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L
로맹 가리 지음, 백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N22119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할수 있죠? 나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나더러 완전히 달라져서 다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죠? "


어떻게 보면 아나키스트 만큼 맹목적인 사람도 없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인 아나키스트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변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그런데 주변사람은 어느정도 까지 피해를 감내해야 할까?

['그녀' '그 여자' '다른 여자'라는 이름으로 아네트는 자신의 경쟁자를 생각했다.인류를 뜻하는 프랑스어 'humanité'는 여성형 명사다. 그녀는 인류를 자신에게서 연인을 빼앗아 가려는 까다롭고 만족할 줄 모르는 여자로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 공주, 대단한 귀부인, 바로 이것이 그 여자였다. 무정하고, 냉혹하고, 무시무시하게 변덕이 심하고, 피 흘리는 놀이를 좋아하는 여자. 그 밖에 사상이며 대의며 정치적 명제들, 이 모든 건 너무 복잡하고 비현실적이었다.] P.149



로맹가리의 <레이디 L>은 19세기 실존인물이자 아나키스트인 '아르망 드니'가 어느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쓰인 작품이다. 로맹가리는 이런 역사적 사실에 '아네트'라는 여성, '레이디 L'을 등장시켜서 멋진 이야기를 완성하였다.



도도하고 똑똑한 귀족인 레이디 L은 이제 더이상 이룰게 없는 여든살의 노인 여성이다. 영국에서 그녀의 인지도는 엄청났고, 그의 자손들은 모두 영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권력층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이상 이룰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이 아는 비밀 이야기를 친구에게 털어놓는다. 사실 그녀는 귀족출신이 아니었다.

[레이디 L은 늘 영국 하늘을 무감한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어떤 은밀한 동요도, 어떤 분노도, 어떤 걱정도 상상할 수 없었다. 심한 폭우가 쏟아질 때조차 참극은 없었다. 격렬한 비바람조차 그저 잔디에 물을 주는 정도로 그쳤다. 벼락은 아이들에게서 먼곳에 떨어졌고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은 피했다.] P.11



어린시절 아네트는 아나키스트인 아버지의 학대로 인해 집을 나와 거리의 여성이 돼었지만, 아름다운 미모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다가 똑똑하기 까지 했다. 매력적인 여성인 그녀앞에 아나키스트은 아르망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는 아르망에게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아르망이 자신에게 하는 말을 한 마디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와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녀에겐 충분했다. 그러나 그 뒤 오래도록 그녀는 그때 아래층에서 리스트의 선율이 들려오는 동안 그가 한 말을 감미로운 냉소까지 전부 기억해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를 너무도 잘 알게 된 그녀가 잘못 생각할 리가 없었다. 그의 아나키 개론에 그녀가 새로운 장 하나를, 마지막 장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 정도였다.] P.70



아르망 역시 그녀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가 그녀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혁명이었다. 아르망은 매력적인 아네트를 귀족으로 위장하여 혁명에 필요한 돈과 정보를 빼내는데 이용하기로 한다. 아네트 역시 아르망의 생각에 공감하여 이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녀는 혁명보다 사랑을 더 중요시하는, 일반적인 사람이었다.

[기억하세요. 당신은 다가갈 수 없는 먼 존재입니다. 당신은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올림포스 산에 홀로 선 여신입니다. 누구도 감히 어느 누구도 이런저런 추측을 할 수 없고 아주 멀리서 정중하게 당신을 숭배하며 한숨만 내쉴 수 있을 뿐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에게서 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얻어낼 겁니다.] P.99



처음에는 아네트 역시 혁명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혁명을 위해 돈많은 귀족이자 자유로운 영혼인 글렌데일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아네트는 글렌데일과 가까워 질수록 자신이 그동안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혁명의 무모함을, 사랑의 진실함을 깨닫게 된다. 글렌데일은 그녀에 대해 모든걸 알고 있으면서도 아네트에게 청혼하고, 그녀는 이를 받아들인다. 순식간에 진짜 귀족이 된다. 하지만 이를 아는 사람은 글렌데일과 아르망 뿐이었다.

[당신과 나, 우리는 둘 다 친구들에게 하듯 사물들에 애정을 줄 줄 알죠. 그것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무생물이라고 말하는 것들의 불가사의한 세계를 돌볼 줄 알죠. 사물은 우리가 버려둘 때만 무생물이 되는겁니다. 사물들이 살아나려면 눈길과 우정이 필요해요. 내가 죽게 되면 내 친근한 세계가 모조리 흩어질 겁니다. 사방으로 날아가버릴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정말 고통스럽소. 나는 당신이 내 뒤를 이어 내 작은 마법의 세계를 지켜주었으면 하오. 당신이 나와 결혼해주길 바라오.] P.146



이후 노년이었던 글렌데일은 죽게 되고, 아르망은 그동안의 죄로 인해 감옥에 가지만, 8년이 지난 후 아네트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을 도울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녀의 정체가 탄로날지도 모를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 위기를 생각하기 보다도 여전히 아르망에게 마음이 가있었고, 그와 함께 자유로워 지는것을 꿈꾸기도 한다. 그런데 아르망은 여전히 혁명에 눈이 멀어 있어서 아네트의 마음을 보지 못한다. 조금만 더 이성적이었다면, 조금만 더 옆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까?

