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꿈들 - 장소, 풍경, 자연과 우리의 관계에 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양미래 옮김 / 반비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우리가 잠시 권력을 맡긴 관리들이다. 이들은 아름다움과 자연의 질서가 깊고도 엄연한 의미를 갖는다고 믿는 수많은 사람들이 잠깐 소홀한 틈을 타 위험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침묵의 봄' 에서 / 레이첼 카슨) 

 


이 책은 1994년 초판이 출간됐다. 그때 바로 읽었다면 훨씬 이입해서 읽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가 저자의 '20주년 기념판에 부치는 서문'이 다른 각도에서 가슴에 확 박혔다. 1950년 이전부터 네바다주에서 벌어진 핵실험으로 인한 피해와 그 이면에 숨겨진 금전적 이권 및 진실, 그리고 네바다 주민들과 솔닛을 비롯한 반핵 운동가와 사회활동가들의 길고 긴 여정의 기록이 담겨 있다. 





 



네바다 핵실험장의 면적은 약 3500제곱킬로미터로, 벨기에의 국토 면적보다 네 배 이상 큰 규모다. 그곳에서 영국과 미국은 40년 동안 900개가 넘는 핵폭탄을 터뜨렸다. 솔닛은 만일 군대가 같은 시기에 같은 물량의 핵폭탄을 벨기에 국토에 터뜨렸다면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라고 말한다.  


솔닛은 핵폭탄과 관련된 맥락에서 사용하기에 '실험'은 부적절한 용어이며, '리허설' 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핵폭발은 실험보다는 과시와 눈속임을 동원한 전쟁과 흡사하며 동시에 핵폭탄 투하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정부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얘기한다(여기에서 저자는 많은 국가들이 핵실험을 감행했지만 세계의 종말을 리허설한 국가는 미국과 소련 뿐이었음을 짚는다).


반핵 운동가들이 핵실험 중단을 위해 네바다 사막에 가게 된 이유는 냉전이 해빙기에 접어들면서 프랑스가 미국과 소련이 핵실험을 그만두면 자국 또한 그만둘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고, 1991년 유엔 총회에서는 41개국이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 체결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소련이 핵실험을 일시 중지했음에도 미국은 핵실험을 지속했기 때문이다. 


네바다 핵실험 지역은 극도로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창 실험이 진행 중이였던 시기에조차 일반인들이 아무렇지 않게 핵실험장 내부 깊숙한 곳까지 진입이 가능했다. 여러 측면에서 출입 제한 지역이어야 마땅함에도 정부는 이에 대해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핵실험이 마치 전적으로 국가 안보 차원이기에 불가결한 사항인 것 같지만 여기에도 역시나 '돈'이 연관되어 있다. 또한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미국에서 비폭력 저항 시위대의 절반 가까운 사람들을 체포했다는 것, 무엇보다 이처럼 대규모로 진행된 시민 불복종 체포 사건이 지역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ㅡ 


그레이트 베이슨은 핵실험장으로 사용되기 이전부터 굴곡진 역사를 안고 있다. 덫사냥에서 비롯된 사실상 대량학살에 가까운 원주민ㅡ백인 충돌 사건을 시작으로 유럽인 프리몬트의 탐험(이라고 쓰고 침략이라고 읽어야하는), 그리고 척박한 환경으로 간주되어 비주류이자 비문명인이며 아웃사이더가 살아야 하는 영토로 간주된다. 이로써 그레이트 베이슨에 처음으로 정착한 사람들은 유목민이었고, 19세기 네바다주의 마을은 대부분 광산 마을이었다. 이는 현재 네바다 주에서 세 번째로 큰 정착지가 넬리스 공군기지인 것, 그리고 핵실험 장소로 지정되기까지의 상황과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레이트 베이슨을 대륙간 사격장으로 만들어 국가적 희생양으로 삼으려던 정부의 계획을 읽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911테러 사건이 떠올랐다. 만약 네바다주 그레이트 베이슨에 '그들'이 아닌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거주했다면 이런 잔혹하고 반인륜적인 계획을 생각조차 할 수 있었을까. 이는 어느 하나의 문제점이 아니라 권력자와 기득권층의 욕망과 그들이 갖는 인권 인식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디 인권 뿐인가. 생태계의 가치 자체가 이미 사라지다시피 되고 있는데.  


ㅡ 


솔닛은 물리학자 집단이 동질적인 이유에 대해서 얘기하는데, 개인적으로 와닿았던 점은 그들은 '(핵무기) 사용이 옳은 일이라고 믿는 듯'하다는 점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원폭 투하에서 확인할 수 있고, 이러한 논리와 주장은 여전히 유효하게 받아들여진다.  


