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밀사 - 일본 막부 잠입 사건
허수정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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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조선통신사가 왕의 밀명을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제2의 왜란을 막아낸다는 보기 드물고 어쩐지 가슴 뛰게 만드는 설정 때문에 첫눈에 반해버린 소설이다. 게다가 최근에 국내 작가들에 의해서 쓰여진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 특히 팩션류에 대한 만족감이 컷던 탓에 기대감이 최고치인 상태에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선의 17대 왕인 효종. 조선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효종은 홍문관 교리인 남용익을 편전으로 불러들여 밀서를 전한다. 밀서를 전하는 이유는 일본내에서의 권력 다툼때문에 자칫하면 일어날지도 모를 왜란을 미리 막기 위하고자 함이다. 그런데 조선통신사 일행이 교토에 도착하자마자 사건이 터지고 만다.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술자리를 벌이고 난 다음날, 쇼군의 무사인 기요모리가 목이 잘린 시체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기요모리와 마지막에 술을 마시며 언쟁을 벌였던 남용익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억류되기에 이른다. 절체절명의 위기. 이에 남용익은 수행역관인 박명준에게 왕의 밀서를 건낸다. 그리고 박명준은 계략에 빠진 남용익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진실을 밝혀내기 시작한다.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박명준에 의해 사건의 전모가 하나씩 밝혀져 간다. 그리고 그 전모가 밝혀져 감에 따라서 뒤에 감추어진 일본내 각 세력들간의 얽히고 섥힌 엄청난 음모들이 드러난다. 실존인물들이 엮어내는 이야기는 그 당시 일본내의 권력구도와 각 인물들간의 이해관계가 실제로 어디까지 그러하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금의 한일관계와 묘하게 대비되면서 흥미롭게 전개된다. 처음 효종이 남용익에게 밀서를 전하는 서막에서부터 곧바로 교토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살인사건, 그리고 수수께끼가 수수께끼를 부르는 식의 전개는 흡입력 있고 이야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인물들간의 복잡하게 얽히고 섥힌 이야기를,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의 역사를 배경으로 창조해 낸 것을 보면 작가가 일본사에 상당히 능통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한국형 팩션이라는데 대한 선입견이 컸던 탓인지, 무대가 일본이면 일본인들이 나오는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일본 이름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다. 그거야 읽다보니 뭐 금새 적응이 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름이 너무 자주 나온다는 것이다. 상당히 교묘하고 복잡한 사건의 상황설명이 인물들의 대사안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누가 무엇때문에 누구와 손을 잡고 누가 누구를 어찌하였고 누구와 무슨 관계이며 누구와 누구.... 한 페이지 안은 물론이고 한사람의 대사안에서도 수없이 이름들이 왔다갔다 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뭐가 뭔지, 누가 무얼 어떻게 했다는건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내 집중력의 문제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너무 많은 것을 짧은 분량안에 담으려고 했다는 인상을 지울수가 없다. 명탐정 코난이 마지막에 범인을 지목하고 모든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그런 상황이 중반부터는 계속해서 이어지니, 잠깐만 집중력을 잃으면 이야기에서 낙오되어 버리곤 했다. 생소한 일본의 역사만으로도 좀 헷갈린 감이 있는데 이렇게 복잡하게 꼬인 추리소설이기까지 하다보니, 읽는 입장에서는 이중고가 아니였나 싶다. 초중반까지는 빨려들어 갈듯 몰입해서 읽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래서 더 그런 부분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것 같다. 권력을위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면 애꿎은 백성들과 타국민의 생명은 안중에도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욕심을 막아내기 위해서도 또 권력을 탐하게 된다. 전쟁까지 불사하게 만드는 이 권력의 오묘한 힘 때문에 인류는 예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언제 싸움판에 내던져질지 모르는 숙명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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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축복
오가와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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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인 '나'를 화자로한 7편의 단편이 실린 연작단편집. 7편 어느 이야기에도 상실이라는 것이 있다. 예전에는 거기에  있던 것, 그렇지만 지금은 없는 것. 죽어 버린 남동생, 잊혀진 이야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기억, 따뜻한 추억등등. 여객기 안에 구비된 구토봉투를 수집하는 취미나, 비단잉어를 모두 들어내고 남겨진 황량한 연못, 어느날 갑자기 위로 들린 채 다시는 내려오지 않는 동생의 왼팔에 이르기까지, 섬찟하면서도 어쩐지 투명한 아름다움이 있는 상실, 혹은 소실. 이 책에 담겨있는 상실은 재생을 부른다. 아무 의미없이 그저 과거를 되돌아 보는 것이 아니라, 없어진 것의 의미를 생각하고, 그 빈자리를 더듬다 보면, 또 그자리에 새로운 것이 생겨나는 것이 느껴져 온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의 순서가 실종자들의 왕국으로 시작해서 소생으로 마무리 되는 것을 보면 잘 알수 있다. 

