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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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온 시간이 길어지고 삶의 햇수가 늘어날수록 함께한 추억 속 인물과의 이별 시간은 빨라진다.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내고 그럭저럭 살아온 동주는 치매 걸린 언니가 머무르는 요양원 매화나무 아래에서 삶과 죽음을 통찰한다. 기적처럼 할머니가 소생하기를 바라기보다는 그냥 살아 계시며 좋겠다는 손자 승훈의 말을 들으며 뭐라도 할 수 있을 때가 좋은 시절이었음을 떠올린다. 눈을 맞고 서 있던 매화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히고 화사한 빛으로 피어나 상춘객 마음을 달뜨게 하는 것처럼 죽음을 향해 가는 언니에게도 좋은 기억이 가득하길 바라며 동주는 언니와의 이별을 예비한다.

 

    지울 수만 있다면 모든 기억들을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교복을 안 입고 여름 보충수업을 받으러 왔다는 이유로 학생주임으로부터 뺨을 맞은 오기속 초아는 새의 선물을 읽으며 그 시간 노기를 삭혔다. 초아는 김혜원 선생님이 건네 준 책을 아직도 갖고 있었던 점을 떠올리며 선생님이 재직하는 미디어학부 초청 강연을 수락하였다. 강연 후 뒤풀이 자리에서 선생님이 당한 가정 폭력 이야기를 들었다. 초아 역시 아버지와 오빠로 이어지는 남성 중심의 폭력에 시달리며 살아온 시간을 불러내 책으로 출간하였다. 초아가 쓴 소설을 보고 선생님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나만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며 배신감을 전해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위 높은 악성 댓글에 시달리던 초아는 이 일에 대한 고소를 진행하면서 선생님의 오해를 풀기 위해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선생님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이야기로 받아들이지는 못한 듯하다. 자신의 고통과 상흔의 깊이를 가늠키 힘들 정도로 잔상들로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직책도 없이 회사에 들어온 미스 김은 회사의 자질구레한 일부터 굵직한 일들을 포괄하여 일을 처리해야 했다. 정해진 일은 없는 대신 모든 일을 척척해냈던 미스 김은 제일 낮은 위치에서 회사의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 조율하여 병원 홍보대행까지 자처했다. 미스 김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던지 미스 김은 해고되었고 그 이후 유령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들이 벌어졌다. ‘미스 김은 알고 있다속 혈연과 학연 등의 인맥 중심 회사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자회사를 지키려는 동물적 본능이 미스 김 해고 이면에는 자리한다.

   ‘엄마, 업데이트 좀 해.’

   라고 말하는 딸의 성장을 보며 여자아이는 자라서속 모녀는 왜곡된 성적(性的) 관념을 짚으며 편협한 성희롱 예방 교육의 허점을 짚어내며 고민한다.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성희롱은 가한 이들의 책임을 묻는 것인 정당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오로라의 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하나하나씩 이뤄내는 기쁨은 크다. 고등학교 교감으로 있는 쉰일곱의 효경은 더 나이 들기 전에 캐나다로 오로라를 보러 가야겠다고 작정한다. 딸 지혜는 직장여성으로 일하는데 친정 엄마의 도움을 받으려 하지만 효경은 단호하게 이를 거절한다. 딸은 서운함을 비치지만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드러내는 어머니는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낸다. 우여곡절 끝에 팔순을 바라보는 시어머니와 떠난 캐나다 여행, 눈밭에 누워 오로라를 보며 고부(姑婦)는 소원을 빌었다. 효경은 한민이 보기 싫다고 외치고, 시어머니는 오래오래 살게 해 달라고 하는 대목이 우습기도 하지만 더 나이 들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는 여성의 당당함으로 비춰졌다.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니. 이제라도 내 인생 살고 싶다. 나를 찾지 마라.’

   ‘가출하면서 남긴 남편의 쪽지를 본 아내는 가장 중심으로 돌아가던 집안 살림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였다. 공과금 납부일이 다가오자 남편의 가출을 자식들에게 알린 아내는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내며 사는 법을 익힌다. 팬티 한 장과 현금 160만 원을 들고 나간 아버지를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자식들은 아버지의 가출로 더 우애 있게 지내며 함께했다. 아버지가 귀애하던 딸이 준 신용카드 소비를 알리는 메시지를 전송받으며 아버지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아있음에 안심하며 서로의 자리에 충실하였다.

 

   10년을 만난 남자 친구인 현남 오빠의 청혼을 거절하는 주인공은 현남 오빠에게보내는 편지에 자신의 생각을 담았다. 주인공의 서울 살이 적응을 도우며 오빠가 조종하는 대로 움직이는 동생이 되어버린 그녀는 이제는 강현남의 그늘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살고 싶었다. 애정을 빙자해 상대를 가두고 제한하며 무시한 오빠의 애착에 비수를 꽂는 한마디,

사람 하나 바보 만들어서 마음대로 휘두르니까 좋았니? 강현남, 이 개자식아!’

 

 

    코로나 확진자가 기록을 경신하고 주위의 확진이 늘어날 때마다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34도를 웃도는 날에도 마스크를 끼고 생활해야 하는 한여름을 건강하게 보내기 쉽지 않다. ‘첫사랑 2020’ 속 초등학생 서연과 승민이 사귀기로 하고 문자를 주고받으며 일상을 공유하였다. 코로나 19 확산으로 등교일이 늦춰지고 등교하더라도 학교에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았고 승민은 학원 수업중심으로 생활하고 있어 둘의 만남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다. 서연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승민은 울음으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지난한 코로나 정국에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채 서로 애 끓이는 연인도 많을 것이다. 걱정 없이 만나 웃고 떠들며 우리 시간을 꾸려가던 일들도 기억 저편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니 앞으로의 시간이 점점 두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절망하지 않고 내일을 기다리며 준비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 우리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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