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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 가는 길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20년 9월
평점 :
N23010
"제 생각에 인생에서는요, 알게 된 무언가에 대해 의미를 주는 건 장소가 아니라 사람인 것 같아요. 아끼는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이요."
난 익숙한 것보다는 낯선 것을 좋아하고 희극보다는 비극을 좋아한다. 실제 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것을 책으로 또 접하고 싶지는 않고, 인생의 종착은 비극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저나 선생이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잘알 거예요.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는요,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이미 그 일을 마치고 나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죠. 그 일이 지나갔을 때를 말입니다. 이 친구는 아니에요.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만 생각합니다.] P.133
또한 너무 감정적인 것보다는 담담한걸 좋아하고, 극단적인 결말로 나아가는 것보다는 서서히 연착륙하는 결말을 좋아한다. 인생은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게 흘러가니까.
[제가 뭘 할 수 있었겠어요. 제가 한 일은 '스텔라'라는 말을 지어낸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지노에겐 인내심을 가지라고 했어요. 니농은 죽은 셈 치라고 했죠. 죽은 거라고. 니농이겪었던 일을 겪으면 누구나 죽을 만큼 힘들 거예요. 기다리라고, 그럼 어쩌면, 정말 어쩌면, 니농이 두번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 정말 그녀를 원하면 그렇게 하라고 제가 말했어요. 지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놀랐어요. 지노는, 잠시도 주저하지 않았거든요. 니농의 두번째 삶은 우리 결혼식으로 시작할 거야, 지노가 이렇게 말했어요. 그 전에 두 사람은 결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P.179
그리고 섬세한 묘사를 좋아한다. 불친절한 것보다는 하나하나 세세하게 그려주는 작품이 좋다. 그것이 풍경이든, 심리든간에 말이다. 작가가 의도했던 모습과 내가 느낀 그림이 일치할 때 느껴지는 쾌감은 어느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신기한 것은, 음악이 흐르면 그 장소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종종 음악은 몸 안으로 들어온다. 더 이상 귀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자리를 잡는다. 두 개의 몸이 춤출 때, 그 과정은 빠르게 일어난다. 그때 연주되는 음악은 춤추는 이들의 몸을 통해 들린다. 마치 녹음된 음악처럼, 백만 분의 일 초의 시차를 두고, 이미 음악이 그들의 몸 안에서 진동하는 것만 같다. 음악과 함께, 희망도 몸 안으로 들어온다.] P.191
존 버거의 <결혼식 가는 길>은 이런 내 취향을 완벽하게 만족시켜주는 작품이었다. 어찌보면 너무뻔한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감동적으로 느낀 이유는 그가 써내려간 아름다운 문장과 세밀한 묘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줄거리를 쓰고 싶지만 그러면 스포일러가 될거 같아서 생략한다...)
화자의 시점이 계속 바뀌는 것도 아주 좋았다. 한 사람의 시점으로만 계속 글이 이어지면 지루해질 수도 있고 감정이 극단으로 흐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시점 변화를 통해 슬픔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행동과 감정을 풍부하게 그리고 있다. 200페이지 내외의 작품이지만 600페이지의 이야기를 읽은 느낌이랄까?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한 줌 눈이면 훌륭하지
여름의 열기에 힘들어하는 남자의 입에는
봄바람이면 훌륭하지
항해에 나서려는 선원들에게는
홑겹 이불 하나면 그 무엇보다 훌륭하지
침대에 누운 두 연인에게는"
Ps. 올해는 존버거의 작품들을 전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