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버 - 어느 평범한 학생의 기막힌 이야기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지음, 한미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35.
이 녀석 게르버! 새 장난감을 애타게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쿠퍼는 그를 기다렸다. 그를 망가뜨릴 작정이었다. 



한 학생을 통해 입시위주의 권위적인 학교를 고발하는 형식을 취하는 이 소설은 작가가 이십대 초반에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 쓰여졌다.  
 







고등학교 졸업반 새학기 시작의 날. 자신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교수 아르투어 쿠퍼, 일명 쿠퍼 신이 담임이 된 것에 크루트 게르버는 긴장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신으로 군림하고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하찮은 존재라고 여기는, 허영심의 노예인 쿠퍼 교수는 누구든 그의 권위를 건드리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성적이 낮거나 허약한 학생들은 무시하고 아예 '미흡'으로 정해놓은 뒤 상종조차 하지 않으며, 심지어 혼자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학생들의 의복조차 일사불란하게 똑같은 옷을 입히고 싶어한다. 또한 편애를 이용해 학생들의 질투와 경쟁심을 불러일으켜 학생들 사이를 반목하게 만들어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못하게끔 한다. 한마디로 학생이란 그의 절대 권력을 확인시켜주는 도구에 불과했다.  


쿠퍼가 특히 학교에서 권위와 권력적 지위를 고집하는 이유는 학교라는 세력권을 벗어나는 순간 자신은 보통의 존재, 어쩌면 보통의 존재만큼보다 더 관심을 얻지 못한다는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교 밖 일반인들은 그의 뛰어난 수학적 능력에 존경심은 물론 관심도 없었다. 그렇기에 학교는 그의 삐뚤어진 욕구를 채우는, 그가 권능있는 신으로 대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ㅡ  


소설은 우리가 그동안 겪어왔던 입시 교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과목별 선생마다 졸업시험(이것으로 대학 입학이 결정된다)을 강조하고, 터질듯한 긴장감으로 인해 예민해진 학생들 사이에서는 갈등이 반복된다. 동급생의 죽음을 앞에 두고 친구에 대한 애도보다 다음 수학 필기시험이 더 우선한다.  


개개인 각자가 가진 재능과 개성을 무시한 채 오로지 성적 하나만으로 '우수'와 '미흡'을 규정지으며, 단 한 번의 입학 시험으로 그동안 살아온,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함부로 재단할 뿐 아니라 목전에 있는 시험을 위해서는 우정이나 동정 따위는 잠시 접어 주머니에 넣어둘 것을 무언으로 강요하는 어른들의 모습은 백 년 전 오스트리아와 현재의 대한민국이 별반 다르지 않다.  


적어도 스스로 당당하다는 자부심은 있어야 함에도 쿠퍼 교수의 부당함에 불평하고 실패한 결과를 놓고 다른 실패 때문이라고 변명하기에 급급하며, 정직함과 자제심과 줏대조차 없는 본인의 모습을 보면서 쿠르트는 점점 스스로에 대해 가치 없고 쓸모 없고 불필요한 존재라고 여긴다. 자신에게 절망해 자조처럼 읊조리는 그의 말은 입시생이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죄인의 위치에 놓는데, 이는 안타깝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ㅡ 


소설 중반부까지는 쿠퍼 교수만을 악당처럼 그려지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다른 교사들 역시 정도의 차이일 뿐 비겁하기는 마찬가지다. 쿠퍼는 변함없이 독재자의 펜을 휘둘렀고, 그가 겨냥한 화살은 거의 전부 쿠르트 게르버를 향했다. 원래 학생에게 내리는 구류 처분은 교수회의 결정에 따라 행해지는데, 쿠퍼는 제 마음대로 쿠르트에게 구류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다른 교수들은 쿠퍼의 부적절한 행위를 알면서도 학생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쿠퍼의 거칠고 막무가내 횡포에 대응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선생으로서의 권위를 오히려 격하시키는 것임을 왜 모를까.  


몇몇 학생들의 캐릭터를 잠깐 언급하자면, 쇤탈은 제 잇속만을 챙기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지극히 현실적이고 사태 파악을 객관적으로 하는 학생이다. 어차피 졸업을 하기 전까지 그들의 입시 합격 여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사람은 교수이고, 교수진 내에서도 강자가 누구이며 또한 그들의 부당함을 건의해봤자 소용없음을 간파하고 있다. 타의든 자의든 순종을 선택한 쇤탈은 대다수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돋보이는(?) 캐릭터는 레비. 2년이나 유급했음에도 능청맞기가 이를 데 없다. 독재자 쿠퍼에게 펀치를 날리는 유일한 학생이자 저항자. 내가 고딩 때 이 책을 읽었다면 한 번 따라해보고 싶은!   


