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22063

˝개인적으로 저는 인간을 심판하기보다는 이해하는 편을 더 즐깁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전기와 평전으로 유명하지만 공교롭게도 난 그의 소설을 주로 읽었다. 특히 그의 소설에서 표현되는 심리묘사가 마음에 들었는데, <감정의 혼란>과 <초조한 마음>은 그의 심리묘사가 정점에 달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에 읽은 <보이지 않는 소장품> 역시 츠바이크의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단편집이다. 총 여섯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감정의 혼란> 이나 <초조한 마음>의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역시라는 감탄사를 불러일으킬 만큼 좋았다.



1. 첫번째로 수록된 <아찔한 비밀>은 낯선 남자와 어머니의 애정행각을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이야기이다. 젬머링이라는 도시에 휴양을 하기위해 온 아이 ˝에드거˝와 아이의 어머니는 그곳에서 한 남작을 만난다. 여자를 밝히는 남작은 그곳에서 아이 어머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도적으로 아직 어린 아이인 ˝에드거˝에게 접근한다.

[아이의 마지막 말에는 상당한 자부심이 실려 있었다. 아이들은 항상 병을 앓는다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법이다. 자신이 위험에 처하면 가족들이 자신을 곱절로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18



아무도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아 외롭던 ˝에드거˝는 자신에게 따뜻함을 보여준 남작에게 금새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남작의 목적은 어머니와의 애정행각 이었고, 어머니와 친해진 남작은 곧 아이에 대한 관심도 접게 된다. 게다가 어머니 역시 아이에게 관심을 거두고, 남작과의 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아들 ˝에드거˝를 떼어 놓으려고 한다.

[홀에서 빠져나와 계단을 오른 후 잠시 멈춰 선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펄떡이는 심장을 눌렀다. 잠시 쉬어야 했다. 넋이 나간 그녀는 가슴 깊숙이에서 한숨을 토해 냈다. 절반은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안도의 한숨이 절반은 아쉬움의 한숨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뒤엉킨 채로 핏속을 맴도는 탓에 조금 어지러웠다.]  P.42



남작에게서, 어머니에게서 배신을 당한 ˝에드거˝는 왜 두사람이 자신을 따돌리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그리고 두 사람이 왜 그런지를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과연 ˝에드거˝는 진실을 깨닫게 되고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에드거는 문득 알 수 없는 커다란 비밀이 이전과는 다르게, 손을 뻗치면 잡힐 만큼 가까이 있음을 느꼈다. 비밀은 아직 닫혀 있었고 풀리지 않았지만 바로 앞에, 바짝 코앞에 있었다. 아이는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엄숙하고 진지해졌다. 자신이 유년기의 막바지에 와 있음을 저도 모르게 예감했기 때문이었다.]  P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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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타인이 나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싫어하는지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못느끼는건 아니다. 다만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2. <불안>은 첫번째 작품과 대비되는 작품으로, 변호사인 남편을 둔 귀부인 ˝이레네˝가 젊은 예술과와 사랑에 빠지지만, 그 예술가의 여자친구에게서 바람피는 것을 들키고 난 후 겪게되는 불안한 심리를 그린 작품이다. 예술가의 여자친구는 곧 ˝이레네˝에게 돈을 달라고 협박을 하는데, ˝이레네˝는 가족에게 들킬까봐 돈을 주게 된다.

[˝당신은...그게 사람들이 말을 못하는 게, 늘 그저 불안감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어쩌면 입 밖에 내는 게 수치스러워서…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이는 게 수치스러워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P. 149



이제 비극은 시작되고, 점점 더 요구하는 액수가 커지게 되고, ˝이레네˝는 점점 감당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게다가 그녀를 더 조여오는 건 남편에게 발각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레네˝는 남편이 전과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녀 역시 계속 불안한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게 되고, 이제 더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녀의 생활은 점점 피폐해진다. ˝이레네˝의 애인과 그의 여자 친구는 돈을 노리고 그녀에게 접근했던 걸까?

