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소녀 - 꿈을 따라간 이들의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김남주 옮김 / 이봄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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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위친족의 소년 다구. 다구라는 이름은 뇌조를 뜻하는데, 소년은 이름대로 날렵하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일 년 내내 태양이 비치는 남쪽의 따뜻한 나라 '해의 땅'. 다구는 부족의 어르신으로부터 '해의 땅'으로 가는 옛 지도에 대해 들었고, 어르신은 지도 하나를 그려주었다. 다구는 어머니에게 받은 무스 가죽 조각에 그 지도를 베껴 놓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전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작부터 방랑기가 가득해 보이는 다구. 인간만의 특성이라는 호기심은 독이라 했던가. 다구의 끝없는 호기심이 아슬아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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퓰리처 글쓰기 수업 - 논픽션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잭 하트 지음, 정세라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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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모두 똑같은 것 같지만 저마다 다르다는 점에서 눈송이를 닮았다.
(존 프랭클린)




내가 동네 도서관 사서샘(자주 들락거려서 인사하고 지내는 사이)이나 주변 지인들한테 종종 듣는 질문이, "작가 지망생이세요?"다. 뭐... 당연히(?) 아니다. 사실 읽는 양에 비해서 쓰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사춘기에 접어들기 전인 어린시절의 소위 인생책이 <백과사전>과 <작은 아씨들>이었다. 책 좀 읽는다하는 여자아이들한테 선망의 대상이었던  '조'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조'를 따라 미래의 꿈이 '작가 지망생'(작가도 아니고)일 때도 있었으나, 그걸로 끝. 이후로 고등학생 당시 학교 문예지에 서너번 글이 실린 것(그것도 강제로)과 어른이 된 후 어느 잡지사에 글이 두어번 실린 것, 그리고 일기를 매일 쓰는 것 외에는 글쓰기와는 직업적으로나, 취미생활로나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간혹 글을 써야 할 때가 생겼는데, 무엇보다 나를 당황시킨 건 '설득하는 글'을 써야할 때였다. 국어과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읽는다고 읽었는데, 내가 이렇게 어휘력이 부족했나 싶을 때가 자주 발생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것 등 객관적인 차원에서 그치지 않고 좀더 타당성을 기반으로 설득해야하는 부분에서 간혹 막히곤 한다. 그래서 읽어보자 싶었다. 





 




이 책은 표지에서 보이듯 논픽션 스토리텔링 글쓰기에 대해 서술한다. 스토리, 구조, 시점, 캐릭터, 스타일 등 구성 요소 뿐만 아니라 취재, 인터뷰, 기사와 실질적인 글을 쓰는 데에 도움을 준다. 사실 이 책에 쓰여진 내용들을 구구절절 읊는 것은 조악한 내용 정리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꼴이 되기에 일일이 설명은 생략한다.  
 


이 책의 장점은 수많은 예시를 통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이다. 고전 문학을 비롯해 보도자료 정리와 기사부터 영화 스토리텔링까지 실제로 쓰였던 혹은 저자가 직접 제시하는 엄청난 양의 글쓰기 예시와 도표들을 첨부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들이 저자가 서술하는 내용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이해하기가 아주 수월했다.  

 
저자가 제일 마지막으로 언급한 점은 '윤리 의식'이다. 아마 이 부분을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기본으로 지켜져야함에도 간과하는 이들이 많기에 잊지않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저자가 정한 글쓰기의 기본 윤리원칙은 솔직, 정확, 투명, 명확이다. 물론 다양한 이유로 내러티브의 윤리적인 문제에 있어 어떤 작가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작가에게 갖는 신뢰를 생각한다면 잊어서는 안되는 소양임을 저자는 당부한다. 특히 저널리즘 텍스트의 정확성에 대한 분명한 원칙을 적용해야함은 물론이고 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보탠다.  
 


글쓰기는 우리 주변에 있는 사소한 경험을 듣고 보고 기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에 좀더 탄탄하게 갖추어진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곁에 놓고 글을 쓰다가 사이사이 참고서처럼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 지원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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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5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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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뇌전증 치료를 받다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로고진과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되는 스물여섯 살 청년 공작 므이쉬킨. 로고진의 입에서 불거져나온 나스타시야라는 이름은 이후 두사람을 애증의 관계 속으로 몰아넣는다.   