ㅡ 


이 소설이 1930년에 발표된 것을 감안하면 선생에게 휘둘리는 상황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도 그야말로 선생은 갑이요, 학생과 학부모는 을이었다. 훈육과 사랑의 매라는 명분으로 체벌에도 거리낌이 없었고, 학부모가 선생을 찾아가 머리를 조아리는 일이 이상하지 않은 시대였으니까. 1990년대 후반에 우리나라 대학 진학률이 50%임을 생각해본다면 짐작이 갈 것이다.  


소설에서 쿠르트의 어머니가 쿠퍼 교수를 찾아가 일언지하에 면담을 거부당한 모습, 그것도 본인이 직접하지 않고 동료에게 시키는 것도 모자라 학부모의 말을 중간에 끊어내는 태도는 당시 선생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쿠퍼는 인격적으로도 선생으로서 적절한 사람이아니다. 수업에 있어 학생은 보조적 역할로 치부하고, 아들의 성적 부진이 모두 부모의 탓이며, 병상에 있는 학생의 아버지가 충격으로 죽든 말든 규정을 들이밀며(그것도 제멋대로 부당하게 적용한) 악의적으로 몰아붙임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이 사람은 선생의 소임이 학생들의 성장에 도움을 주는 역할이 아닌 일정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학생을 걸러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도 악착같이 티끌같은 흠집까지 찾아내서라도 반드시.



입시의 실패가 대역죄이자 사형선고이며 교수대라고 표현하는 게르버는 자신을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마치에 매인 말에 비유한다. 게르버의 마지막 선택은 입학 시험의 당락 여부와 관계없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 자체가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 아닐까.   


입시에 치이고 짝사랑에 고통스러우며 관능 앞에 흔들리는, 마치 통속소설의 주인공처럼 방황하는 청춘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이 소설은, 너무나 비극적이고 사실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만의 꿈들 - 장소,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양미래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우리가 잠시 권력을 맡긴 관리들이다. 이들은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가 깊고도 엄연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 소홀한 틈을 타 위험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침묵의 봄' 에서 / 레이첼 카슨) 

 


이 책은 1994년 초판이 출간됐다. 그때 바로 읽었다면 훨씬 이입해서 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저자의 '20주년 기념판에 부치는 서문'이 다른 각도에서 가슴에 확 박혔다. 1950년 이전부터 네바다주에서 벌어진 핵실험으로 인한 피해와 그 이면에 숨겨진 금전적 이권 및 진실, 그리고 네바다 주민들과 솔닛을 비롯한 반핵 운동가와 사회활동가들의 길고 긴 여정의 기록이 담겨 있다. 





 



네바다 핵실험장의 면적은 약 3500제곱킬로미터로, 벨기에의 국토 면적보다 네 배 이상 큰 규모다. 그곳에서 영국과 미국은 40년 동안 900개가 넘는 핵폭탄을 터뜨렸다. 솔닛은 만일 군대가 같은 시기에 같은 물량의 핵폭탄을 벨기에 국토에 터뜨렸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라고 말한다.  


솔닛은 핵폭탄과 관련된 맥락에서 사용하기에 '실험'은 부적절한 용어이며, '리허설' 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핵폭발은 실험보다는 과시와 눈속임을 동원한 전쟁과 흡사하며 동시에 핵폭탄 투하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얘기한다(여기에서 저자는 많은 국가들이 핵실험을 감행했지만 세계의 종말을 리허설한 국가는 미국과 소련 뿐이었음을 짚는다).


반핵 운동가들이 핵실험 중단을 위해 네바다 사막에 가게 된 이유는 냉전이 해빙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가 미국과 소련이 핵실험을 그만두면 자국 또한 그만둘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고, 1991년 유엔 총회에서는 41개국이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이 핵실험을 일시 중지했음에도 미국은 핵실험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네바다 핵실험 지역은 극도로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창 실험이 진행 중이였던 시기에조차 일반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핵실험장 내부 깊숙한 곳까지 진입이 가능했다. 여러 측면에서 출입 제한 지역이어야 마땅함에도 정부는 이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핵실험이 마치 전적으로 국가 안보 차원이기에 불가결한 사항인 것 같지만 여기에도 역시나 '돈'이 연관되어 있다. 또한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에서 비폭력 저항 시위대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을 체포했다는 것, 무엇보다 이처럼 대규모로 진행된 시민 불복종 체포 사건이 지역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ㅡ 


