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쇠고기냐, 왜 등급으로 평가하느냐!". 이 구호를 누가 발명했는지 모르겠지만 오류가 있습니다.고기 등급분류는 인간등급 분류보다 역사가 더 짧으니까요.결국 인간은 등급을 나누는 동물이라 해야겠습니다.이러저러한 등급의 종류만도 손으로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지요.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은 아파트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당연히 아파트도 여러 등급이 있지요.그런데 아파트 등급을 알 수 있는 아주 재미있는 방법이 있습니다.바로 아파트 경비들에게 알아보는 것입니다.
자! 아파트에서 경비로 일하는 사람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중장년 이상 연령의 남자겠지요.아무리 남녀평등이라 하지만 아직까지 아파트 경비 일은 남자의 전유물입니다.여자들이 그다지 하고 싶어하지 않는 직종이기도 하고요.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인데 아파트 경비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하지만 아파트 경비 중에는 자신들이 근무하는 아파트보다 더 좋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그들의 전직이 워낙 다양하니 그들이 사는 곳도 다양합니다.내가 아는 분도 중산층이 많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퇴직 후에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아파트에서 경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경비들은 아파트 등급에 민감하며 또 나름대로 아파트 등급을 분류하고 있습니다.아파트에 경비 자리가 나면 지원자가 많이 몰리는 아파트는 상위등급에 속합니다.반면에 빈 자리가 나도 지원자가 거의 없는 아파트도 있습니다.이런 곳은 하위등급에 속하는 아파트인데 서글프게도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아파트가 여기에 해당합니다.낡고 허름하고 비좁고 주차장 시설이 열악한 곳이지요.
비싸고 고급스런 아파트는 당연히 아파트 경비들에게도 선호직장입니다.우선 월급이 더 높습니다.그리고 입주민들과 부딪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이런 아파트는 근무조건이 좋기 때문에 이직률도 낮습니다.반면 저소득층이 사는 낡은 아파트는 급료도 낮은 데다가 입주민들과 대면접촉하는 일이 많고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많습니다.당연히 이직률이 높지요.특히 공무원 같이 비교적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다 퇴직하여 이런 아파트에서 경비를 하는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얼마 못가 그만둡니다.
그냥 급료 문제뿐이 아닙니다.지은 지 오래되고 저소득층이 많이 사는 아파트에 대해서 이런 신화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정겹게 사는 곳 운운...". 하지만 아파트 경비를 하는 이들에겐 이런 곳은 급료 문제를 떠나 또다른 기피요소가 있습니다.바로 입주민들 간의 갈등이 많다는 것이며, 경비들에게 야료를 부리는 사람도 많다는 것입니다.그런 진상 부리는 입주민들은 품위없는 짓도 서슴없이 합니다.아파트 청소하는 아주머니들도 그런 증언을 하는데, 이런 아파트는 계단에 가래침을 뱉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청소하는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가래침 닦는 일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겠지요.
낡고 허름한 아파트는 대부분 복도식 아파트입니다.이런 곳은 방음장치가 잘 안 돼 있어서 층간소음 분쟁도 많습니다.우리나라 아파트 층간소음 분쟁이 위아래층끼리 많이 벌어집니다만 이런 곳은 벽과 벽 사이가 날림이라 옆집에서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릴 정도입니다.그러다보니 동일한 복도를 사용하는 가구들 중 한 두 가구만 목소리가 우렁차면 그 복도 입주민 전체가 소음에 시달리게 됩니다.유독 현관문을 쾅 소리가 나게 여닫는 사람들도 문제입니다.심야에 고요한데 쾅 소리가 나면 듣는 사람 입장에선 짜증이지요.게다가 위층 남자가 변기에 오줌 싸는 소리까지 나는 곳도 있으니 할 말 다했지요.조르르륵 철철철 그리고 물내리는 소리...
이러니 이웃간 말다툼이 육두문자에 주먹다짐까지...게다가 이런 아파트는 마이카 시대 이전에 지어진 곳이 많아서 주차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요즘은 저소득층도 차 가진 사람들이 많으니 주차 가지고도 갈등이 많이 일어납니다.이래저래 아파트 경비 하기가 힘들 일만 쌓여있는데 급료마저 낮으니 누가 이런 곳에서 경비 일 하고 싶겠습니까.
가장 큰 문제는 허름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는 자학증세를 가진 이들입니다.이런 아파트는 이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입니다.주거환경이 안 좋으니 돈이 좀 모이면 뜨는 곳이지요.이런 곳에 오래 남아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돈을 못모으는 사람들입니다.그렇지 않으면 이웃에 사는 이들이 점잖아서 층간소음이 비교적 덜한 사람들이라서 참고 살 수 있다는 것이지요.주사가 심한 사람이 이웃에 있으면 웬만하면 이사갈 것입니다.무엇보다도 이런 아파트는 주변 아파트 입주민 사이에서도 평판이 안 좋습니다.어린 학동들 사이에서도 가난한 아파트에서 산다고 놀림받습니다."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하는 질문으로 대학 안 나온 사람을 솎아내듯이 "어느 아파트에 사세요?" 하는 질문도 비슷한 기능을 합니다. 이러다 보니 "그래 나는 이런 곳에서 산다 어쩔래?" 하는 마음이 생기고 이런 상태에서 남을 배려하는 교양이나 예절과 담을 쌓은 이들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등급으로 따지면 안 된다고 고상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하지만 인간은 등급을 분류하는 존재입니다.우리가 쇠고기냐 하면서 분노하는 척하는 사람들도 평소에는 남들을 등급으로 분류하겠지요.그들이 분노하는 것은 자기와 똑같이 남들도 자기를 등급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 때입니다.게다가 자기가 남들에게 하위등급으로 간주될 땐 더 분노하겠지요.
요즘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인사하기 캠페인도 있습니다.얼마전 신문보도에 의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일수록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봐도 아는 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모르는 사람들끼리 눈인사나 목례라도 하는 것은 고급스런 예절이라고 여기기 때문일까요? 마음 따뜻한 이야기 류(특히 아침 라디오 사연에 자주 나오는)엔 아파트 경비에 관한 내용도 종종 있습니다.하지만 경비 일하는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 말고 좀더 적나라한 대한민국 아파트 공화국의 현실도 들려줍니다.불편하지만 냉정하게 본 현실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아파트에서 근무하는 경비 아저씨들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아파트를 어떤 등급으로 분류하고 있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아파트 경비에 대해 이런저런 점수를 매기듯이 아파트 경비 역시 여러분의 등급을 분류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시길...