 
뭐랄까, 변함 없이 오가와 요코다운 책이라고나 할까. 메르헨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현실과 가상 세계 사이의 애매한 경계선 위를 주인공이 왔다 갔다하면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교묘하게 엇갈리는 그런 느낌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나는 이 작가의 책을 읽는 동안은 내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자각이 없어지곤 한다. 이야기 속에 푹 빠져 들어서 그런것이냐 하면, 그정도까지 몰입하면서 읽게 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어쩐지 알게 모르게 현실을 잊게 하는 힘이 있다. 그 힘이 이 작가가 아쿠다가와상이라는 큰 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였을 것이라고, 처음 오가와 요코를 알게 된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줄곧 그렇게 생각해왔다.

 
7개의 각각의 단편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이 책은, 소설가인 여주인공의 눈을 통해서 바라본 몇개의 시대를 잘라내 보여주고,최종적으로 그녀가 있는 현실로 돌아온다. 각각의 에피소드가 독립되어 있는 탓인지, 지루할 틈 없이 단번에 읽어 내려갔다.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따라 흐르는데로 살아가는 듯 보이는 그녀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무언가를 선택하면서 여기까지 걸어 왔을 것이다. 윤곽이 희미해지는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그녀의 마음만이 또렷하고 선명하게 빛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야말로 오가와 요코가 만들어 내는 세계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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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마 키 1 - 스티븐 킹 장편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86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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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수 고대하던 스티븐 킹의 신간이 나왔다. 타이틀은 듀마 키 "Duma Key". 듀마 키 라고 하는 것은, 플로리다주에 있는 작은 섬의 이름이다.

주인공 에드거는 건설 현장에서의 불의의 사고로 오른팔을 잃은데다가 뇌에도 큰 손상을 받게 된다. 기적적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극심한 두통과 억제하기 힘든 분노성 발작, 기억의 손실로 괴로워하게 되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데다가, 아내와 사랑하는 두 딸마저 떠나보낸 에드거는, 이럴바에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났다며 자살까지 심각하게 고려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에드거는 담당의사의 추천을 받아들여, 젊은 시절 조금 배운 적이 있던 그림을 다시 시작해 보기로 마음 먹는다. 오랜 세월 동안 살아 온 미네소타를 떠나 플로리다의 듀마 키로 옮겨온 에드거는, 생각지도 못했던 그림에 대한 자신의 재능에 놀란다. 그는 사고로 인한 후유증과 괴로움과 맞바꾼 이 재능을 꽃피워 화가로서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그림은 평범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가 빼놓고 그리지 않는 부분은 현실에서 소멸하고, 그리는 것들은 현실이 되어 나타나는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다. 이 듀마 키라는 섬에는, 무언가 터무니없이 이상한 힘이 있다!  그 비밀을 푸는 열쇠는 이 곳에 살고 있는 한 노파와 그녀의 쌍둥이의 자매에 얽힌 과거속에 숨겨져 있는 듯하다.

"듀마 키의 그림들이 가져오는 정서는 공포였다. 억제된 공포. 썪은 돛에 묶인 채 해방을 기다리는 공포."