그레이트 베이슨은 핵실험장으로 사용되기 이전부터 굴곡진 역사를 안고 있다. 덫사냥에서 비롯된 사실상 대량학살에 가까운 원주민ㅡ백인 충돌 사건을 시작으로 유럽인 프리몬트의 탐험(이라고 쓰고 침략이라고 읽어야하는), 그리고 척박한 환경으로 간주되어 비주류이자 비문명인이며 아웃사이더가 살아야 하는 영토로 간주된다. 이로써 그레이트 베이슨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유목민이었고, 19세기 네바다주의 마을은 대부분 광산 마을이었다. 이는 현재 네바다 주에서 세 번째로 큰 정착지가 넬리스 공군기지인 것, 그리고 핵실험 장소로 지정되기까지의 상황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레이트 베이슨을 대륙간 사격장으로 만들어 국가적 희생양으로 삼으려던 정부의 계획을 읽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911테러 사건이 떠올랐다. 만약 네바다주 그레이트 베이슨에 '그들'이 아닌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했다면 이런 잔혹하고 반인륜적인 계획을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이는 어느 하나의 문제점이 아니라 권력자와 기득권층의 욕망과 그들이 갖는 인권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디 인권 뿐인가. 생태계의 가치 자체가 이미 사라지다시피 되고 있는데.  


ㅡ 


솔닛은 물리학자 집단이 동질적인 이유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개인적으로 와닿았던 점은 그들은 '(핵무기) 사용이 옳은 일이라고 믿는 듯'하다는 점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원폭 투하에서 확인할 수 있고, 이러한 논리와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게 받아들여진다.  


더 기가 찬 노릇은 각자의 입장에서 만들기만 할 뿐, 관리하기만 할 뿐, 그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들은 자기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인식한다는 데에 있다. 이것 또한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회피하는 빌미가 된다.  


원자 폭탄은 나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결국 나치가 인종 학살을 벌인 것만큼이나 미국은 잔혹한 학살쇼를 벌인 셈이다. 더구나 미국 에너지부가 작성한 자체 핵실험 장부에는 두 차례의 원폭 투하를 실험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나치와 소련이 유대인을 몰아내는 바람에 미국이 단시간에 순수 과학 분야에서 월등히 우세한 국가가 되었으나 그 재앙은 미국의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핵무기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국가 간 대립에서 협박의 도구로 쓰이고, 국가 안보를 들어 자국민을 설득한다. 반핵 운동가 재닛의 사연은 핵 사용 우려가 무기 차원에서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책에서 리처드 미즈라크가 언급되길래 그가 찍은 네바다주 사진을 찾아봤다. 사진이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지만, 한두 장의 사진만으로도 황폐하고 참혹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사진에는 낙진까지 포착되지 않으니 그 땅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받는 고통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솔닛은 원자폭탄은 우리가 가진 힘과 욕망과 한계 사이의 문제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상징이자 사실이라고 말한다. 방사성 폐기물 저장소 지정에 있어서 일련의 과정에 따른 불확실성과 일방적 결정, 그리고 이것이 미치는 극단적인 악영향. 솔닛은 누군가가 체포됐다는 동료의 만우절 짓궂은 장난을 보면서 네바다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이 모두 만우절의 거짓말이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핵실험까지 가기 전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어보면 제초제와 살충제의 폐해가 전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솔닛은 <침묵의 봄>을 자주 언급하는데, 현재에도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핵은 존재하고, 이것이 곧 또다른 살충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자한건 아닌지.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과학과 환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확실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솔닛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작금의 상황은 카슨이 주장했던 때보다 훨씬 더 시급하다. 우리가 핵사용에 대한 명분을 어디에 두어야 하고,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답이 보일 것이다.  


ㅡ 


비폭력이란 단순히 폭력을 삼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변화를 위해 애쓰는 것, 목표로 삼은 이상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상당한 상징성을 부여한다. 솔닛이 짚은 것처럼 폭력을 쓰는 것은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지지하는 셈이기에 비폭력은 폭력과 무력을 약화한다. 운동가들이 끝까지 비폭력을 고집하는 이유다. 









297.
원주민을 몰살해야 한다는 버넬과 마리포사 기병대의 판단이 전쟁을 추동하는 일반적인 감정인 무자비한 증오가 아니라 무분별한 행정적 태도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이다. 경제 활동에 필요한 땅을 개척하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들은, 말하자면 금이 가득 찬 화석 강바닥에서 흙을 들어내듯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였다.  

 
 


2부에서는 요세미티에서 원주민들이 내몰려지고 요세미티 밸리가 이방인의 땅이 된 과정을 서술한다.  


미중서부에서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개척자 집단 도너 파티의 이름을 딴 도너 패스, 파이우트족장 두 사람의 이름을 딴 트러키와 위네무카, 나바호족을 고향에서 쫓아낸 키트 카슨의 이름의 딴 카슨 시티, 1833년 최초로 요세미티 밸리에 발을 들인 덫사냥꾼 조지프 워커의 이름을 딴 타호 동쪽의 워커 호수. 캘리포니아 뿐 아니라 미국 각지에 남은 수많은 명칭은 잊힌 존재들을 기리는 기념비이자 미국 역사라는 암호를 푸는 열쇠다. 


