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3011

˝일이라는 건 늘 똑같아. 아침 아홉 시에는 계획과 능력과 진실로 가득하지. 오후 네시엔 실패자야.˝


헝가리 출신으로 영국으로 망명한 화가 야노스. 우여곡절 끝에 개인전시회를 개최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사라진다. 어디로 간걸까? 그의 절친인 영국인 존은 사라진 야노스의 작업실에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스케치북에 남겨진, 헝가리어로 쓰여진 야노스의 일기를 발견한다.



존은 일기를 통해 타국에서 망명자로 살아온 그의 고독, 이념과 예술사이에서 느꼈을 고뇌를, 그동안 몰랐던 친구의 진실을 처음으로 알게된다.

[나는 나 자신을 이중의 망명자로 만 들어 버렸어. 나는 우리들의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네. 그리고 내 인생을 당면한 목표가 아닌 예술에 쏟기로 했지. 그리하여 나는 내가 참여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바라보는 구경꾼이야. 그래서 나는 끊임 없이 질문을 던져,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작은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이 세상을 내 마음속에서 나만 의 차원으로 축소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거야. 어쩌면 우리 둘 다 우리가 기다리던 네번째 사람을 배반한 건지도 몰라. 작업을 하려 면 잠을 자야만 해. 작업은 끝이 날 수도 있지. 용서하게나.]  P.99



그의 일기에는 조국을, 이념을 버렸다는 자책김을 가지고 살아가야 했던 이방인의 외로움이 담담하게 담겨져있다. 그 외로움은 가끔씩 내가, 우리가 느끼던 감정과 별반 다르진 않았다. 가끔 야노스처럼 다 내려놓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단지 생각에서 끝날뿐인 생각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괜찮은 화가였다. 모든 자살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한 데서 나오는 결과다. 자살을 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이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미도 없다고 믿는다. 그 사람이 만약 예술가라면 그렇게 결여된 인정은, 적어도 일부분이나마, 그의 작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태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P.154



예술(삶)이 우선일까? 신념(가치)이 우선일까? 둘을 같이 할 수는 없는걸까?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질문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았다.

[다이애나가 없는 스튜디오에 있으려니 어쩐지 더 늙은 듯한 기분이 다. 한밤중에 깨어 여기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을 하면 삼십 년 전의 베를린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와 지금 내가 몰두하는 일의 차이가 나이를 온전히 실감케 한다. 그때 나 자신을 입증할 방법이 백 가지 였다면, 지금은 단 하나뿐이다.]  P.177




<우리 시대의 화가>는 절절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삶과 신념 사이에서 방황하는 고뇌가 두드러진 작품이었다. 담담한척 보이려고 노력했던 야노스의 마음이란... 외부로 표출되는 고뇌 보다는 내면으로 삭히는 고뇌가 더 절절한 법이다.

[돌이켜 보니, 가까운 사람들 중 누구라도 자신이 직면한 위기를 이해할 수 있으리란 희망이 가당찮다고 생각했을 뿐이라는게 확실해진다. 그리고 그 점에선 그가 옳았다고 생각한다.]  P.217




Ps. 일기 형식의 전개방식을 택하다보니 더 흥미롭게 다가왔다. 타인의 머릿속을 훔쳐보는 기분이랄까?



Ps. 지금까지 존버거의 작품을 네편 읽었는데 다 좋았었다~!! 모두 다 99점 이상?


그래도 꼭 줄을 세운다면,

1.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2. 결혼식 가는 길
3. 우리 시대의 화가
4. A가 X에게로

하고싶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4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아 2023-02-16 14: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인의 머릿속을 훔쳐보는 기분 재밌겠네요! 새파랑님 이렇게
계속 읽어나가시는 걸 보니 저도 존 버거 더 궁금해집니다^^

새파랑 2023-02-16 15:18   좋아요 1 | URL
문장들 깊이가 있어서 좋습니다. 오래오래 읽어야할거 같은 느낌의 작품입니다. 전 두번 읽었어요 ^^

그레이스 2023-02-16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있네요
책만 모은 자의 부끄러움!;;

새파랑 2023-02-16 17:15   좋아요 1 | URL
일단 모으면

언젠가는 읽지 않을까요? ^^

바람돌이 2023-02-16 2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쉽게 읽히지는 않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아름다운 책이 존 버거였던거 같아요. 안읽은 책들도 다 찾아서 읽고 싶게 해주는 새파랑님. ^^

새파랑 2023-02-17 06:35   좋아요 1 | URL
ㅋ 아 쉽지 않은건 맞는거 같아요. 문장들이 다 쉽게 쓰인거 같지는 않더라구요. 그런데 그냥 좋습니다 ^^

희선 2023-02-17 0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가도 여러 가지 생각이 많겠네요 예술이 정치에 이용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 때도 있고 지금이라고 아주 자유로운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희선

새파랑 2023-02-17 11:50   좋아요 1 | URL
예술을 예술 그 자체로만 보면 좋을텐데 꼭 그렇지는 않은거 같아서 아쉽긴 합니다 ㅋ 생각해보면 땔래야 땔수없는거 같기도 하고 🤔

페넬로페 2023-02-17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이 아니어도 우리는 다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을 듯 합니다. 그럴때 일기를 써야 하는가요! 저는 예술과 삶이 양립되기 힘들다고 봐요. 생각의 깊이가 남달라야 하기 때문에 평범하게 사는게 힘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새파랑 2023-02-17 17:06   좋아요 2 | URL
저도 일기를 쓰고는 싶은데 글씨를 못써서 잘 안되더라구요 ㅋ

페넬로페님도 예술가처럼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십니다~!!

페크pek0501 2023-02-24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2. 결혼식 가는 길
3. 우리 시대의 화가
4. A가 X에게로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3-03-10 17:11   좋아요 0 | URL
존버거 책이 페크님에게 잘 맞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