더 기가 찬 노릇은 각자의 입장에서 만들기만 할 뿐, 관리하기만 할 뿐, 그 이후에 발생하는 문제들은 자기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인식한다는 데에 있다. 이것 또한 책임을 서로 떠넘기고 회피하는 빌미가 된다.  


원자 폭탄은 나치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결국 나치가 인종 학살을 벌인 것만큼이나 미국은 잔혹한 학살쇼를 벌인 셈이다. 더구나 미국 에너지부가 작성한 자체 핵실험 장부에는 두 차례의 원폭 투하를 실험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나치와 소련이 유대인을 몰아내는 바람에 미국이 단시간에 순수 과학 분야에서 월등히 우세한 국가가 되었으나 그 재앙은 미국의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 


핵무기는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국가 간 대립에서 협박의 도구로 쓰이고, 국가 안보를 들어 자국민을 설득한다. 반핵 운동가 재닛의 사연은 핵 사용 우려가 무기 차원에서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책에서 리처드 미즈라크가 언급되길래 그가 찍은 네바다주 사진을 찾아봤다. 사진이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지만, 한두 장의 사진만으로도 황폐하고 참혹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사진에는 낙진까지 포착되지 않으니 그 땅이, 그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받는 고통은 상상 이상일 것이다.  


솔닛은 원자폭탄은 우리가 가진 힘과 욕망과 한계 사이의 문제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주요한 상징이자 사실이라고 말한다. 방사성 폐기물 저장소 지정에 있어서 일련의 과정에 따른 불확실성과 일방적 결정, 그리고 이것이 미치는 극단적인 악영향. 솔닛은 누군가가 체포됐다는 동료의 만우절 짓궂은 장난을 보면서 네바다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상황들이 모두 만우절의 거짓말이었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핵실험까지 가기 전에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어보면 제초제와 살충제의 폐해가 전 생태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솔닛은 <침묵의 봄>을 자주 언급하는데, 현재에도 여전히 (비)공식적으로 핵은 존재하고, 이것이 곧 또다른 살충제의 역할을 하게 될 것임을 말하고자한건 아닌지.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에서 과학과 환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확실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솔닛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작금의 상황은 카슨이 주장했던 때보다 훨씬 더 시급하다. 우리가 핵사용에 대한 명분을 어디에 두어야 하고, 무엇을 우선해야 할지를 먼저 고민하며,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답이 보일 것이다.  


ㅡ 


비폭력이란 단순히 폭력을 삼가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변화를 위해 애쓰는 것, 목표로 삼은 이상을 구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상당한 상징성을 부여한다. 솔닛이 짚은 것처럼 폭력을 쓰는 것은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지지하는 셈이기에 비폭력은 폭력과 무력을 약화한다. 운동가들이 끝까지 비폭력을 고집하는 이유다. 









297.
원주민을 몰살해야 한다는 버넬과 마리포사 기병대의 판단이 전쟁을 추동하는 일반적인 감정인 무자비한 증오가 아니라 무분별한 행정적 태도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이다. 경제 활동에 필요한 땅을 개척하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 걸림돌이 되는 원주민들은, 말하자면 금이 가득 찬 화석 강바닥에서 흙을 들어내듯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치워버려야 하는 존재였다.  

 
 


2부에서는 요세미티에서 원주민들이 내몰려지고 요세미티 밸리가 이방인의 땅이 된 과정을 서술한다.  


미중서부에서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개척자 집단 도너 파티의 이름을 딴 도너 패스, 파이우트족장 두 사람의 이름을 딴 트러키와 위네무카, 나바호족을 고향에서 쫓아낸 키트 카슨의 이름의 딴 카슨 시티, 1833년 최초로 요세미티 밸리에 발을 들인 덫사냥꾼 조지프 워커의 이름을 딴 타호 동쪽의 워커 호수. 캘리포니아 뿐 아니라 미국 각지에 남은 수많은 명칭은 잊힌 존재들을 기리는 기념비이자 미국 역사라는 암호를 푸는 열쇠다. 


지명을 요세미티라고 결정한 이들은 백인이다. 요세미티는 '그들 중 일부는 살인자'라는 뜻을 가진 오헤미테에서 온 단어다. 솔닛이 요세미티를 제대로 번역한 문헌 가운데 처음 발견한 자료는 문제의 그 '살인자'가 백인을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침입자 본인이 자신의 잔인한 행위를 지칭하는 단어를 장소명으로 정했다는 사실은 상당한 아이러니다. 그런데 '요세미티' 단어에는 숨겨진 의미가 따로 있는데 의미를 알게 되면 침입자의 몰이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요세미티는 허칭스와 사진작가 찰스 리앤더 위드가 그곳을 촬영한 최초의 사진 덕분에 전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허칭스는 요세미티 밸리를 홍보하는 출판물을 연재하며 요세미티 관광을 권장하는 일에 점점 더 깊이 몰두했다. 요세미티 밸리에서도 원주민과 백인 간의 충돌들이 기록이 남았으나 사진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전쟁과 풍경을 분리시켰다.  