지명을 요세미티라고 결정한 이들은 백인이다. 요세미티는 '그들 중 일부는 살인자'라는 뜻을 가진 오헤미테에서 온 단어다. 솔닛이 요세미티를 제대로 번역한 문헌 가운데 처음 발견한 자료는 문제의 그 '살인자'가 백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침입자 본인이 자신의 잔인한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를 장소명으로 정했다는 사실은 상당한 아이러니다. 그런데 '요세미티' 단어에는 숨겨진 의미가 따로 있는데 의미를 알게 되면 침입자의 몰이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세미티는 허칭스와 사진작가 찰스 리앤더 위드가 그곳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 덕분에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허칭스는 요세미티 밸리를 홍보하는 출판물을 연재하며 요세미티 관광을 권장하는 일에 점점 더 깊이 몰두했다. 요세미티 밸리에서도 원주민과 백인 간의 충돌들이 기록이 남았으나 사진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전쟁과 풍경을 분리시켰다.  


19세기 후반, 요세미티를 찾는 관광객은 점점 더 증가했다. 옴스테드는 사람들을 설득해 요세미티 밸리와 마리포사 그로브가 보호구역이 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노력했고, 1864년 요세미티는 주립공원으로서, 1890년에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재지정되었다.  


19세기까지 미국에서 채굴된 모든 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이 시에라네바다에서 채굴되었다. 즉 땅을 파헤쳐 토양과 강을 망치는 작업이 캘리포니아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요세미티는 이 채굴 산업의 피난처였다. 솔닛은, 국립공원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이유는 급속히 황폐화하고 변형되는 땅을 아주 일부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한 시도의 결실이며, 국립공원은 몇 안 되는 장소라도 지켜내기 위한 시도라고 얘기한다. 


광산은 원주민을 거꾸로 '초대하지 않은 손님'으로 만들어버렸고, 살인을 불러왔으며, 전쟁을 야기시켰다. 마리포사 기병대의 캘리포니아에서의 싸움은 미국 내 원주민 보호구역 조성을 규정하는 정책의 기원이 되었다. 알다시피 원주민 보호구역은 강제이주 난민수용소와 다를 바 없었고, 자급자족을 원했던 원주민에게 지급되는 물품과 도구는 거의 없었으니 오히려 그들의 삶의 질을 퇴행시킨 셈이었으며 더하여 미국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한 것이다.


ㅡ 


솔닛의 글을 따라가자니 문득 박제된 듯 프레임에 갇혀버린 자연의 예술성과 이어지는 상업성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2부를 읽으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나름의 고민은 인간이 자연의 한 일원인지, 아니면 이방의 존재인지의 여부와 어느 것이 공생하는 데에 있어서 더 나은 방향이냐는 것이었다.   


솔닛은 야생을 판가름하는 기준이었던 것이 수 세대에 걸친 인간의 손길이 담긴 인공 유물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면서 문화가 반드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원론적인 얘기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결론은 인간이 자연과의 공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자니 개척민들에게 터전을 빼앗겨 쫓겨나고 밀려난 원주민들의 모습과 핵실험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반핵 시위를 하는 이들의 모습은 중첩된다. 핵실험을 비롯한 전쟁과 환경 오염으로 인한 기후 위기로 인해 인류는 점점 더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각성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환경학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그의 저작에서 핵쓰레기는 가장 해결이 어렵고 다음 단계로 끝없어 떠넘겨지는, 분해가 요원한, 그야말로 '쓰레기'라고 썼다. 더하여 인류 멸망에 있어 가장 상상하기 쉬운 시나리오는 핵폭탄 폭발이며, 설령 전쟁이 발발하지 않더라도 지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잠재적인 위험이라고 강조한다.   