스티븐킹의 소설에는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그 만의 공포가 존재한다. 먹구름처럼 엄습해 오는 공포는 대체로 마지막이 되는 순간까지도,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좀처럼 갈피를 잡기가 힘들지만, 반면에 그 존재감만은 당장이라도 눈에 보일것 처럼 뚜렷하다. 책을 읽는 내내 정체를 알수 없는 무언가에 지배되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한다. 그 존재감은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것이다. 굳이 비슷한 것을 발견할 수있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킹의 또다른 소설 속 뿐일 것이다. 스티븐 킹의 소설이 아니면 읽을 수 없는 이런 독창적인 공포는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서, 몇번을 실패하더라도 여전히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고 또다시 그의 소설을 찾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 같다. 듀마키를 발표한 이후에 어느 인터뷰에서, 듀마키에 대한 극찬이 난무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킹은 지금의 평론가들이 자신의 소설을 읽으며 자란 사람들이기 때문이여서라는 답변을 한 적이 있었다. 반대로 자신에게 혹평을 가할 평론가들은 이미 은퇴했거나 저세상으로 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작품에 비판을 가할 평론가가 없다는 이야기. 요는 비평가들이 모두 자신의 팬이라서 점수를 많이 받을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킹의 겸손이다. 최근에 그가 내어놓은 작품들이 그리 평이 좋았던 것만은 아니였던 것만 보아도 그렇다. 듀마키는 왕의 귀환이라는 말이 결코 무색치 않은 작품이다. 듀마키를 지배하는 공포는 킹만이 만들어 낼수 있는 전형적인 킹표 공포였다. 독창적인 분위기와 독창적인 캐릭터, 독창적인 설정, 그 이상으로 독창적인 스토리. 그리고 여전히 힘을 잃지 않은 유머러스한 대사들. 킹을 좋아하는 독자의 눈으로 볼때 듀마키는 그야말로 최상급의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렇다면 킹을 모르는 독자에게는? 모르긴 몰라도 킹교의 독실한 신자의 길로 가는 티켓쯤 되지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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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 개정판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북스토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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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크고 작은 부조리한 상황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것을 감내하고, 이겨내면서 살아갈수 있는건 아마도 그것이 스스로 컨트롤 가능한 범위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한도를 넘어서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이 책에서는 이미 그 한도를 훌쩍 뛰어넘어 최악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경쾌하고도 실감나게 펼쳐진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각 인물들은 컨트롤 불능인 수레에 태워져 한없이 바닥으로 내리 꽂혀간다. 이럴리 없는데, 이럴리 없는데 하면서도 자꾸자꾸 수렁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그 과정이 매우 재미있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져 내리면서 찾아온 극심한 불경기 속에서도 착실하게 꾸준히 일을 해, 어떻게든 철공소를 유지하고 있는 가와타니 신지로. 거래처는 물론이고 종업원이나 가족, 게다가 공장의 소음때문에 불평을 늘어 놓으러 오는 이웃주민들에게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피곤하고 괴로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노무라 가즈야는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고 파칭코와 다른 사람의 주머니를 터는 것으로 수입을 대신하고 있는 신통치 않은 인생. 후지사키 미도리는 은행의 창구 업무에 매달려 그 나이 또래의 아가씨다운 즐거움도 누리지 못하고, 이복 여동생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 세 명의 인물 모두 자신만큼 재미 없는 인생을 보내고 있는 인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셋은 전혀 안면이 없는 사이이며, 서로간에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는 상태에서 이야기는 출발한다. 그러나 인생은 어디서 어떤 식으로 틀어지게 될지 모른다. 신지로는 거래처의 권유로 대담한 설비투자를 할 결의를 한다. 가즈야는 야쿠자에 몸담고 있는 친구와 함께 톨루엔을 훔쳐 돈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미도리는 은행직원들과 캠프에 간 밤, 지점장에게 성폭행 당할뻔 한다.

여기서부터 세 명의 인생은 소리를 내며 붕괴하기 시작한다. 세 명 모두 비록 별볼일 없는 매일이 반복되는 인생들이기는 하지만 설마 이런 엄청난 일에 휘말리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중반까지는, 잔잔하던 세 명의 일상생활에 어쩐지 불온한 공기가 섞여 들어오는 모습을 진지하고 세세하게 묘사해 나간다. 인물들에게 상당히 감정이입이 되어가는 중반 이후부터는 점차 비참한 상황에 빠져버리고 마는 인물들의 모습을 빠른 페이스로 그려나간다. 그 상황이라는 것이 실감날 정도로 현실적이고 어떤 의미로는 정말로 비참하기 이를데 없어서, 보고 있기가 안타깝고 괴롭다. 그 중에서도 철공소 사장인 신지로의 인생은 참 뭐라고 말하기 힘들정도다. 그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는데, 결과는 자꾸자꾸 나쁘게 되어 간다. 그것이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고 알면서도 끌려들어갈수 밖에 없는 필연의 연속이다. 종반,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고 나서부터는 롤러코스터 전개로, 너무나 가혹하고 혹독하다고 여기면서도 무심코 웃어버리게 되는, 감정을 초월한 시추에이션의 연속이다. 다만, 라스트가 조금 구제라면 구제랄까. 

어이없을 정도의 최악의 상황이지만 한발만 잘못 디디면 누구에게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소설이니까 다소 과장되어 설정되어 있지만, 최악의 상황에 이르는 과정이나 결과는, 그것이 크던 작던간에 현실속 누구에게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엉망진창 코미디처럼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속편하게 웃을수가 없다. 예를 들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는 사채 빚이나, 뒤얽힌 남녀관계가 가져오는 파멸 등, 현실 사회에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이 되는건지도 모르겠다. 세밀한 인물묘사, 심리 묘사, 그리고 서서히 주인공들을 궁지로 몰아넣어 가는, 더불어 독자까지도 괴롭히는 작가의 수완이 훌륭하다. 이 정도면 심리 서스펜스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작가의 대표작인 인더폴이나 공중그네와는 맛이 상당히 다르다. 그러나 사람을 바라보는 눈에 시니컬하고 따뜻함이 섞여있는 점만은 여전하다. 

