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열기를 식히기 위해
강물에 퐁당 뛰어들어 친구들과 멱을 감으며 물장구치는 열다섯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집안일과는 거리를
두고 애오라지 친구들과 어울려 놀이에 빠져 지냈던 때도 어리다는 이유로 용인되던 일들이 많았고 공부보다는 자연이 더 친숙한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강과
들판으로 몰려다니며 자연을 놀이 삼아 지냈던 시절 서산으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면 하루해가 짧다고 아쉬워하는 철부지 열다섯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별일 아닌 데도
크게 웃으며 깔깔거리던 소녀들과 비껴난 자리 눈 먼 아버지 곁을 지키는 열다섯 살 심청이 손을 재게 놀리는 장면이 연상된다.
결핍은 한 사람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지만 곡절을 겪으며 성장하게 만드는 동인이기도 하다.
눈 먼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인당수에 몸을 던짐으로써 아버지의 욕망을 실현시키려 했던 딸은 효녀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고대 소설 심청전과
채만식의 현대 소설 ‘심봉사’를 탐독하여 읽고 고전으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적 소재를 재해석하여 작가는 ‘연인 심청’을 창조하였다.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충족하며
이루고 싶은 세계를 동경하고 욕망하는 삶을 지속하는 인생에서 어떠한 선택 결정권도 없이 문제를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감당하고 인내해야
하는 슬픔은 삶이 지속될수록 쉽게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인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취하려는 욕망에 눈이 멀어 분별력 있게 행동하지 못하는 심학규를 보면서 어른답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며 행간을 좇아 읽어갔다.
그는
스무 살에 눈이
먼 이후에도 양반의 후예라는 허세에 갇혀 출세를 위한 과거 공부에 매달리며 사서삼경을 매일 읽고 외워 보지만 뜻한 만큼의 효용적 가치를
실현하기는 어려웠다.
가난한 살림에
끼니조차 해결하기 힘든 일상에 불만을 드러내기보다는 통찰력 없이 행동하는 아버지를 불쌍히 여기며 심청은 삯바느질을 해서라도 양식을 얻어와 정성껏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색정에 물들고
색욕에 눈멀어 주색잡기를 가까이 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로 받아들이며 측은해 하는 딸이기도
하였다.
양반인 아버지와 노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운명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천대받고 살아가는 청년 윤상과 어머니의 목숨과 바꿔 세상 밖으로 나온 심청은 슬픔의 테두리
안에서 서로 의지하며 자랐다.
지체 놓은 이들은
가진 권력과 돈으로 서로를 이용하며 살아갔지만 청과 윤상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도우며 부족함을 채워 성장하는 가운데 공동 운명체로 화합하며
살아가는 사랑을 그려 왔을 것이다.
하지만 연정을
품고 사는 이들의 바람과는 달리 운명은 헤살을 놓아 이별의 시간을 배태하여 결별을 예고했다.
심청이 아비의
삶을 멍에처럼 짊어지고 사느라 자신의 내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지낼 수가 없었다.
공양미 삼백 석에
하나뿐인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했던 심청의 마음을 되돌리기에는 이승의 질긴 인연의 사슬이 동여맨 밧줄처럼 옴쭉 달싹 못하게
하였다.
연기의 법칙에 따라
육도 윤회하는 세계관에서는 인간으로 태어나 이승에서 생활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죽음으로써 육체는
현세에서 사라져 없어지는 현세적 부속물이고,
이승에서 지은
과보에 따라 윤회하는 순환의 틀에서 관계가 형성된다.
이승으로 오기 전
연인이었던 심청과 심학규는 천상의 규범을 어겨 인간 세상으로 내쳐져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맺고 효심이 지극한 심청이 아버지에게 정성을 다하는
생활로 현세적 삶을 이어갔다.
양반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떳떳하게 내세울
수 없는 출생의 결함으로 넓은 세상으로 나가 역량을 발휘한 기회를 박탈당한 채 살며 버텨야 했던 일상에서도 현재의 괴로움을 감내하며 살아갈 힘은
사랑에서 뻗어 나왔다.
어릴 적부터
심청이 곁에서 그녀의 일상을 지지하고 외로움을 함께 나누는 버팀목으로 자리했던 윤상은 일찍 철이 들어 앞가림을 잘하는 심청에게 울타리로
작용했다.
오늘 가진 것보다
내일 가질 것을 꿈꾸는 아버지를 대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심청은 아버지의 바람을 들어주기 위해 스스로의 욕망은 내려놓고 푸른 물을 들인
무명천에 사랑하는 이의 옷을 지어 그에게 건네고는 이별을 고해야 했다.
옹색한 처지였지만
심청이 곁에 있어 마음이 푼푼하였던 시절을 떠올리며 뜻을 만들기도 전에 운명적인 이별이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한 고통의
원천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철벽처럼
다가오는 운명은 헤쳐 나갈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은 현세에서는 타인의 목숨을 구하고 내세에는 자신의 삶을 구원하리라는 바람을 안고
살아간다.
아버지 심학규는
심청이 인당수 제물을 자청한 대가로 받은 공양미를 욕구에 이끌려 허랑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 급기야는 몽운사에 올리기로 한 공양미까지
축내며 몹쓸 병까지 얻어 건강을 회복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다.
윤상은 사리분별
못하는 늙은이 때문에 죽어가야 하는 심청의 희생을 막아 보려 애원하여 보기도 하였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목숨을 값어치 있게 쓰는 일의 숭고함을 알고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그녀의 생명을
앗아간 바다를 일터로 삼아 노동하며 물 위에 떠 있는 연꽃을 발견하여 왕에게 바쳤다.