ㅡ 


솔닛은 이 책에서의 두 장소가 자신에게 정답이 아닌 무한한 질문을 던지며 가르쳤고, 그녀의 일과 삶에 방향을 제시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쓴 책 대부분이 <야만의 꿈들>에 뿌리를 둔다고 썼다. 그만큼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의 사유의 토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풍경, 공간, 사람, 학문, 산업, 예술, 문화 등을 종횡하는 솔닛의 글쓰기 변주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요소요소마다 개연성의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읽고, 많이 썼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걷기, 사막의 침묵과 광대함과 공허, 영성, 지역에 대한 차별적 인식, 간간이 드러나는 유년 시절 등 이 책이 비평서 같은 느낌이 크지만 딱딱하거나 건조하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그의 진솔하고 깊은 사유에 있다.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고 싶은데, 어느 책부터 시작해야할지 나감하다면 이 책, 특히 1부를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움직임에서 비롯됨을 다시 강조하며 읽기를 마친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에서 이방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350.
여전히 나는 자연을 경험하는 그런 방식에 애석하게도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보기(looking)는 사진의 영역에서는 훌륭한 행위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연을 우리가 속하지 않는 장소, 우리가 살지 않는 장소, 우리가 침입하는 장소로 보는 관점이다. 관광객은 본질적으로 외부인, 소속되지 않은 사람, 낙원에 있는 이방인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해의 철학 - 부패와 발효를 생각한다
후지하라 다쓰시 지음, 박성관 옮김 / 사월의책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17.
세계의 가치의 진정한 역전은 세계를 분쇄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세계를 비옥하게 하는 일에 존재한다.  



이 책은 생태학을 기본 줄기로 삼고 생물학 개념인 부패와 분해를 통해 과학, 경제, 철학, 문학, 교육, 환경 등 각 분야에서 우리가 간과했거나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외면해왔던 사회 현상들을 고찰한다.  









쓰레기란 어떤 특정한 사회경제 상황 속에서 그 물건의 최종 형태를 나타내는 말이고,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어떤 것의 생산량이 자연의 분해 능력을 웃돌 때 비로소 발생한다. 어떤 것의 속성이나 기능이 최종적으로 다 소진되어 운동의 방향성이 상실되고 마침내 사라져버릴 때까지 계속해서 흡수되고 이용되는 것을 생태학 세계에서는 '분해'라 부른다.  


'공통적인 것'의 부패를 초래하는 것으로 가족 제도와 민족주의를 든 네그리와 하트는 가부장적 문화의 확산, 극단적인 민족주의가 지배를 강화하는 '제국'의 양태를 띠고 있다고 했다. '제국'은 자연적인 부분들을 대지로부터 분리하고 사유화 및 상품화함으로써 '부패'시킨다. 자연의 사유화는 사유 및 착취를 지속시키는 방패이며 이 점이 자연적인 부패와는 다른 차원의,즉 인위적인 '부패'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자연적인 부패력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는데, 부패하지 않는다함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쓰레기로 남아 지상에 쌓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은 토지를 사유화함으로써 자연적인 부패의 기능, 즉 자정 능력을 소멸시켰다.  


저자는 부패로 부패에 저항한다는 모순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미 세계는 하나의 제국처럼 연결되어 있고, 농업조차 비물질적 노동으로 변화해감을 느그리와 하트를 통해 인정한다. 인터넷 테크놀로지와 그에 따른 인프라에 사용되는 여타 자재와 발전소는 부패하지 않는다. 저자는 부패하지 않는 것에 기반한 사회는 지속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생명을 지속하면서 동시에 '제국'을 사멸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에 대한 답을 '분해'에서 찾는다. 이 부분을 짚어내는 대목에서 인간이 '먹는 객체'가 아닌 '먹는 주체'가 되어야한다는 주장이 인상적이다. 먹는 주체의 과정이 물건의 생산에서 폐기까지의 과정과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어 말하기를 활성화시켜야할 것은 생산 과정이 아니라 분해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ㅡ 


저자는 카렐 차페크의 소설들을 짚어가며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를 비롯한 노동, 전쟁 등을 통해 분해와 재생이 약화된 인류에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얘기한다. 


카렐 차페크는 담담한 일상 속의 균열을 통해 엿보이는 이면의 세계를 꼼꼼히 묘사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임계 쪽으로 우리의 눈을 돌리게 해주는 작가라고 평가한다. 그의 작품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 노동과 생활에서 벗어나 획득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자유 여부, 성숙과 미성숙의 차이, 전쟁의 존재 여부, 인간과 세계의 끝 등에 대해 고찰한다.  


저자는 문학적 고찰 뒤에 인간의 육체가 자연을 향해 분해를 이룩해가는 과정이기에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그 변화에 공명하는 감각과 정신이 성장한다면서 과도하게 생산 및 파괴되는 사회에서 순환되는 것은 물질이 아닌 화폐라고 지적한다. 또한 이러한 과잉 속에서 한 번 쓰고 버림의 가속적 순환에 있어서 인간도 예외가 아님을 지적하는데, 분해되기 쉽다는 게 반드시 약하는 것과 동의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재차 강조한다. 


ㅡ 


넝마주이를 아는가? 
저자는 넝마주이를 일컬어 상품 세계에서 하강해온 것을 다시 상품 세계로 되돌리기까지의 사이 공간, 즉 소유권 제도의 공백 지대를 치고 들어가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지구 역사 안에서 분해 활동자로 영위했던 넝마주이가 지구가 폐기물에 매몰당하지 않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음을, 저자는 상기시킨다.


