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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을 막는 제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7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21년 8월
평점 :
N22111
"이 땅에서 무언가를 자라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어요…"
꿈은 컸다. 하지만 뒤늦게 불가능한 꿈인 걸 알았다. 하지만 중간에서 포기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내가 살아온 모든 걸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주 조그마한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해봐야 한다. 혹시 가능할지도 모르니까, 이대로 포기하기에는 지난 세월이 너무 안타까우니까.
뒤라스의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 어머니와, 이런 어머니의 믿음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쉬잔과 조제프의 젊은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식민지라는 달콤한 꿈을 이루기 위해 프랑스에서 캄보디아로 넘어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캄보디아로 넘어오게 되고 이곳에서 오빠 조제프와 주인공인 쉬잔을 낳는다. 이주 초반에는 안정적이고 풍족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아버지가 죽게 되고, 가족의 삶은 점점 힘들어진다. 어떻게든 가족을 먹여살려야 하는 어머니는 이일 저일을 다해서 돈을 모으고 식민지 은행 토지국으로부터 엄청난 규모의 땅을 산다. 어머니는 이 땅을 경작하여 많은 돈을 벌수 있을거라는 꿈을 꾼다.
하지만 토지국에서 판 땅은 매번 태평양 바닷물이 유입되어 경작이 불가능한 땅이라는게 밝혀진다. 어머니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방을 쌓으려는 계획을 세운다. 제방을 쌓아 바닷물을 막는다면 불모의 땅은 더이상 불모의 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태평양을 막는게 이성적으로 가능할까? 처음부터 막는게 가능했다면 토지국에서 어머니에게 땅을 그렇게 팔았을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막을 수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제방을 쌓는다. 하지만 모든 돈을 들여 쌓은 제방은 태평양에 쓸려 내려간다. 그리고 그 땅은 그렇게 불모지로 남는다.
[갑작스러운 광적인 희망으로 마침내 오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난 평야의 농부 수백 명이 온힘을 쏟아부어 제방을 쌓았는데, 그 제방이 태평양 파도의 단순하고 가차 없는 공격으로 단 하룻밤 사이에, 마치 카드로쌓은 성처럼 그대로 무너져 버린 광경을 어느 누가 비탄과 분노 없이 떠올릴 수 있겠는가? 또 어느 누가 도대체 그런 어처구니없는 희망이 왜 생겨났는지 밝히기보다는 그냥 모든 것을, 그 평야를 지배해 온 비참한 가난부터 어머니의 발작까지 모든 것을 운명적인 그날 밤의 사건 하나로 설명하고 싶은, 천재지변이라는 간략한, 하지만 매력적인 설명으로 만족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P.28
이제 어머니에게 남은 돈은 없고, 은행으로부터 대출 역시 거부된다. 이러한 가난은 자식은 쉬잔과 조제프 에게도 영향을 준다. 매일매일을 힘겹게 살아간다.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프랑스인이라는 우월감만 남아있을 뿐 그들에게 실질적으로 남아있는 건 없다.
[어머니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었다. 어머니는 늙었고, 너무 많은 불행을 겪었고, 웃을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웃음이 터지면 그 웃음은 어머니를 휘어잡아 위험할 정도로 흔들어 댔다. 어머니가 웃어도 그 웃음의 힘이 어머니에게서 나오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보고 있기 거북하고 어머니가 제정신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P.52
그러던 어느날 조씨라는 엄청나게 돈이 많은 부르주아가 등장한다. 그는 쉬잔에게 한눈에 반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질적으로 엄청난 구애를 한다. 어머니는 조씨가 딸과 결혼한다면 엄청난 돈이 생길 것이고, 그래서 다시 제방을 쌓을 수 있을거라는 새로운 꿈을 꾼다. 어떻게든 딸에게 조씨가 청혼할 수 있도록 상황을 만든다.
[조 씨와의 결혼은 그들이 평야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이 결혼이 성사되지 않는다면 방조제방의 실패와 다름없는 또 한 번의 실패였다. 어머니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조제프가 결론을 맺었다. "절대 안 될거예요. 안 되는 편이 쉬잔한테도 낫고요." ] P.126
하지만 쉬잔은 조씨에 대해 어떠한 애정도 느끼지 않는다. 그녀 역시 조씨의 돈에 대해서는 욕심이 있으나, 어느정도 수준의 벽을 친다. 더이상 가까워지지 않도록 그를 밀어낸다. 오히려 조씨와 가까워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오빠인 조제프의 눈치를 본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돈에 굴복하기 보다는 자존심을 선택하는 쉬잔과 조제프였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불행을 야기하는 어머니의 욕심, 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릴 뿐이었다.
["어머니의 불행은, 결국, 뿌리칠 수 없는 마법 같은 거야." 카르멘이 다시 말했다. "마법을 잊어버리듯이 어머니의 불행을 잊어야 해. 그러려면 어머니가 죽든지 아니면 네가 남자를 만나야 해."] P.205
과연 태평양을 막는 제방을 다시 쌓을 수 있을까???
워낙 <태평양을 막는 제방>에 대한 극찬도 많고, 리뷰도 많아서 그런지 책을 구매해 놓고도 쉽게 손이 안갔다. 그래서 뒤늦게 읽었는데,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일단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고,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어서 이해하기 쉬웠다. 몇달전에 읽은 뒤라스의 <죽음의 병>은 함축적이고 다 생략되어 있고 상당히 모호했는데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죽음의 병>과는 완전히 대조적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에 대한 비판이 기본 소재로 깔려 있지만, 그것보다는 불가능한 꿈을 버릴 수 없는 어머니와, 가난하더라도 비굴해지지 않고 자신들만의 신념을 지키려는 쉬잔과 조제프의 모습이 더 인상적이었다. 가난이 인간을 절망케 하더라도 소중한 것을 버리게 할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