화중군자라 불리는
연꽃은 진흙에 물들지 않은 정갈함을 지닌 꽃으로 고매한 정신을 표상하여 가까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꽃을 사랑하던
왕은 일상의 탄력을 잃을 때 화사한 이미지로 기쁨을 주는 꽃으로 위로를 받을 때도 있었다.
연꽃 속에
요정처럼 자리한 심청을 보고 왕은 아리따운 처녀를 왕비로 삼았고 연꽃을 바친 일을 계기로 윤상은 경계가 삼엄한 궁에서 궁지기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심청은 왕비로 간택된 뒤 궁궐에서
윤상과 재회한 뒤 그와의 못다 한 사랑에 괴로워하며 속내를 털어놓아 보지만 이들의 재회는 윤상을 지옥으로 밀어 넣어 치명상을 입게
하였다.
희빈 정 씨의
흉악한 고문을 모질게 버티며 권력자들이 술수를 부릴 때에도 윤상은 굴복하지 않고 의연하게 대처하였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현재와 미래를 살피어 생각의 방향을 정한 뒤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심청을 지켜주었다.
불의 힘을 빌려
자백을 받아내려는 희빈 정 씨의 극악한 형벌을 안간힘으로 버티며 심청과 내통한 일을 자백하지 않은 윤상은 굳건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하였다.
윤상은 궁지기로
들어와 멀찍이 떨어져서라도 왕의 아내로 발탁된 심청의 모습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신분의 벽을 넘어설 수 없는 인연의 한계를
수용하였다.
그는 송나라로
향하던 뱃전에서 인당수로 뛰어들려 했던 심청을 지켜주지 못한 회한으로 그녀의 안위를 염려하고 남은 생의 행복을 빌어주는 넉넉한 사랑을
발현하였다.
모진 고문
아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버티며 주검으로 사랑을 지켜낸 윤상의 지순한 애정은 극악무도한 정 희빈을 자기 파멸로 이끌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맹인들을
위한 잔치를 연 연회에서 심청은 노쇠한 몸으로 병약해져 곧 생명이 다할 것 같은 현실의 아버지를 보면서 안타까움은 배가
되었다.
꿈속에서 본
훤칠하고 글을 잘하는 풍류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였던 심청은 개안하였지만 안쓰러운 유기체로 사위어가는 촛불 같은 모습에 그의 목숨을 부지하게
도와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생명을 다해
아버지의 눈을 띄우기 위해 희생하였던 심청이 이제는 사위어가는,
아버지의 생명의
불을 지피기 위해 정성을 들였다.
아버지의 건강
회복을 바라며 생명을 지켜달라고 기도하는 동안 사랑해온 윤상은 죽음으로 치닫는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려야 했다.
이승에서의 모든
짐을 홀로 짊어지고 참혹한 고통에 형장의 이슬로 스러지면서까지 윤상은 사랑하는 여인 심청을 지켰다.
상여가 나가는 날
망자의 혼은 심청이 머무는 공간 앞에 머물다 그녀의 다정한 소리를 듣고 움직여 이승에서의 못다 한 사랑의 한을 갈무리하는 것처럼
비춰졌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살아 있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며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가지지 못한 부분을 갈구하며 또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왔다.
부지기수의 이별을
겪으며 삶은 알고 있던 이들과 이별하며 고독을 배워가는 통과의례처럼 여겨진다.
청춘 시절에는
몰랐던 부분들이 새로운 얼굴로 떠올라 지금 있는 자리에서 정성을 다하며 사는 일의 소중한 가치를 일깨워준다.
죽을 고비를 넘긴
심학규는 무명의 어둠을 밝혀내는 마음의 눈을 뜨고 그동안 헛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왔던 점을 뉘우치며 속죄양 의식을 실천이라도 하듯 세속을
등지고 유랑하는 삶을 선택하였다.
선택할 수 없는
탄생으로 슬픈 운명적 삶을 살면서도 궤도 내에서 수정하는 생활로 변혁을 꾀하였던 윤상은 죽음을 다짐하고 선택한 길에 충실함으로써 현생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의 고귀한 가치를 승화하여 갔다.
유랑의 길을
선택한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떠올리며 선업을 쌓아 복을 짓는 일로 자기 구원을 실현했던 왕비 심청은 약자들을 향한 사랑을
생생하게 표하며 슬픔으로 어두웠던 마음도 씻어내어 자기 정화를 넘어 이타적인 사랑을 구가하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날라.
미워하는 사람과도
만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 않음은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남도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음도 재앙이니까.
사랑과 미움이
없는 사람은 집착이 없으리.’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이 떠오른 것은
평범한 이들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윤상을 떠나보내고
상실의 아픔에 젖기보다는 생자필멸의 법칙을 받아들이며 범속한 삶을 초탈하여 애욕을 넘어서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로 이승에 존재하지 않는 이를
그리며 남은 시간을 보내는 심청의 마음을 가늠키는 힘들다.
풍요로운 현실에
안주하여 사사로운 이익을 대변하며 살기보다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사랑을 베풂으로써 이타적 삶을 잇는 심청은 자비의 화신처럼
여겨진다.
마음 좋은 귀덕 어멈이 갓난아기 심청에게
젖을 나누어 주었고 좀 더 자라서는 일감을 챙겨주고 끼니를 해결할 수 있게 돕고 홀로 남은 심 봉사가 애욕에 눈이 멀어 애랑에게 넘어 갔을 때도
그의 건강을 살피며 보살피는 자비 행을 실천하였다.
탐심을 버리고
애착 관계를 벗어나 무상 보시를 행하며 살아갈 때 큰 과보를 얻어 궁극적으로는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들이 갈증 많은 세상을 지혜롭게 열어나갈 때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과 조응하는 삶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