저자는 이보다 앞서 나무블럭 부수기 놀이를 동해 자연, 인간, 사회, 역사의 흥망성쇠를 분해라는 현상으로 확장해 들여다본다. 그리고 프뢰벨의 삶과 그가 개발한 교구와 유치원 및 교육 이념을 짚어가면서 불완전성, 자기 증식을 통한 무한성과 균형, 생산과 분해, 증식과 제어에 대해 고찰한다. 그런데 읽다보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넝마주이와 나무블럭은 묘하게 일맥상통한다. 


ㅡ 


저자는 생태학의 잠재력을 인문학의 언어로 끌어내려고 시도한다. 그는 먹이사슬과 인간의 신분제 사회를 나타내는 피라미드 구조의 서열을 같은 선상에 놓으면서 먹히는 존재, 즉 하위 계급은 폄하될 존재인지 혹은 그 반대의 질문을 던지며, '분해자'는 과연 이 서열에서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탐구한다.  


생물들의 '장례' 모습을 통해 생명의 재탄생과 영겁의 반복을 짚고 생산과 소비와 분배를 대입하는데, 저자는 어떤 분류 체계도 생물 군집의 역동성을 단정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얘기하며 분해의 공동 작업에서 답을 찾으면서 부패와 분해는 상호 연대적 행위임을 포착하며 보완성에 주목한다.  


수리의 미학에서 저자가 말하고자하는 바를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물건을 만들어 파는 생산자 혹은 판매자 조차도!). 그럼에도 사양을 (아주) 조금만 바꿔서 하루가 멀다하고 초고속으로 신제품이 출시되는 이유는 당연히 '돈' 때문이다. 더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게 최우선하는 신자유주의 경제가 장악한 세상에서 수선이나 물건에 대한 애착과 추억은 감성팔이로 치부된다.  


저자는 앞서 부끄러움에 대해 얘기했다. 낡은 것, 고쳐쓰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닌 소비의 허영이 부끄러움의 대상이라는 의식이 필요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산 시장만이 아닌 재사용 시장, 그리고 여기에 투입될 다양한 직종의 노동 시장이 활성화되어 신품과 구품이 보완성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쓰다보니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네...).   


ㅡ 


신품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인하고, 직접적인 폭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우리를 통치하고 있다. 이 책은 이에 대해 생태학적으로 사유하며 더불어 신품 문화의 취약점과 수선과 분해의 측면에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인간은 어떠한 위치에 있든 모두 분해의 담당자다. 그럼에도 인류는 분해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간주하면 전진해왔다. 소위 근대화 혹은 문명화라고 불려온 것들은 대체로 분해력으로부터 이탈하는 행위였다. 우리가 대면한 작금의 사태가 그에 대한 증거다. 저자는 이제부터라도 하등하다고 여기는 동물들에게 배워야겠다는 결심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동의하는 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선영 옮김 / 새움 / 202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스토옙스키의 첫 소설이자 출세작인 이 작품은 가난한 중년의 남자와 고아 소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큰 줄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가난에 대한 이야기도, 애끓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없어 벼랑 끝에 내몰린 '인간'을 들여다 본다.  


두 남녀의 편지로 시작되는 소설은 바르바라의 과거를 서술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서간문 형식이다. 도입부부터 작가는 마카르의 편지를 통해 당시 러시아 하층민의 생활 환경을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도스토옙스키가 가난과 사람을 분리해 놓고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의 궁핍한 모습을 그려냈다기보다는 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그로인해 달라지는 모습들을 말하고자 했던게 아닐까싶었다.  


일단 마카르는 30년 근속에 행실이 바르고 성실한 하급관리다. 법규를 어겼다거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적이 없으며 누구에게 비난받을 만큼 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벌이가 넉넉해 여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먹고 사는 데에 큰 문제가 없는, 그야말로 사회 구성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인물상이다. 그런데 먼 친척뻘 고아 아가씨를 보고 사랑하게 되면서 헌신적으로 그녀를 돌봐준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카르가 바르바라에게 제 분수를 넘어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도 본인은 하숙비도 내지 못하고, 심지어 가불과 빚까지 얻어 요즘으로 치자면 파산할 형편에 놓인다. 이떄부터 마카르의 모습은 눈에 띄게 황폐해지고 자괴감에 빠진다.  


마카르는 푸시킨의 <역참지기>를 읽고 너무나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마치 자신의 얘기인 양 이입된다. 가난한 이들의 암울한 삶,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들 방식대로의 비극을 안고 사는 귀족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저마다 불행을 안고 산다고 말하는 마카르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자기가 쓰는 바로 이 소설 <가난한 사람들>이 지극히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하고자함은 아니었을까.   


