회복하기 힘든 관계로 번지곤 한다. 장 교수가 타국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는 기사와 함께 지연이 유명세를 타는 장 교수가 발표한 작품에는 자신의 작품인 것이 없었을 정도로 많은 이들의 작품을 제 작품인 것처럼 발표했다니 교수직을 걷는 이의 파렴치함에 씁쓸해진다. 어떤 이는 고인이 된 이의 흠집을 내기를 망설이지만 지연과 은주는 마침내 팀플레이를 발휘하기에 이르렀다.

 

   세 편의 소설 뒤에는 저자가 겪은 일상의 소소한 경험이 소설 창작의 모티브로 작용했음을 밝히는 수필이 실려 있다. 많은 경험 속에 여러 사람의 공감을 얻을 만한 소설을 써내려가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반복된 일상에서 발견한 일들에 상상력을 불어넣어 독자들의 공감을 얻는 일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일로 귀결될 것이다. 때로는 나쁜 사람이 되더라도 현실을 바로 보는 일상인으로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스스로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치우쳐 희진과 은주, 은희를 만났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