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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리투스 1 - 시간과 모래의 미궁
민소영 지음 / 제우미디어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공화국일 때는 왕이 되려 했다는 게 대역죄가 될 수는 있어도, 왕이 되었을 때는 공화국을 원하는 자들의 목에 반역죄가 걸리는 법이야."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은 문화나 생활습관만 다른게 아니라, 국가, 지역별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하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판타지 소설 안에서도 마찬가지라서, 이 소설 역시 그 세계관의 중심에는 서로 국경을 인접하고 있는 몇개인가의 국가로 이루어진 가상의 대륙이 놓여 있다. 대륙은 크게, 탐욕스러운 정복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는 제국과 그와는 반대로 공화정을 채택하고 있는 공화국을 그 대립의 축으로 해서 또 하나의 왕국이 존립하고 있는 형국이며, 그밖의 짜잘한 세력들이 현실에서와 같이 서로 대립하거나 우호세력 혹은 중립세력으로서 상황에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국가간의 대립, 이념과 체제의 대립이라는 큰 틀 아래서 각국의 다양한 문화와 각계각층의 개개인들이 교류하며 만들어가는 이야기들이 광범위하게 전개된다. 권력과의 대립, 해전, 악령과 미궁이라는 불가사의한 현상과의 조우, 가족사, 개인사, 가슴아픈 사랑이야기 등등.
망망대해 위에 떠있는 한척의 범선이 그려진 표지는 <스피리투스>라는 제목의 어감과 더불어서 한편의 해양모험소설을 연상하게 한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치면 제일먼저 바다위에서의 시추에이션이 눈에 들어온다. "페노인 왕국"의 용병 "불리반"이 이끄는 함선 "페페치치 호"가 제국의 깃발을 휘날리며 바다위에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우아하고 아름다운 함선 "시모네"를 나포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배에는 선원이 탑승하고 있지 않다. 귀족티가 나는 앳된 소년이 한명 타고 있을 뿐. 페페치치호의 선웓들은 모두 본선으로 돌아가고, 포로인 소년과 함께 인양되는 시모네에 홀로 남아 잠을 청하던 왕국의 해군 장교 "카힐"은 잠에서 깨자마자 황당한 꼴을 당한다. 어느새 시모네는 본선과 떨여져 항해하고 있고, 오히려 자신이 포로 신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배가 사람처럼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흡사 전격 Z작전의 키트다. 시모네는 자의로 움직이는 배였던 것이다.
이 시모네의 존재가 굉장히 매력적이다. 바다의 미궁을 그리는 1장 이후에 무대는 곧 바다에서 육지로 전환하지만, 리호크라는 인물을 동경하는, 소녀와 같은 감성의 소유자(소유선)인 시모네의 존재가 있어서 바다에서의 장면이 좀 더 계속되어 주길 바랬다. 외모는 소년이지만 인간을 초월한 기이한 매력을 풍기는 "나단"과 그의 수하인 "리호크"와 "아르마냑", 그리고 주인공인 "카힐"과 우유부단한 천재화가이자 카힐의 아버지인 "체레반", 체레반이 데리고 나타난 소녀화가 "비앙카", 카힐의 배다른 형제 "쟝"과 쟝의 연인 "체칠리아"등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고 있던 다양한 등장인물들의 삶이 한 데 엮여, 갑자기 지하감옥에서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축으로 해서 새로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미궁안에서는 어김없이 어디선가 스멀스멀 나타나는 악령들. 사람들을 어디론가 끌고간다는 이 악령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악령이 말하는 "숨겨진 자"란? 이러한 설정뿐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저마다의 직업과 사회적 위치, 성격과 특징등 캐릭터의 개성이 제대로 서있다. 너무 비슷한 인물이 없어서 오히려 탈이랄까. 그 중에서도, 사람으로 치자면 미녀인 말하는 배 시모네, 그림에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는 소녀 비앙카, 안타까운 사랑의 슬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체칠리아등의 여성 캐릭터들이 특히 마음에 든다.
국산판타지와는 오랫동안 격조해 온 탓에, "민소영" 작가의 이름은 많이 들어보았으면서도 정작 지금까지 읽어본 적은 없었다. 민소영표 판타지는 <스피리투스>가 처음인 셈인데, 첫인상이 매우 좋다. 1권인 관계로 아직 시작에 불과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 시작이 좋다. 총 3권이 완결이라고 한다. 3권으로 끝나는 이야기라면 대단히 밀도높은 이야기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필요한 모든 정보와 수수께끼를 이번 1권에서 모두 쏟아내고 시작하겠다는 듯이 상당히 많은 화제들이 숨가쁘게 이어진다. 대륙의 역사와 현재 돌아가는 사정, 주인공 카힐을 포함해서 나단과 그 심복들의 정체와 배경, 각각의 등장인물이 안고 있는 사연과 말하는 배의 존재, 이 세계에서의 마법이란? 악령이란? 마치 문제집을 펼쳐든 것처럼 수많은 복선과 의문점들로 빽빽하게 차있다. 아마도 2권이나 3권즈음부터는 해답지을 읽는 기분으로 묵은 의문점을 털어내며 속이 뻥 뚫어지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 현재 2권에 대한 기대감은 극도로 높아져 있는 상태. 기다려야 하는 건 조금 싫지만 어차피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이 아닌가. 월척을 낚으려면 기다림은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