 
나스타시야를 광적으로 사랑하는 로고진은 그녀를 돈으로라도 얻겠다는, 한마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하겠다는 일념 뿐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나스타시야의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을 결심한 가브릴라가 있다. 도대체 나스타시야는 어떤 인물인가? 
 


나스타시야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거부 토츠키의 호의로 그의 피후견인이 되었다. 성장하면서 남다른 외모를 눈여겨 본 토츠키는 나스타시야를 정부로 들어앉혔고 이를 모르는 이는 페테르부르크에 아무도 없다. 그런데 쉰다섯 살이 된 토츠키가 예판친 장군의 딸(이 시대 결혼 적령기를 따져보면 손녀 뻘)에게 청혼을 하기에 이르고, 걸림돌이 된 나스타시야를 예판친 장군의 비서인 가브릴라에게 거액의 지참금을 쥐어 결혼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성장 배경만 놓고 보면 이후 드러나는 나스타시야의 히스테릭한 성격을 납득할만 하다. '어떤 남자도 그녀에게 영감을 불어넣지 못했고, 가슴 속에는 심장 대신 돌덩이가 들어앉아 있으며, 감정은 메말라 영원히 죽어버린 듯'했다는 표현은 그녀의 상처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나스타시야 입장에서 로고진의 집착은 토츠키와 크게 다르지 않을 터다. 자신의 외모에만 이끌려 내면을 보려하지 않고, 진심을 보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지난한 노력보다는 돈으로 쉽게 사랑을 얻으려 한다는 점에서 로고진, 토츠키, 가브릴라, 아니 어쩌면 그녀가 알고 있는 남자들은 모두 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첫눈에 그녀의 애수를 간파한 므이쉬킨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은 당연할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사랑과 우정의 작대기를 그려보면, 위에 썼듯 로고진은 나스타시야를 사랑한다. 나스타시야는 자신의 상처를 알아봐준 므이쉬킨에게 매료되지만 그의 앞날을 위해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접는다. 가브릴라는 아글라야를 좋아하지만 거액의 지참금을 포기할 수 없어 나스타시야와의 결혼을 결심한다. 아글라야는 아직까지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사이사이 므이쉬킨에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스타시야의 마음을 아는 로고진에게 있어 므이쉬킨은 질투의 대상이자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친구다. 가브릴라 역시 연적이자 자신과는 너무 다른 므이쉬킨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의 선의와 이타심,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존경한다.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로고진과 결혼하려는 마음과 두려움이 교차해 변덕을 부리는 나스타시야. 로고진에 의하면 그 두려움이란 므이쉬킨을 향한 사랑이다. 로고진은 증오와 정복욕이 뒤섞인 감정이 사랑이라고 여기며 나스타시야에게 집착하는데, 어쩌면 그 집착은 나스타시야가 비록 잠시나마 로고진의 집에서 진정성 있게 그의 내면을 바라봐준, 그 순간의 위로를 잊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로고진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본인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이 위로라고 한다면, 그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그야말로 '바보'가 아닐까.




 
므이쉬킨은 인간이 갖을 수 있는 순수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모든 것에 지나치다 싶을만큼 정직하고, 입에 발린 말은 고사하고 선의의 거짓말조차 하지 못한다. 므이쉬킨에게 있어 연민과 사랑은 동격이며, 이는 남녀노소와 지위 고하를 막론하다. 어떤 형태이든 므이쉬킨에게 있어 사랑은 인류애다. 므이쉬킨이 타인에게 갖는 측은지심은 가히 성인聖人의 수준에 이른다. 인류애적인 사랑과 순수함은 어린 아이나 가능하다는 고정관념, 즉 어른이 되지 못하는 '백치'라는 사고에서 본다면 므이쉬킨은 그야말로 스스로가 인정하듯 '백치'다. 불의가 다수가 되면 일반화되듯이, 정직과 순수는 더 이상 어른의 세계에서는 존재하면 안되는 덕목이다. 그래서 이러한 덕목을 우선하는 이는 바보로 치부된다.  


