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백치 1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5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평점 :
스위스에서 뇌전증 치료를 받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로고진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되는 스물여섯 살 청년 공작 므이쉬킨. 로고진의 입에서 불거져나온 나스타시야라는 이름은 이후 두사람을 애증의 관계 속으로 몰아넣는다.
나스타시야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로고진은 그녀를 돈으로라도 얻겠다는, 한마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겠다는 일념 뿐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나스타시야의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을 결심한 가브릴라가 있다. 도대체 나스타시야는 어떤 인물인가?
나스타시야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거부 토츠키의 호의로 그의 피후견인이 되었다. 성장하면서 남다른 외모를 눈여겨 본 토츠키는 나스타시야를 정부로 들어앉혔고 이를 모르는 이는 페테르부르크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쉰다섯 살이 된 토츠키가 예판친 장군의 딸(이 시대 결혼 적령기를 따져보면 손녀 뻘)에게 청혼을 하기에 이르고, 걸림돌이 된 나스타시야를 예판친 장군의 비서인 가브릴라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쥐어 결혼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성장 배경만 놓고 보면 이후 드러나는 나스타시야의 히스테릭한 성격을 납득할만 하다.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영감을 불어넣지 못했고, 가슴 속에는 심장 대신 돌덩이가 들어앉아 있으며, 감정은 메말라 영원히 죽어버린 듯'했다는 표현은 그녀의 상처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나스타시야 입장에서 로고진의 집착은 토츠키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다. 자신의 외모에만 이끌려 내면을 보려하지 않고, 진심을 보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지난한 노력보다는 돈으로 쉽게 사랑을 얻으려 한다는 점에서 로고진, 토츠키, 가브릴라,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들은 모두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첫눈에 그녀의 애수를 간파한 므이쉬킨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할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과 우정의 작대기를 그려보면, 위에 썼듯 로고진은 나스타시야를 사랑한다. 나스타시야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준 므이쉬킨에게 매료되지만 그의 앞날을 위해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접는다. 가브릴라는 아글라야를 좋아하지만 거액의 지참금을 포기할 수 없어 나스타시야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아글라야는 아직까지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사이사이 므이쉬킨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스타시야의 마음을 아는 로고진에게 있어 므이쉬킨은 질투의 대상이자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친구다. 가브릴라 역시 연적이자 자신과는 너무 다른 므이쉬킨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의 선의와 이타심,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존경한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로고진과 결혼하려는 마음과 두려움이 교차해 변덕을 부리는 나스타시야. 로고진에 의하면 그 두려움이란 므이쉬킨을 향한 사랑이다. 로고진은 증오와 정복욕이 뒤섞인 감정이 사랑이라고 여기며 나스타시야에게 집착하는데, 어쩌면 그 집착은 나스타시야가 비록 잠시나마 로고진의 집에서 진정성 있게 그의 내면을 바라봐준, 그 순간의 위로를 잊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로고진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본인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이 위로라고 한다면, 그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그야말로 '바보'가 아닐까.
므이쉬킨은 인간이 갖을 수 있는 순수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모든 것에 지나치다 싶을만큼 정직하고, 입에 발린 말은 고사하고 선의의 거짓말조차 하지 못한다. 므이쉬킨에게 있어 연민과 사랑은 동격이며, 이는 남녀노소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다. 어떤 형태이든 므이쉬킨에게 있어 사랑은 인류애다. 므이쉬킨이 타인에게 갖는 측은지심은 가히 성인聖人의 수준에 이른다. 인류애적인 사랑과 순수함은 어린 아이나 가능하다는 고정관념, 즉 어른이 되지 못하는 '백치'라는 사고에서 본다면 므이쉬킨은 그야말로 스스로가 인정하듯 '백치'다. 불의가 다수가 되면 일반화되듯이, 정직과 순수는 더 이상 어른의 세계에서는 존재하면 안되는 덕목이다. 그래서 이러한 덕목을 우선하는 이는 바보로 치부된다.
소설 속 마리의 이야기는 므이쉬킨의 관점을 통해, 한 인간 자체의 불행보다 '도덕'이라 믿는 관습을 더 우선하는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는데, 더 무서운 것은 그릇된 집단주의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학습되어진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작가는 꿰둟고 있다. 즉 어린 아이에게 순수성을 잃도록 어른이 가르치는 셈이며, 이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무한궤도가 돌 듯 반복되어진다는 것이다.
므이쉬킨은 어떤 대상을 보는 법을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그는 남들이 놀랄만큼 심리관찰에 뛰어나다. 사람을 외면이 아닌 내면으로써, 허영보다는 진정성에 무게를 두고 타인을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때문이다. 일명 '파블리셰프 아들'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과정에서 므이쉬킨은 브르돕스키와 단 둘이 있는 자리가 아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밝혀 그를 모욕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그 정도의 소양이 안 되는 자신을 스스로 백치라고 부르며 한탄한다. 사건의 원인을 자신에게서부터 찾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첫 걸음이다. 이 사람은 그야말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는 방법을 안다.
뇌전증을 앓으며 시골의 대자연에 살면서 소박한 삶에 대한 가치를 일찌감치 깨우친 므이쉬킨이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건강을 느끼며 하루하루가 소중함을 아는 것. 소설은 사이사이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이 남자의 소박한 바람이 지켜지지 못할 것을 알기에 벌써부터 가슴이 따끔따끔하다.
이 작품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사이사이 알료샤(므이쉬킨), 드미트리(로고진), 그루셴카(나스타시야), 표도르(토츠키) 등의 인물들이 연상된며, 사건의 단면 역시 겹쳐지는 느낌이 있다. 소설 초반 총살형 판결을 받고 죽음 직전에 감형된 사람의 이야기는 작가 본인의 경험을 그대로 녹여놓은 듯 한데, 그 사건이 도스토옙스키에게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된다. 이 분 작품의 가독성은 아는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책장이 휙휙 넘어간다. 두 번째 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