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선영 옮김 / 새움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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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첫 소설이자 출세작인 이 작품은 가난한 중년의 남자와 고아 소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큰 줄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소설은 가난에 대한 이야기도, 애끓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돈이 없어 벼랑 끝에 내몰린 '인간'을 들여다 본다.  


두 남녀의 편지로 시작되는 소설은 바르바라의 과거를 서술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서간문 형식이다. 도입부부터 작가는 마카르의 편지를 통해 당시 러시아 하층민의 생활 환경을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도스토옙스키가 가난과 사람을 분리해 놓고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의 궁핍한 모습을 그려냈다기보다는 돈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그로인해 달라지는 모습들을 말하고자 했던게 아닐까싶었다.  


일단 마카르는 30년 근속에 행실이 바르고 성실한 하급관리다. 법규를 어겼다거나 사회질서를 어지럽힌 적이 없으며 누구에게 비난받을 만큼 큰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벌이가 넉넉해 여유로운 삶을 살지는 못했지만 먹고 사는 데에 큰 문제가 없는, 그야말로 사회 구성원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갖는 인물상이다. 그런데 먼 친척뻘 고아 아가씨를 보고 사랑하게 되면서 헌신적으로 그녀를 돌봐준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카르가 바르바라에게 제 분수를 넘어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도 본인은 하숙비도 내지 못하고, 심지어 가불과 빚까지 얻어 요즘으로 치자면 파산할 형편에 놓인다. 이떄부터 마카르의 모습은 눈에 띄게 황폐해지고 자괴감에 빠진다.  


마카르는 푸시킨의 <역참지기>를 읽고 너무나 현실적이고 살아있는 이야기라고 하면서 마치 자신의 얘기인 양 이입된다. 가난한 이들의 암울한 삶,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그들 방식대로의 비극을 안고 사는 귀족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저마다 불행을 안고 산다고 말하는 마카르를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자기가 쓰는 바로 이 소설 <가난한 사람들>이 지극히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고 말하고자함은 아니었을까.   


마카르의 처지를 대변하며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단추다. 실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마카르의 단추가 하필이면 상관 앞에서 뜯어져 나가고, 쉽사리 잡히지 않는 굴러가는 단추를 집기 위해 그 뒤를 쫓는 마카르의 모습은 돈을 구하기 위해 상방팔방으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연상시킨다(세상사 새옹지마라고 결국 이 난처한 상황이 그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지만).   



그렇다면 마카르에게 헌신적인 사랑과 도움을 받는 바르바라의 상황은 어떤가? 그녀는 마카르가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록 말로는 돈을 아껴쓰라고 얘기하지만 그가 하는대로 다 따르며 호의를 다 받아들인다. 바르바라는 마카르가 파산에 가까운 상황에 처하자 그제서야 그를 호되게 나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를 안심시켜 달라고 하거나 어려운 처지에 놓이자 대놓고 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한다.


이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재미있는 점은 그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다.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아기씨, 선녀님, 내 비둘기, 내 천사님 등으로 부르고, 바르바라는 마카라를 주로 친구님이라고 부른다. 편지의 내용상 분위기도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연인보다는 숭배하는 느낌이 크고, 바르바라는 사랑과 우정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있는 듯 느껴진다. 마카라는 바르바라를 사랑한 것일까? 


ㅡ 


위에 썼듯, 소설은 '가난'으로 인해 달라지는 인물들의 모습을 면밀하게 보여준다.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거나 처세에 실패하고 경쟁에서 밀려나면 무능력한 스스로를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되고 성격이 거칠어지며 자포자기하듯 건강을 돌보지 않는다. 사회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가 나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돈이 없으니 아파도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어렵고, 마치 기다렸다는듯 죽음을 받아들인다. 


마카르의 동료 예스타피 이바노비치는 시민의로서의 가장 큰 덕목은 '돈 버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궁핍한 사람에게 도덕은 그저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성실하고 정직하고 야망이 없는 것은 무능력을 넘어서 죄로 취급된다. 바르바라는 마카르에게 가난은 죄가 아니니 절망할 필요가 없으며 고상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가난은 유죄다. 헌신으로 포장된 두 사람조차 경제적인 상황이 몰리자 슬슬 서로를 원망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편지는 어느 순간부터 신세 타령으로 바뀌지 않았나.  


다른 관점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르바라와 마카르의 대화에서 나오는 '쓸모'다. 바르바라는 연약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이기에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마카르는 떠나겠다는 그녀를 만류하기 위해 그녀의 '쓸모'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지만, 정작 그 역시 직장에서는 '쓸모'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우리는 간혹 인간의 존엄성을 들어 존재만으로도 충분하기에 인간을 '쓸모'로 판단하는 것에 대해 불편해 한다. 그런데 노년기에 접어든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자신이 사회 구성원으로 쓸모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라고 한다. 이는 바꿔말하면 존재감이다. 마카르는 바르바라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쓰면서도 본인은 하숙비도 내지 못하고 이후에는 더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는 처지가 된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사랑 때문만일까? 이 사랑을 통해 마카르는 자신의 쓸모, 즉 존재의 이유를 찾았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에서 거의 유일한 빌런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안나 표도로브나. 그녀는 내켜하지 않는 바르바라 모녀를 집요하게 설득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간 후 그들이 의지할 데 없는 고립무원의 처지임을 확인한 후 노골적으로 악담을 퍼붓고 모욕을 주며 혐오감이 들 정도로 두 사람을 괴롭힌다. 그러면서 그집을 방문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자비심과 기독교적인 사랑으로 모녀를 거둬줬노라고 자신의 선행을 강조했다. 그녀는 바르바라의 죽은 아버지를 비난하고 모녀를 괴롭히면서 왜 굳이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 것일까? 또한 바르바라가 그 집을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바르바라를 괴롭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안나와 바르바라와의 별다른 서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독자는 안나에 대해 납득하기 어렵다. 짐작해볼만한 점은 그녀가 바르바라를 괴롭힘으로써 마카르까지 벼랑 끝으로 몰고가는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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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할 정도로 헌신하는 마카르를 보면서 이후에 탄생할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그 밑바탕에 자리한 것이 존재감이든 사랑이든 자존심이든, 무엇이든 간에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숭고한 인류애를 열망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족. 
1. 마카르도 역시 수다스럽다.

2. 독서모임 중 한 팀의 1월 도서다. 어떤 얘기들이 나올지 무척 궁금하네. 마카르와 바르바라에 대해서는 다양한 얘기들이 나올 것 같아.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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