소설 속 마리의 이야기는 므이쉬킨의 관점을 통해, 한 인간 자체의 불행보다 '도덕'이라 믿는 관습을 더 우선하는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는데, 더 무서운 것은 그릇된 집단주의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학습되어진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작가는 꿰둟고 있다. 즉 어린 아이에게 순수성을 잃도록 어른이 가르치는 셈이며, 이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무한궤도가 돌 듯 반복되어진다는 것이다.  


므이쉬킨은 어떤 대상을 보는 법을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그는 남들이 놀랄만큼 심리관찰에 뛰어나다. 사람을 외면이 아닌 내면으로써, 허영보다는 진정성에 무게를 두고 타인을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노력 때문이다. 일명 '파블리셰프 아들'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 과정에서 므이쉬킨은 브르돕스키와 단 둘이 있는 자리가 아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진실을 밝혀 그를 모욕했다는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그 정도의 소양이 안 되는 자신을 스스로 백치라고 부르며 한탄한다. 사건의 원인을 자신에게서부터 찾는 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첫 걸음이다. 이 사람은 그야말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는 방법을 안다. 


뇌전증을 앓으며 시골의 대자연에 살면서 소박한 삶에 대한 가치를 일찌감치 깨우친 므이쉬킨이 행복을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건강을 느끼며 하루하루가 소중함을 아는 것. 소설은 사이사이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이 남자의 소박한 바람이 지켜지지 못할 것을 알기에 벌써부터 가슴이 따끔따끔하다. 





  
 이 작품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데, 사이사이 알료샤(므이쉬킨), 드미트리(로고진), 그루셴카(나스타시야), 표도르(토츠키) 등의 인물들이 연상된며, 사건의 단면 역시 겹쳐지는 느낌이 있다. 소설 초반 총살형 판결을 받고 죽음 직전에 감형된 사람의 이야기는 작가 본인의 경험을 그대로 녹여놓은 듯 한데, 그 사건이 도스토옙스키에게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된다. 이 분 작품의 가독성은 아는 사람은 모두 알겠지만, 책장이 휙휙 넘어간다. 두 번째 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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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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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부터 1946년까지를 배경으로 화자 모리스 벤드릭스의 서술로 이어지는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얼핏 읽기에 연애 혹은 치정 소설로 읽힐 수 있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이들의 사랑은 신앙과 종교적 사랑, 그리고 인간이 추구해야할 사랑의 형태까지 확장된다.



주인공 세 사람이 정의하는 사랑은 무엇일까.
세라는 육체적 욕망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을 추구하지만, 모리스에게 끌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과 욕망을 초월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한다. 모리스는 사랑은 육체적 욕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질투, 즉 증오와 사랑의 크기는 비례하며 또한 시들어가지 않고 끊임없이 욕망하는 것이야말로 사랑이라고 믿는다. 헨리는 세라가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사랑에도 만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원했던 것은 보호자였는지, 아내였는지 의문이 든다.



모리스의 집착이 사랑일까를 고민하는 세라는 그들 자신이 서로에게 뭘 원하는지에 대해 자문한다. 그들은 사랑 때문에 행복하고, 사랑 때문에 불행하다. 삶에서 사랑이 전부인 사람은 질투의 화신인 모리스가 아니라 세라다. 모리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는 헨리에게 애정을 갖고 지켜볼 수 있었다는 것에 반해 모리스가 떠나자 헨리를 향한 분노가 들끓는 세라.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모리스의 아내가 되는 것인데, 모리스를 사랑했던 동안에는 헨리도 사랑했으나 소위 정숙한 아내가 되자 아무도 사랑할 수 없게 된 이 알쏭달쏭한 사람의 마음이여. 세라는 신에게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되뇌이지만, 끊임없이 신에게 의지한다. 어쩌면 사랑의 크기만큼 증오의 크기가 같다는 모리스의 말처럼 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욕구의 크기만큼이나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인간이 갖는 숙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세라는 이혼을 결심하고 1939년부터 시작된 모리스와 관계, 그리고 그를 사랑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헨리에게 쓰지만, 세라에게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걸하는 헨리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다. 신에게 죽음으로써 자신을 행복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차라리 두 남자가 아닌 자신에게 고통을 달라고 호소하는 세라의 모습은 희생과 고통을 자처하는, 신이 인간을 향하는 사랑의 모습과 흡사하다. 세라의 고단함은 사랑을 쟁취하지 못해서라기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도 다른 행위를 하는 자신을 믿지 못함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모리스가 아닌 세라가 아닐 싶다. 신을 믿지 않았던 세라가 신에게 의탁하자 죽음을 맞이한 아이러니는 종교적 사랑을 나타내는 또다른 모습이라는 생각도 든다.
 