마카르의 처지를 대변하며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단추다. 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마카르의 단추가 하필이면 상관 앞에서 뜯어져 나가고, 쉽사리 잡히지 않는 굴러가는 단추를 집기 위해 그 뒤를 쫓는 마카르의 모습은 돈을 구하기 위해 상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세상사 새옹지마라고 결국 이 난처한 상황이 그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그렇다면 마카르에게 헌신적인 사랑과 도움을 받는 바르바라의 상황은 어떤가? 그녀는 마카르가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록 말로는 돈을 아껴쓰라고 얘기하지만 그가 하는대로 다 따르며 호의를 다 받아들인다. 바르바라는 마카르가 파산에 가까운 상황에 처하자 그제서야 그를 호되게 나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를 안심시켜 달라고 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대놓고 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재미있는 점은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다.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아기씨, 선녀님, 내 비둘기, 내 천사님 등으로 부르고, 바르바라는 마카라를 주로 친구님이라고 부른다. 편지의 내용상 분위기도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연인보다는 숭배하는 느낌이 크고, 바르바라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듯 느껴진다.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사랑한 것일까? 


ㅡ 


위에 썼듯, 소설은 '가난'으로 인해 달라지는 인물들의 모습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처세에 실패하고 경쟁에서 밀려나면 무능력한 스스로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고 성격이 거칠어지며 자포자기하듯 건강을 돌보지 않는다. 사회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돈이 없으니 아파도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어렵고, 마치 기다렸다는듯 죽음을 받아들인다. 


마카르의 동료 예스타피 이바노비치는 시민의로서의 가장 큰 덕목은 '돈 버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궁핍한 사람에게 도덕은 그저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성실하고 정직하고 야망이 없는 것은 무능력을 넘어서 죄로 취급된다. 바르바라는 마카르에게 가난은 죄가 아니니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고상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가난은 유죄다. 헌신으로 포장된 두 사람조차 경제적인 상황이 몰리자 슬슬 서로를 원망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편지는 어느 순간부터 신세 타령으로 바뀌지 않았나.  


다른 관점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르바라와 마카르의 대화에서 나오는 '쓸모'다. 바르바라는 연약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이기에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마카르는 떠나겠다는 그녀를 만류하기 위해 그녀의 '쓸모'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지만, 정작 그 역시 직장에서는 '쓸모'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간혹 인간의 존엄성을 들어 존재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인간을 '쓸모'로 판단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한다. 그런데 노년기에 접어든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자신이 사회 구성원으로 쓸모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라고 한다. 이는 바꿔말하면 존재감이다. 마카르는 바르바라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도 본인은 하숙비도 내지 못하고 이후에는 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는 처지가 된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사랑 때문만일까? 이 사랑을 통해 마카르는 자신의 쓸모, 즉 존재의 이유를 찾았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안나 표도로브나. 그녀는 내켜하지 않는 바르바라 모녀를 집요하게 설득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후 그들이 의지할 데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임을 확인한 후 노골적으로 악담을 퍼붓고 모욕을 주며 혐오감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면서 그집을 방문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자비심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모녀를 거둬줬노라고 자신의 선행을 강조했다. 그녀는 바르바라의 죽은 아버지를 비난하고 모녀를 괴롭히면서 왜 굳이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일까? 또한 바르바라가 그 집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바르바라를 괴롭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안나와 바르바라와의 별다른 서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는 안나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 짐작해볼만한 점은 그녀가 바르바라를 괴롭힘으로써 마카르까지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 정도. 


ㅡ 


미련할 정도로 헌신하는 마카르를 보면서 이후에 탄생할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 밑바탕에 자리한 것이 존재감이든 사랑이든 자존심이든, 무엇이든 간에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숭고한 인류애를 열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 
1. 마카르도 역시 수다스럽다.

2. 독서모임 중 한 팀의 1월 도서다. 어떤 얘기들이 나올지 무척 궁금하네. 마카르와 바르바라에 대해서는 다양한 얘기들이 나올 것 같아.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소설, 잇다 1
백신애.최진영 지음 / 작가정신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1.
그들은 나에게 아름다운 보물이 되어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을 때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방 안 장롱 속에나 선반 위에 잠겨 있는 귀한 옥돌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랍니다. 나는 불행히도 옥돌이 아니어요. 보물이 되기를 또한 원치 않는답니다. 나의 가림 없는 본질은 거친 창파에 씻기어가며 제대로 다듬어지는 백사장에 흩어져 있는 조약돌이 아니라면, 험악한 산꼭대기에 모나게 솟아 있어 비바람 눈보라에 저절로 다듬어지는 바윗돌이 아닌가 합니다. 그보다도, 솟으며 떨어지며 감돌며 흘러가는 계곡물에 밀려서 넓고 깊은 바닷속까지 갈 수 있는 한 조각 모래가 됨을 원한답니다.
('혼명에서' 중에서) 


참으로 비장하기 이를 데 없다. 그저 제 이름으로 살겠다는 바람이 이렇게까지 비장할 일인가.  