[불안감은 벌보다 더 힘든 것이니까. 벌은 심하든 심하지 않든 분명한 것이기에, 잔인하리만치 끝없는 긴장 속에서 너무도 불분명한 상태를 견디는 것보다는 나아요. 대놓고 우는 것보다는 속으로 우는 게 더 힘든 법이오.]  P.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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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요즘 시대의 매운맛 불륜 드라마의 올드버젼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약간 심심하고 착한 느낌?  그럼에도 ˝이레네˝의 불안한 마음이 글에 잘 녹아있어서 좋았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으로 타들어가는 마음이 더 고통스러운 법이다.





3. 표제작인 <보이지 않는 소장품>은 눈이 보이지 않는 예술품 소장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장가는 전쟁으로 인해 시력을 잃고 가족과 함께 조용한 시골에서 살아가지만 결코 불행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일생동안 모은 예술품들의 컬랙션이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기억속에 그 예술품은 여전히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소장가가 모았던 예술품들중 다수는 이미 그의 집에 없었다. 가족들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수집가 몰래 예술품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집가는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게다가 갑지기 고미술품 상인인 주인공 ‘나‘ 까지 소장가 집을 방문하게 되고, 소장가는 ‘나‘에게 자신이 지금까지 모아둔 소장품을 보여주려고 한다. 소장가는 자신이 모은 예술품들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챌까?

[하지만 제가 얻은 것은 그 이상이었습니다. 기쁨이 없는 암울한 시대에 다시금 순수한 열광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오로지 예술에 몰입하여 도취할 수 있는 해맑은 정신, 그런 것을 우리 인간은 오래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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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것만이, 옆에 있는 것만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환상만으로도, 기억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





4. 마지막에 실려있는 <어느 여인의 24시간>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은 작품이었다. 액자소설의 형식으로 바깥 소설에서 한 여인이 자신의 남편과 가족을 버리고 한 젊은 남자와 함께 도망을 간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주인공인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녀의 용기를 칭찬하고, 이를 눈여겨 본 노부인 C는 ‘나‘에게 과거 자신이 경험한 유사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람들은 대부분 상상력이 빈약하다. 어떤 것이 눈앞에서 감동을 주거나, 그들의 감각 속으로 집요하게 뾰족한 쐐기를 박아 넣는 경우가 아니라면 동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손을 뻗치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사소한 일이라도 일어나면 사람들은 곧 지나치게 열을 올리곤 한다. 그런 경우 사람들은 상식을 넘어설 정도로 과장되게 격렬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의 습관화된 무관심을 보상하려 든다.]  P.263



40살의 나이에 남편을 잃은 노부인은 어느날 한 도박장에서 노름에 완전 빠져버린 한 젊은 사내를 눈여겨본다. 그는 돈을 모두 탕진하고 마치 자살할 것처럼 도박장을 떠난다. 노부인은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고 그의 죽음을 막기 위해 그와 밤을 함께 보내게 된다.

[마치 제가 기적을 이루고 성녀로 추앙받은 것처럼 신의 은총을 느꼈습니다. 살면서 가장 끔찍했던 순간으로부터 가장 놀랍고 감동적인 순간이 생겨났기에 이 두 순간은 쌍둥이 자매와도 같았습니다.]  P. 313




하지만 그를 구하기 위해 했던 그녀의 행동은 연민이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고, 그와 함께 하기를, 그가 그녀를 잡아주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그는 단지 도박 중독이었을뿐 그녀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제 더이상 도박을 하지 않기로 그녀에게 다짐하였지만 그녀에게서 받은 돈으로 다시 도박장을 찾은 그는, 그를 찾으로 온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그 순간 저는 최고로 대담한 일을 벌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아끼고 쌓아 두었던 제 삶 모두를 단번에 내팽개칠 준비가 되어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제 앞에 무의미하기 그지없는 장벽이 나타나는 바람에 저의 정열은 그 장벽에 이마를 부딪치고 맥없이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P.335



그렇게 뒤늦게 찾아온 감정과 이에 따른 좌절로 인해 그녀는 좌절감을 느끼게 되고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지만,  그때의 아픔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무뎌지게 되고, ‘나‘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맞게 된다.