19세기 후반, 요세미티를 찾는 관광객은 점점 더 증가했다. 옴스테드는 사람들을 설득해 요세미티 밸리와 마리포사 그로브가 보호구역이 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노력했고, 1864년 요세미티는 주립공원으로서, 1890년에는 요세미티 국립공원으로 재지정되었다.  


19세기까지 미국에서 채굴된 모든 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이 시에라네바다에서 채굴되었다. 즉 땅을 파헤쳐 토양과 강을 망치는 작업이 캘리포니아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요세미티는 이 채굴 산업의 피난처였다. 솔닛은, 국립공원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이유는 급속히 황폐화하고 변형되는 땅을 아주 일부만이라도 보존하기 위한 시도의 결실이며, 국립공원은 몇 안 되는 장소라도 지켜내기 위한 시도라고 얘기한다. 


광산은 원주민을 거꾸로 '초대하지 않은 손님'으로 만들어버렸고, 살인을 불러왔으며, 전쟁을 야기시켰다. 마리포사 기병대의 캘리포니아에서의 싸움은 미국 내 원주민 보호구역 조성을 규정하는 정책의 기원이 되었다. 알다시피 원주민 보호구역은 강제이주 난민수용소와 다를 바 없었고, 자급자족을 원했던 원주민에게 지급되는 물품과 도구는 거의 없었으니 오히려 그들의 삶의 질을 퇴행시킨 셈이었으며 더하여 미국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한 것이다.


ㅡ 


솔닛의 글을 따라가자니 문득 박제된 듯 프레임에 갇혀버린 자연의 예술성과 이어지는 상업성에 대해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2부를 읽으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나름의 고민은 인간이 자연의 한 일원인지, 아니면 이방의 존재인지의 여부와 어느 것이 공생하는 데에 있어서 더 나은 방향이냐는 것이었다.   


솔닛은 야생을 판가름하는 기준이었던 것이 수 세대에 걸친 인간의 손길이 담긴 인공 유물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면서 문화가 반드시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 원론적인 얘기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결론은 인간이 자연과의 공생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을 읽고 있자니 개척민들에게 터전을 빼앗겨 쫓겨나고 밀려난 원주민들의 모습과 핵실험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반핵 시위를 하는 이들의 모습은 중첩된다. 핵실험을 비롯한 전쟁과 환경 오염으로 인한 기후 위기로 인해 인류는 점점 더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각성을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환경학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그의 저작에서 핵쓰레기는 가장 해결이 어렵고 다음 단계로 끝없어 떠넘겨지는, 분해가 요원한, 그야말로 '쓰레기'라고 썼다. 더하여 인류 멸망에 있어 가장 상상하기 쉬운 시나리오는 핵폭탄 폭발이며, 설령 전쟁이 발발하지 않더라도 지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잠재적인 위험이라고 강조한다.   


ㅡ 


솔닛은 이 책에서의 두 장소가 자신에게 정답이 아닌 무한한 질문을 던지며 가르쳤고, 그녀의 일과 삶에 방향을 제시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쓴 책 대부분이 <야만의 꿈들>에 뿌리를 둔다고 썼다. 그만큼 이 책은 리베카 솔닛의 사유의 토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풍경, 공간, 사람, 학문, 산업, 예술, 문화 등을 종횡하는 솔닛의 글쓰기 변주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요소요소마다 개연성의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읽고, 많이 썼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걷기, 사막의 침묵과 광대함과 공허, 영성, 지역에 대한 차별적 인식, 간간이 드러나는 유년 시절 등 이 책이 비평서 같은 느낌이 크지만 딱딱하거나 건조하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그의 진솔하고 깊은 사유에 있다. 리베카 솔닛의 책을 읽고 싶은데, 어느 책부터 시작해야할지 나감하다면 이 책, 특히 1부를 꼭 읽어보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움직임에서 비롯됨을 다시 강조하며 읽기를 마친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에서 이방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350.
여전히 나는 자연을 경험하는 그런 방식에 애석하게도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보기(looking)는 사진의 영역에서는 훌륭한 행위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적절한 방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자연을 우리가 속하지 않는 장소, 우리가 살지 않는 장소, 우리가 침입하는 장소로 보는 관점이다. 관광객은 본질적으로 외부인, 소속되지 않은 사람, 낙원에 있는 이방인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