[그녀는 '우리'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그것은 '아무'를 의미했다. 기껏해야 투박한 콧수염과 중산모를'쓴 자유, 평등, 박애가 찾아와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단두대로 향하는 길을 그에게 가리키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참으로 이상해. 고귀하고 관대한 생각도 도를 넘어서면 곧 편협해져버리니.' 그녀는 다정한 적개심을 품고 그를 바라보고 그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생각했다.] P.216



과연 아네트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아! 내가 당신을 꼭 만나야만 했을까요,
당신이 내 마음에 들어야만 했을까요,
순진하게도 내가 당신에게 고백해야만 했을까요,
거만하게도 당신은 침묵을 지켜야만 했을까요,
내가 당신을 사랑해야만 했을까요.
당신이 날 절망에 빠뜨려야만 했을까요,
그런데도 내가 당신을 숭배해야만 했을까요.
그래서 당신이 날 살해해야만 했을까요!"




<레이디 L>은 이상만 높고 현실적이지 않은 아나키스트들을 은근히 까는(?) 로맹 가리의 비판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기 신념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하는 혁명은 과연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상을 실현하기 이전에 주변사람의 마음을 얻는게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Ps. 1. 책이 옆에 없어서 줄거리랑 이름이 약간 틀릴 수도 있습니다 ㅎㅎ

Ps. 2. 역시 로맹가리! 라는 감탄이 나오는 작품이었다. 유머속에 감춰진 쓸쓸함이 정말 좋다. 그리고 마지막 반전까지도.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10-05 12: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먼저인 여자 혁명이 먼저인 남자의 사랑이야기인가요. 마지막 반전도 궁금합니다. *^^*

새파랑 2022-10-05 13:56   좋아요 2 | URL
마지막 까지 읽으면 화들짝 놀랍니다. 새벽의 약속이나 자기앞의 생과 같은 감동이 있는 작품이기 보다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

미미 2022-10-05 12:2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름이 아르망?>.<
줄거리가 흥미로워보여요!
영화 아네트도 나쁜 아빠가 나온다고 알고 있는데 신기하네요

새파랑 2022-10-05 13:58   좋아요 2 | URL
아르망 맞을거에요 ㅋ 제가 책을 다른데 두고 와서 북플에 밑줄그은 문장보고 써서 부정확할수도 있습니다 ㅋ 아네트가 불우한 어린시절의 상징인걸까요? 😅
요책은 재미있습니다~!!

페넬로페 2022-10-05 13: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상만 높고 현실적이지 않지만 요즘 같은 시국엔 아나키스트가 되고 싶어요.
새파랑님의 로맹 가리 사랑!
따라 갈 자가 없어요^^

새파랑 2022-10-05 15:14   좋아요 4 | URL
댓글이 사라졌네요~!! 전 로맹가리가 좋더라구요 ㅋ 그냥 애정이 갑니다 ㅋ 이름부터 멋집니다~!!

scott 2022-10-07 00:45   좋아요 3 | URL
닉네임 바꿔여
새로맹☺

새파랑 2022-10-07 07:39   좋아요 3 | URL
전 소세키가 더 좋습니다~!! 새세키로 바꿔볼까요? ^^

그레이스 2022-10-05 18:5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존 버거도 아나키스트를 소재로 한 작품을 썼는데... 예술가들의 심취한 사상!
이상적인데 반해 쟁취는 극렬한 투쟁을 요구하죠
그러기에 사랑이 비극적일듯요

새파랑 2022-10-05 19:44   좋아요 4 | URL
아 존버거의 작품도 떠오르네요 ㅋ 그 작품도 좋았는데 ㅎㅎ 두 작품이 다 아나키스트를 소재로 하지만 분위기는 완전 극과 극인거 같아요 ㅋ

scott 2022-10-07 0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리옹 자살 하지 않앟다면 노벨상
받으셨을지도😂

새파랑 2022-10-07 07:38   좋아요 2 | URL
가리옹 아마 노벨문학상에 더해서 노벨평화상까지 받지 않았을까요? ^^

모나리자 2022-10-10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로맹가리 작품 거의 읽으셨겠네요.
작가마다 작품 파고드는 새파랑님 대단하세요.^^

새파랑 2022-10-11 07:59   좋아요 2 | URL
로맹가리 작품이 하도 많아서 이제 절반정도 읽은거 같아요 ㅋ 아직도 갈길이 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