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루미네이티드
매트 브론리위 지음, 정영문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팩션이란 장르가 주는 쾌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실존하는 역사에 작가의 상상력이 덧입혀져 만들어진 이야기가 마치 오랜세월동안 숨겨져있던 비밀을 실제로 밝혀낸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데 있는 것 같다. 잘 쓰여진 작품일수록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불분명하다. 불분명하면 불분명할수록 예의 그 쾌감은 더욱 커지게 되는 것 같다. 내가 팩션이란 장르에 열광하고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는 유명한 베스트셀러소설 다빈치코드였다. 명성만큼 재미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 때문에 팩션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감명 깊게 읽은 것은 아니다. 그 이전부터 이런 류의 소설을 상당히 즐겁게 읽어 왔으면서도 그 재미의 이유가 역사와 허구의 교묘한 결합이라는 방식에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팩션이라는 장르와 그 정의를 알게 해주었다는 의미. 아마 이 책의 홍보문구에서 팩션이란 단어를 상당히 많이 사용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뒤로부터 비슷한 류의 소설을 의식적으로 찾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이 팩션은 나에게 있어서 실패율이 적은, 만족도가 아주 높은 그런 장르가 되었다.

 
매트 브론리위라는 생소한 이름의 작가, 게다가 사전정보도 하나 없이 뜬금없이 등장한 이 일루미네이티드라는 소설에 강한 흥미를 가지게 된 이유는 바로 구텐베르크 성서. 그 구텐베르크 성서의 비밀이 풀린다는데 호기심이 발동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창피한 것은 구텐베르크하면 금속활자로 너무나 유명하기도 하고, 그 이름이 뇌리에 단단히 각인되어 있기도 해서 당연히 그 배경지식도 상당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이렇게 마주치고 보니 정작 구텐베르크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오직 금속활자만이 구텐베르크에 대해서 내가 아는 전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역사속 인물의 이름만으로 주체할수 없는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역사라는 것이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미스테리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역사속의 인물, 유물. 지금의 우리들처럼 분명 한 시대의 주역이였을 그것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점점 한꺼풀씩 베일에 쌓여간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겹겹이 쌓인 베일의 두께만큼 경이로움과 호기심을 던져주는 대상이 되어간다. 그 베일을 벗겨보고자 하는 욕구가 바로 팩션을 찾아 읽게 되는 이유, 구텐베르크의 성서의 비밀이 풀린다는 문구 하나로 독자의 흥미를 붙잡을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고대성서학자였던 오거스트 애덤스는 구텐베르크 성서를 가지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말을 걸어온 매력적인 여성 산드리아에게, 오거스트는 이혼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아들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고, 그녀가 건내준 휴대폰으로 아들과 통화한다. 그런데 전화속에서 들려오는 아들의 목소리는 급박한 것이였다. FBI라고 칭하는 누군가가 집안에 들어와 외할머니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태도가 돌변하여 아들을 구하고 싶으면 책을 내놓으라는 산드리아. 그녀는 계획적으로 오거스트에게 접근해 왔던 것이다. 그 목적은 오거스트가 가지고 있는 구텐베르크 성서와 성서가 담고 있는 암호의 해독. 

 
구텐베르크 성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후의 납치극, 도주극은 상당히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영상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되어 헐리웃 영화와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한쪽에서는 스릴넘치는 액션이 전개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구텐베르크 성서의 채식장식(illuminations, 인쇄된 본문 가장자리에 그려넣은 아름다우면서도 기묘한 장식)에 담긴 비밀을 풀어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채식장식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을 풀어내는 과정도 흥미로웠지만, 구텐베르크 성서를 뒤쫓는 두 집단, 용의 기사단과 고아파에 대한 이야기가 또 더욱 흥미롭다. 두 비밀집단의 기원과 드라큘라 백작까지 언급되는 그 역사는, 난생 처음 접하는 부분이기도 해서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그것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는 욕구가 남아있다.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없지만, 이 책에서는 채식장식의 비밀을 풀어내는데 있어서 휴대폰이나 인터넷, 전산망등의 역할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이기 때문에 쓰여질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불과 십여년 전에 나온 소설들만 해도 주인공이 어떤 단서를 찾기 위해서는 도서관으로, 각 지방의 관련기관으로, 혹은 연락수단을 찾기 위해서 이리저리 발품을 팔았던 것을 생각하면, 똑같이 몇백년 전의 역사를 소재로 하는 소설임에도 그 십년 사이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방식이 이렇게 달라져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자고나면 급변하는 이런 엄청나게 스피디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몇백년, 몇천년전이라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까마득하고 신비롭게 느껴지게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것이 팩션이라는 장르의 인기가 높아져 가는 이유중 하나가 아닐까. 흥미로운 역사적 지식들을 많이 얻을수 있었다. 구텐베르크라는 인물에 대해서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라는 도식이상의 것을 알게 해 준, 재미 그이상의 가치가 있었던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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