책에 실린 백신애 선생의 세 작품은 모두 한 번씩은 읽었기에 최진영 작가의 소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를 먼저 읽었다. 순희와 정규라는 이름에서 바로 떠올려진 작품 <아름다운 노을>. 처음 읽었을 때 1930년대 당시의 시대 정서를 고려해보면 비록 소설이라도 적잖이 파격적이라 대중들이 쉽게 용납하지 않았을 거라는, 그래서 백신애 선생이 참 용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결혼 생활 동안 유학과 정치활동으로 대부분 부재 중이었던 남편, 유난스런 시어머니와 시누이, 가슴 졸이며 살아왔던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는 제법 살만해졌다고 여길 무렵 벌어진 남편의 외도. 아내가 광인이 된 까닭은 남편의 외도가 아니라 그동안의 삶을 부정당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광인수기) 


'나'는 결혼 후 전통적인 여성의 삶을 살 수 없어 이혼하고, 그것으로 주변인들은 그녀가 이혼녀란 불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방 안에서 나오지 말아야 하며, 세상의 기구한 억측에 흘러나온 갖은 비평을 일일이 변명하고 근신해야 되며, 얌전한 여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그녀가 이러한 환경을 헤치고 나오지 못하는 이유는 실상 어머니 때문이다. 자기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을 품고 있는 어머니의 눈물이 세상의 편견에 맞설 용기를 소멸시키고, 주저앉아버린 자신에게 실망하는 그녀의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다. 그럼에도 놓지 않는 그녀의 희망과 지금 우리의 희망은 맞닿아 있다.
(혼명에서) 


약 스무 살 나이 차를 뛰어넘는 사랑. 남자의 나이가 더 많을 때와 그 반대의 경우에 대중이 보내는 시선의 차이는 1930년대나 2020년대나 별반 다르지 않다. 
(아름다운 노을) 


회화를 전공하고 결혼 후 안정적인 삶을 살 줄 알았지만, 이혼한 후 우체국에서 근무하며 독립적인 생활을 하지만, 남편이나 시집 식구들만큼이나 괴롭히는 직장 상사도 모자라 성별 덕분에 먼저 승진한 남자 동기를 상사로 모셔야하는 사태까지 직면한 순희. 일주일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며 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취업은 요원하고,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는 날에는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묻지마 성폭력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정규. 그들의 이름 대신 누구의 이름을 써놓아도 어색하지 않다.
(우리는 천천히 오래오래) 


ㅡ 


일제강점기에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여류작가 백신애. 친일 활동을 했던 가부장적인 아버지, 독립 자금을 댄 혐의로 수감생활을 했던 오빠로부터의 영향, 여성단체에서의 사회운동, 시베리에아 갔다가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감금 후 추방, 일본 유학, 늦은 결혼과 이혼, 췌장암으로 서른한 살에 요절. 넓은 스펙트럼으로 파란한 삶을 산 그녀의 작품이 관통하는 주제는 조선 민중의 고통받는 지난한 삶과 극단적인 가난, 가부장제에서 교육조차 제대로 받기 힘든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차별과 억압된 욕구와 가혹한 편견을 통해 바라본 여성주의, 그리고 허위에 찬 엘리트주의다.  


물리적으로는 100년에 가까운 시간 차이가 있지만 백신애의 분노와 최진영의 분노에 별 차이가 없다는 최진영 작가의 말에 공감한다. 이렇게 큰 시차를 둔 두 작가가 거의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독자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마치 언제는 그렇지 않았냐는듯이 당연스럽게 여기며, 그래도 나아지고 있지 않냐는 말로 불편함을 대신한다. 하지만 유선 전화기가 디지털 통신 기기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성별을 가진 이들이 여전히 사회 구조에서 보조적 소수자의 위치에 있음은 너나할 것 없이 아주 많이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책의 끝에 실은 에세이에서 현대의 순희에게 직장과 가정에서 느끼는 피로감만으로 벅찰 것 같아 사랑의 혼란과 피로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는 최진영 작가의 글에 1930년대의 순희, 2020년대 순희 모두를 배려하는 마음을 읽었다. 아픔과 위로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공유하는 것을 넘어서 이처럼 과거와 현재를 모두 위무할 수 있을 때야말로 비로소 '이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홀로 달리고 있는 당신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심심하고 외로운 당신이 그 사실을 기억해주길 바라는 순희와 정규의 마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