 


모리스의 사랑은 지극히 육체적이고 독선적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모리스를 향한 사랑으로 고통스러워 결국 신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던 세라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신을 향했던 세라의 마음 한조각까지 온전히 제 것이 되지 못한 것에 신한테까지 질투를 일으키며 세라의 죽음으로 자신의 일부가, 존재가 상실됐음을 절감한다. 모리스에게 성욕=사랑이며 인간이 성욕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정신적으로 숭고한 종교적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런데 모리스의 갈등과 혼란은 정작 세라가 죽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저기서 세라의 장례식을 카톨릭식으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모자라, 세라가 사실은 카톨릭 신자였으며 그의 순수한 선의를 통해 발현된 기적을 증명하는 이들이 찾아온다. 모리스는 신의 사랑도, 신의 평화도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오직 세라와의 사랑, 그와 평생을 함께 사는 것 뿐이었다. 이것이 신으로부터 시험을 받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던가. 신의 구원을 받기 위해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과 사랑을 거부해야 한다면, 모리스는 그 구원을 단호히 거부한다.  


모리스는 생각했다. 세라를 두고 싸운 이 싸움의 진정한 승자는 '신부'였다고. 그러나 세라를 기억하는 이는 종교가 아닌 그녀와 교감하고 사랑을 나눴던 자신들이라고 반발한다. 그러나 모리스를 아프게 찌르는 신부의 한마디. "신경쓰지 마세요, 벤드릭스 씨. 이제 당신이 무얼 하든 부인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까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의 의의가 소멸된다면 세상은 얼마나 하찮은가. 그러나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 삶의 충만함은 가질 수 있으니 그 의의를 하찮다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헨리는 세라가 죽은 후에 집안이 공허하지 않는 것에 당황스러워한다. 퇴근 후 세라가 집에 없었던 적이 종종 있었기에 빈 집에 들어오는 것이 익숙하고, 오히려 세라가 살아있을 때 느꼈던 공허함을 그녀가 죽은 현재에는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가 말하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만은 그가 과연 세라를 사랑했는지 의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것이야말로 헨리 방식의 사랑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고.  
 
 



세라가 사회적 규범 차원에서 봤을 때 정숙한 여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사랑이 없으면 살 수 없고, 삶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 때로는 공허한 유혹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사랑에 그녀만큼 진솔하게 고민하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모리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라와 모리스가 기억하는 세라는 아주 다르다. 모리스는 세라의 성적 욕망과 사랑을 위해서라면 불륜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런데 육체적 욕망과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왜 죄악인가? 모리스는 타락한 인간의 욕망과 숭고한 신의 사랑, 인간 사회의 규범에서 오도가도 못한 채 결정을 내리지 못한 우유부단함과 스스로를 소멸시킨 세라의 죄를 증오한다.  


세라는 죽음으로써 누구의 소유물도 되지 않았다. 이는 세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다. 3년 동안 그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는 모리스. 인간은 누구도 소유할 수 없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조차도. 소유될 수 없기에 우리는 망각될 자격이 있으며 죽음은 누군가를 잊어버리는 과정의 시작이다. 아무리 숭고한 사랑이라도 인간의 사랑을 종교적으로 승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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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그레이엄 그린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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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삶에서 사랑이 전부인 사람은 세라다.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모리스의 아내가 되는 것. 모리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할 때는 헨리에게 애정을 갖고 지켜볼 수 있었는데, 모리스가 떠나자 헨리를 향한 분노가 들끓는 세라. 모리스를 사랑했던 동안에는 헨리도 사랑했지만, 소위 착한 여자가 되자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이 알쏭달쏭한 사람의 마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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