사정없이 칼을 내리치던 작가는, 그러나 칼날이 목에 닿기 직전에 거두어들이는 방법을 택했다. 최악으로 치닫는 스토리이지만 그 결말만은 최악을 피한다. 모두가 수긍할만한 타협점을 보여주면서 잘 마무리 된다고나 할까.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지만, 그러나 결코 최악은 아니다. 어떤 수렁속에 빠져있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일 용기만 있으면, 다시 헤쳐나갈 기회는 있다는 걸 보여준다. 이 세상, 좀 더 상냥하게 서로를 배려 해주는 마음이 있다면 애초에 소설속 같은 상황은 만들어지지도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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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루미네이티드
매트 브론리위 지음, 정영문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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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이란 장르가 주는 쾌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실존하는 역사에 작가의 상상력이 덧입혀져 만들어진 이야기가 마치 오랜세월동안 숨겨져있던 비밀을 실제로 밝혀낸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데 있는 것 같다. 잘 쓰여진 작품일수록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불분명하다. 불분명하면 불분명할수록 예의 그 쾌감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 같다. 내가 팩션이란 장르에 열광하고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유명한 베스트셀러소설 다빈치코드였다. 명성만큼 재미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 때문에 팩션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감명 깊게 읽은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이런 류의 소설을 상당히 즐겁게 읽어 왔으면서도 그 재미의 이유가 역사와 허구의 교묘한 결합이라는 방식에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팩션이라는 장르와 그 정의를 알게 해주었다는 의미. 아마 이 책의 홍보문구에서 팩션이란 단어를 상당히 많이 사용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뒤로부터 비슷한 류의 소설을 의식적으로 찾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이 팩션은 나에게 있어서 실패율이 적은, 만족도가 아주 높은 그런 장르가 되었다.

 
매트 브론리위라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 게다가 사전정보도 하나 없이 뜬금없이 등장한 이 일루미네이티드라는 소설에 강한 흥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바로 구텐베르크 성서. 그 구텐베르크 성서의 비밀이 풀린다는데 호기심이 발동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창피한 것은 구텐베르크하면 금속활자로 너무나 유명하기도 하고, 그 이름이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기도 해서 당연히 그 배경지식도 상당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치고 보니 정작 구텐베르크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오직 금속활자만이 구텐베르크에 대해서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역사속 인물의 이름만으로 주체할수 없는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역사라는 것이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미스테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속의 인물, 유물. 지금의 우리들처럼 분명 한 시대의 주역이였을 그것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점 한꺼풀씩 베일에 쌓여간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겹겹이 쌓인 베일의 두께만큼 경이로움과 호기심을 던져주는 대상이 되어간다. 그 베일을 벗겨보고자 하는 욕구가 바로 팩션을 찾아 읽게 되는 이유, 구텐베르크의 성서의 비밀이 풀린다는 문구 하나로 독자의 흥미를 붙잡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고대성서학자였던 오거스트 애덤스는 구텐베르크 성서를 가지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말을 걸어온 매력적인 여성 산드리아에게, 오거스트는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고, 그녀가 건내준 휴대폰으로 아들과 통화한다. 그런데 전화속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는 급박한 것이였다. FBI라고 칭하는 누군가가 집안에 들어와 외할머니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도가 돌변하여 아들을 구하고 싶으면 책을 내놓으라는 산드리아. 그녀는 계획적으로 오거스트에게 접근해 왔던 것이다. 그 목적은 오거스트가 가지고 있는 구텐베르크 성서와 성서가 담고 있는 암호의 해독. 

 
구텐베르크 성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후의 납치극, 도주극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영상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어 헐리웃 영화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한쪽에서는 스릴넘치는 액션이 전개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구텐베르크 성서의 채식장식(illuminations, 인쇄된 본문 가장자리에 그려넣은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한 장식)에 담긴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채식장식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을 풀어내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구텐베르크 성서를 뒤쫓는 두 집단, 용의 기사단과 고아파에 대한 이야기가 또 더욱 흥미롭다. 두 비밀집단의 기원과 드라큘라 백작까지 언급되는 그 역사는, 난생 처음 접하는 부분이기도 해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그것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있다.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없지만, 이 책에서는 채식장식의 비밀을 풀어내는데 있어서 휴대폰이나 인터넷, 전산망등의 역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이기 때문에 쓰여질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불과 십여년 전에 나온 소설들만 해도 주인공이 어떤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도서관으로, 각 지방의 관련기관으로, 혹은 연락수단을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발품을 팔았던 것을 생각하면, 똑같이 몇백년 전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소설임에도 그 십년 사이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 이렇게 달라져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자고나면 급변하는 이런 엄청나게 스피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몇백년, 몇천년전이라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까마득하고 신비롭게 느껴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팩션이라는 장르의 인기가 높아져 가는 이유중 하나가 아닐까. 흥미로운 역사적 지식들을 많이 얻을수 있었다. 구텐베르크라는 인물에 대해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라는 도식이상의 것을 알게 해 준, 재미 그이상의 가치가 있었던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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