[한번 마음에 담았던 것들을 이야기로 풀어낸다면, 어쩌면 사라지지 않는 강박관념과 끊임없이 그때를 회상하는 증상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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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말할 수 없는 고민을 한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고민으로 힘겨울 때에는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도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번 입밖으로 나온 말을 주워 담을수는 없다지만, 내면에서 썩어가는 것 보다는 좋지 않을까?







<보이지 않는 소장품>을 읽고 나서 마치 한권의 심리학 책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의 기본 바탕이 모두 사랑(불륜?)이라는 점이 약간 아쉽긴 했지만, 인간사의 기본이 사랑 아니겠는가~! 사랑의 형태에 따른 다양한 심리가 궁금하신 분들께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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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05-01 01: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소설이군요 츠바이크 소설뿐 아니라 다른 책도 못 봤지만, 소설은 심리묘사가 돋보인다고 들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담아두면 언제나 생각해도 누군가한테 말하면 더는 생각하지 않을지...

새파랑 님 남은 주말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새파랑 2022-05-01 07:09   좋아요 3 | URL
5월을 산뜻하게 시작하기 위해서 리뷰를 무리하게 썼습니다 ㅋ 이젠 새책 시작하려고 합니다 ^^ 희선님도 즐거운 일요일 보내세요~!!

singri 2022-05-01 05: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다른 책 읽을때 여자마음을 어찌 그리 표현하는지 깜짝 놀랬습니다.

새파랑 2022-05-01 07:10   좋아요 2 | URL
저도 왠지 모르게 공감이 가더라구요 ㅋ 츠바이크 작품을 통해 사람을 배우고 있습니다 ^^

페넬로페 2022-05-01 11: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가 작품을 여러 종류로 많이 남긴듯 해요. ‘보이지 않는 소장품‘의 제목의 의미가 그런 뜻이었군요.
기억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한 것이겠죠^^

새파랑 2022-05-01 13:59   좋아요 2 | URL
저도 보이지 않는 소장품이 뭐지? 했는데 저런 의미였더라구요 ㅋ 저도 이제 츠바이크의 평전이나 전기를 읽어봐야 할거 같아요 ^^

mini74 2022-05-01 11: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표제작 내용 넘 좋은데요. 보이지 않지만 가지고 있는~ 새파랑님 말씀처럼 기억만으로도 우린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
새파랑님 오랜만의 긴 리뷰 반갑고 좋고 그래요 *^^*

새파랑 2022-05-01 14:00   좋아요 2 | URL
4월에 읽은 책을 12권으로 만들기 위해 한밤중에 리뷰를 썼습니다 ^^

미미 2022-05-01 12: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새파랑님 어제 이 책으로 4월을 마무리 하셨군요!! 저는 <아찔한 비밀>이 주인공아이 때문에 가장 흥미진진했던 것으로 기억해요.ㅎㅎ5월도 파이팅입니다^^*

새파랑 2022-05-01 14:01   좋아요 2 | URL
츠바이크 찐팬 미미님 ㅋ 요새 아이들이라면 금방 눈치채지 않을까 합니다 😆 5월도 같이 화이팅 입니다~!!

han22598 2022-05-01 1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요약해주신 단편들이 모두 흥미롭네요. 츠바이크는 소설은 읽어야할 리스트에 있는데....언제나 읽게 될지. 이렇게나마 그의 글을 느끼고 있어서 좋아요 ^^

새파랑 2022-05-01 14:02   좋아요 2 | URL
아직 츠바이크 안읽으셨다면 전 <감정의 혼란>을 추천드려요 ^^ 짧고 금방 읽을수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